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먼저 "할 수 있는 이들"이 "할 수 없는 이들"의 굳건히 서지 못한 면들을 짊어지라 말한다. 뭣을 할 수 있는 이들인가?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이들이다. 상황이 어려운 중에 평화의 일들을 행하고, 서로를 위해 관계의 집을 짓는 일이다. 이 일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믿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미래를 내다봐야만 힘을 낼 수 있는 일이다. 공동체 안에는 믿어서 할 수 있는 이들이 있고, 아직 바다 위에서 발을 딛을까 말까 망설이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못걷고 망설인다고해서 그들을 '못난이'로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짐마저도 짊어지고 바다 위를 걷는다. 진짜 믿는 사람들이다. 믿음은 곧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이들은 그렇게 산다. 그 분이 '났지만 사람 구실 못하는 나'를 위해서 목숨 버려 진실을 드러내셨으므로, 자신이 그 분에게 빚이 있음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 빚을 갚고자, 아직 연약한 이들을 위해 나 역시 그들의 짐을 대신 짊어주는 일을 기꺼이 한다. 믿는 사람이다.
게다가 짊어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을 기쁘게 해준다. 그럼 어떻게 기쁘게 해주느냐? 그들의 속알이 하나님의 뜻과 들어맞게 해주므로 기쁘게 한다. 어제 보았던 '에우.아레스토스'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한다. 이 단어는 '무언가에 마음이 딱 들어맞아서 생기는 기쁨'이다. 어제 본문에는 '아레스토스' 앞에 '에우'가 있었으나, 오늘 본문에는 '에우'대신 '에이스 토 아가톤'이 왔다. 이 말이 그 말이다. '아가톤'은 '선(善)'이다. 곧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럼 의미는 이렇게 된다. "동료가 하나님과 뜻이 들어맞아 기뻐하도록 도웁시다" 믿음은 곧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이들은 그렇게 산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 하루 전날 밤에, 그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던 것을 생각해보라. 그는 자기 고집을 관철함으로 기뻐하지 않으셨고, 자신을 '아니라'하고 하나님께 '예'함으로 기뻐하셨다. 따라서 그 분을 따르는 사람 역시, 하나님의 뜻과 맞아 떨어짐으로 기쁘고,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주는 기쁨 역시, 진리로 얻게 되는 기쁨이지, 다른 기쁨이 아니다.
2.
그리고 바울은 시편 69편 9절을 인용한다.
시 69:9, 개역한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일단 집 얘기가 나온다.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하는 집이 어제 보았던 바로 그 집이다. '서로를 위해 짓는 관계의 집'이다. 이 집은 시멘트를 발라만드는 건축물이 아니다. 하나님과 만나고, 이웃을 만나는 공간이다. 나 아닌 다른 대상에게 마음을 쏟는 공간다. 따라서 '몸'이다. 이 몸을 매개로 관계가 이루어진다. 성경은 이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 표현했다.
그럼에도 성전은 성경을 보는 사람들에 의해 줄곧 오해되었다. 나 아닌 다른 대상에게 마음을 쏟는 자리에서, 이방인과 병자와 세리와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내쫓김을 당했다. 성전이 오죽했으면 어느 병자는 본래 성전에서 받아야 할 죄용서를 지붕뚫린 집에서 받았을까. 건물 따위를 중심으로 관계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다른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의 생존에만 마음을 쏟는 사람들이 그 건물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성전'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들어 맞는 구석이 없어서, 기쁘지도 않고, 기쁘다 해도 그건 가짜 기쁨이다.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시편 69편 9절은 포로기 상황의 진술이다. 즉 "당신을 비난 하는 자들"의 "당신"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들은 다름 아닌 '이방 제국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하던 민족이 다른 민족의 무력에 짓밟혀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이스라엘에 대한 조롱이 터져나온다. 이것이 바울이 보고 있는 공동체의 현실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바울은 절망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큰 일 났고, 위기니까, 망하게 않게..." 이런 소리 하지 않는다. '기쁨'을 이야기한다. 충격적이지 않은가? 이 와중에 기쁨이라니! 이 말은 이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 발견한 뜻에 내 맘이 딱 들어맞는다는 말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포로 생활의 처참함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옛 글에도 쓰여있고, 바울이 현실에서도 발견한 바로 그 기쁨은 무엇인가?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킬 수 있는 그 생각과 믿음 그리고 폭발적인 실천. 이 실천으로 변화되는 세상. 마침내 이 땅에 완성되는 새로운 창조. 예레미야가 말했고, 이사야가 말했던 그대로지.
"견딤"이라 풀어놓은 단어는 '휘포모네'다. 무언가 위에서 누르고 있고, 그 아래서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견딤', '버팀'.
"속삭임"이라 풀어놓은 단어는 '파라.클레시스'다. '파라'는 '곁에서'이고, '클레시스'는 'call'이다. 옆에서 이름 불러주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뜻이 여러개가 파생되었는데, '애원', '간청', '충고', '위로', '위안', '소집', '훈계', '권고' 이런 의미들이다. 결국 옆에서 무언가 말해준다는 뜻이니까, 친밀한 의미를 보태서 '속삭임'이라 하면 어떨까해서 고쳐봤다. 무리한 번역일수도 있다. 하여간,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숨을 주어 숨쉬게 하시고, 옆에서 속삭이시어 진리를 말해주시는 그러한 분이시다. 그 분은 속에 울리시는 말숨이시어, 그 말숨의지하여 고난 중에도 한 길을 걸음이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기록이든 상관없다. 무엇이든지 미리 기록된 것 안에서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과, 속삭이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게 어떤 텍스트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글자를 넘어 인격을 만날 수 있다면, 글자를 가릴 이유가 있겠나. 다 그 글자가 그 글자다. 성전 종사자들이여, 그렇지 않나?
3.
이 말을 잘 들어보라.
"견디게 하시고, 곁에서 속삭이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서로서로의 관계 속에서, 같은 마음 품게 하셨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혼자서 못한다. 관계 속에서만 사랑있다. 그래서 사랑은 혼자서 못하지만, 혼자있을 때도 사랑할 수 있다. 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든 어디든바로 그 관계 안에 있다.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You are not alone! 증거가 무엇이냐? 그 관계로부터 얻는 말과 숨이다! 그렇다면, 내가 말과 숨을 분명히 받고 있다면 그것을 주시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럼 나에게 그 말과 숨을 공급하시어 사랑하게 하시는 이는 누구이신가? 그 분을 찾아야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입에서 말과 숨이 오늘 나에게. 그래서 바울이 "주셨기를" 이라 말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너희 말숨 받았느냐?"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숨 주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숨내쉼"이라 풀어놓은 단어는 본래 콧김이다. 단어는 '에피뛰모스'인데, '뛰오'에서 온 말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는 것이다. 여기서 '열정', '욕정', '열심', '사랑'이런 말들이 파생되었다.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성령으로 힘냄'이다. 원어를 들여다 본다는 것은 '단어 속에 들어있는 숨찾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단어 곳곳에 '숨'이 있다. 성령의 흔적이다. 그런데 글에는 흔적이 남았을 뿐이지만, 우리네 삶속에는 그 실체가 우리를 온통 둘러싸고 계시다. 그러니 마음을 열어 들이마시기만해! 성령을 들이키고, 우리의 입으로 말과 숨을 내쉬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드러내는 한삶을 함께 살아, 사랑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당신과 함께 기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