24절이 없다. 비잔틴 계열의 사본에서는 24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있다.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be with you all. Amen." 허나 바울이 쓰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서 개역성경에도 (없음)으로 처리되어 있다.
25~27절은 한 문장이다. 그런데 문장 구조를 도통 알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주동사를 찾을 수 없고, 여러 전치사구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이제껏 바울의 문장들은 치밀하게 논리를 전개해온 그의 글 답게 분명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만은 바울답지 않다. 그렇다고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여러분을 굳게 세울 수 있는 한 분"이, 뒤에 있는 "그 한 분"이다. 굳게 세운다는 말은 '스테리조'인데, step이 여기서 왔다. 즉 두 발이 단단하게 지면에 고정된 상태다. 마치 그 한 분은 정원사처럼 이 땅에 우리를 심고 길러서, 거센 폭풍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로 굳건히 서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그 한 분.
그 분이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 "복음"을 통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이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시대들의 흐름 속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시대들의 흐름"이라고 풀어놓은 말은 '크로노이스 아이노이오스'. '아이노스'는 '시대'라는 뜻이고, '크로노스'는 '흐르는 시간, 연대기적 시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그 복음의 소식은 역사 속에서 감추어졌던 비밀이다. 그런데 그 비밀이 폭로되었다. 죽음을 이기고 모든 이에게 진실과 평화를 가져다줄 한 사람이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폭로'라고 풀어놓은 말은 '아포칼맆시스'로 흔히 '계시'로 번역되는 말이다. '아포'는 'from'이고, '칼맆토'는 '덮어놓다'. 즉 '아포칼맆시스' 덮어놓은 것을 열어재끼는 것이다. 감춰있던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감추어졌던 한 사람이 예언자들의 글을 통해서 드러났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모든 민족이 그 분을 신뢰하는 가운데 잘 듣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그 분의 말을! 그 분의 숨결을! 개역성경에는 "믿어 순종"이라 번역되어 있는 이 대목은, "신뢰 관계 속에서 경청한다"는 뜻이다. 모든 민족이 차별없이,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 안에서, 그 분의 말숨을 잘 받아들여, 올곧게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역사의 비밀, 예수가 드러나신 참 뜻이다. 따라서 예수를 드러내는 것은 화려한 예배도 아니고, 웅장하게 모인 군중들도 아니다.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 속에서 경청하고, 차별없이 살아내는 한 사람으로서 사는 일이 예수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올리브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고, 하나님께 받은 말대로, 숨다해 사셨던 분이 우리가 드러낼 바로 그 분이시다. 예수께 가능했던 이러한 삶이, 모든 민족에게 가능하다. 따라서 세계평화는 군비를 늘리거나, 너도나도 선진국 대역에 동참함으로 이뤄지지 않고, 오직 이것으로 가능하다. 모두가 예수와 같이, 예수 같이 사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수'로 가능할까? 과연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하게 하는 그 '수(力)'가 그 분께 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시대와 오는 시대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굳게 세우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이 분이시다.
첫줄과 마지막줄이 들어맞는 것은 문법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냥 내용상 끼워맞춘 것이지. 그러나 이 바울의 무너진 문법 속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한 분이 계신다. 오히려 우리를 굳게 세우시는 한 분의 흔적이 보인다. 바울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가 끝내 밝힌 것은 말의 완결성과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이구나' 탄복하고, 책장을 덮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규칙을 넘어, 의미를 밝힌다. "글자는 죽이는 것이요, 숨이 살리는 것"이라는 자신의 말대로.
그러니 좀 엉성하면 어때? 부스스 일어나 자판 앞에 앉는 내 모습부터가 이미 엉성하기 짝이 없는데. 그러나 좀 엉성하더라도, 한 분 하나님을 드러낼 수만 있다면, 나는 끝내 부족함이 드러날 지언정, 부족한 이와 함께 하시는 그 분이 내 삶을 통해 드러난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가 추구해야할 건 완결성이 아니라, 진실성이다. 역사의 완성은 '미정고(未定稿)'로 남겨두고, 그럼에도 역사를 완성하실 한 분을 신뢰하여, 그 분의 말숨에 진실하게 답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 분의 이야기는 분명 해피엔딩임을 알았으니까. 죽음 마저도 이 이야기를 망칠 수 없음을 확인했으니까.
오늘 우리네 삶이 꼭꼭 그렇게 되기를.
11499日(만31년 5개월 22일), D-30
오늘로 <로마서>를 끝냈다. 지난 4월, 세월호 추모식을 다녀온 뒤, '내가 선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왼뺨대기와 같이 파리바게뜨에서 고민하다가 든 생각이,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풀어보자. 내 속을 닦는 일부터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짧은 서신서는 그간 다뤄봤으니, 이번에는 다소 버겁더라도 이번엔 로마서를 풀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시작할 때 쓴 글)
하는 도중 나도 이걸 왜 시작했는지 잊고 있었다. 그만큼 로마서는 날마다 나에게 기다려지는 일이었다. 전날밤 잠자리에 누우면, '내일 빨리 일어나서 로마서 해야겠다'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왜'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그 시작한 일 자체가 좋아졌다. 타인의 아픔 때문에 시작한 일이, 나에게 유익이 되었다.
그럼에도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간 정말 내 속이 닦였을까? 이웃의 아픔을 끌어안을 수 있는 인격으로 자라고 있을까? 글로는 끝이지만, 삶으로는 오늘 다시 시작이다. 할 수 있다. 신뢰 관계 안에서, 그 분이 나를 믿어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