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의 '서로서로'는 공동체의 모든 식구로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자리에 있는 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장면인지 우리는 와닿지 않을 것이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같은 자리에 있다면 어떨까? 그냥 멀뚱멀뚱있는게 아니라 서로를 받아들이며 함께 한다.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을 떠올려보라. 그 사람과 당신이 서로를 받아들이며 함께 있다면 어떨까? 세월호 유족들과 정부 인사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며 함께 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 일이 그리스도의 일이다. 원수를 하나되게 한다. 그래서 용서다. 용서는 문제가 불거지지 않게 그저 봐주는 것이 아닌, 하나되기 위해 그를 죄악으로부터 세워 끌어안는 일이다. 하나될 수 없는 이들이 하나된다.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참'을 머리에 이셨다. "머리에 이고"라는 표현은 '휘페르'라는 전치사를 고쳐본 것이다. "위해서"라는 뜻인데, "위해서"는 "위로 두고" 이므로, "머리에 인다"고 해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에 이신 그 '하나님의 참'은 먼저는 유대인들을 섬기는 일이었다. 예수는 유대인으로 나셔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전통 안에서 그 전통의 참된 의미를 밝혀주셨다. 예수께서 참을 밝혀주실 때마다, 참을 내세웠으나 참도지 못했던 유대인들의 실상이 여실히 드러났다. 더불어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왔던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그의 삶으로 더욱 분명해졌다.
또한 예수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긍휼'을 머리에 이신다. 긍휼은 '같은 마음 품기'다. '공감'이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의 처지를 알아주어, 그들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셨다.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요, 하나님을 나타내는 건 우리 모두의 일이다. 그렇게 참과 긍휼이 예수 안에서 만났고, 그 자리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는 자리가 되었다.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로 인해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곧 공동체다. 그리스도의 몸이다.
[2]
우리가 서로서로를 받아들여야할 가장 핵심적인 증거로서 바울이 처음 제시한 것은 그리스도의 삶이다. 참과 긍휼의 삶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룬다. 그 약속을 이루는 삶의 형태가 공동체요, 우리는 이 공동체 안에서 모든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처럼.
바울은 이어서 시간을 좀 더 거슬러올라가 구약성서를 인용한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할 수 없다는 그 시절 통념과는 달리, 이미 구약성서 안에서도 모든 민족이 기뻐할만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록해두고 있었다. 인용은 시편18:19, 신명기32:43, 시편117:1, 이사야11:10.
이사야 인용만을 살펴보자.
이사야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을 위한 깃발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 구절을 바울은 이렇게 인용하였다.
"이새의 뿌리, 곧 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일어나는 이,
민족이 그이 안에 소망을 두리라"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고, 다윗의 뿌리에서 나온 한 싹이란, '그리스도'를 뜻하는 말이다. 이 그리스도가 모든 민족이 바라보아야 깃발이다. '그 날'에 이 깃발이 세워지고, 모든 민족이 그에게 돌아온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깃발로 설 것이요"가 가 아닌 새로운 표현을 사용한다. "일어나는 이".
'일어나다'는 초대교회에서 '부활'을 뜻하는 동사다. 죽음으부터 일어나는 한 사람이 이사야가 말한 '깃발'이었다. 바울은 확신하고 있다. 만민을 위한 깃발의 일어섬은 곧 예수의 일어섬이다. 따라서 구약이 고대하고 있는 '그 날'은 곧 '부활한 예수의 날'이다. 민족이 그이 안에 소망을 두리라. 죽음을 뚫고 일어났으니, 모든 소망이 그에게 있음이라.
[3]
소망이다. 모든 민족이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소망. 죽음을 이기고 어그러짐을 곧게 하여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소망.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이러한 삶으로 부르신다. 이 소망이 공동체라는 몸적 차원으로 세상에 구현된다. 하나님과 굳건한 신뢰관계 안에서 기쁨과 평화가 흘러넘친다. 예수 안에 이 소망이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 이르러 바울은 '숨'을 언급한다. 거룩한 숨. 성령. 그 성령은 하나님이 숨결이라, 만물을 창조하는 힘이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당신의 말과 숨결로 창조하셨다. 그 창조의 숨결을 다시 받는다. 믿음으로 받는다. 받은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흘러넘친다. 공동체를 채우고 넘친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기쁨'과 '평화'는 그저 공동체 안에 문제가 없는 수준이 아니다. 곧 숨의 흘러넘침이다. 창조의 숨이 흘러넘치기에 새로이 창조가 벌어진다. 없던 것이 우리 속에 생겨나고, 할 수 없던 삶을 우리가 살게되며, 종국에는 우리의 몸 마저도 이전에 없는 새로운 몸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숨결을 통해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해진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숨으로부터 끊어짐이다. 새로운 숨줄과 연결되니 죽더라도 죽지 않는다. 죽음은 이 숨줄을 끊을 수 없다. 이 숨줄을 모든 민족에게 주신다는 말이다. 그 깃발 바라보는 모든 민족에게, 죽음을 이길 수 있게 해주신다는 말이다. 모든 삶의 순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