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란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생각은 순우리말이다. 무슨 의미일까? 사전에서는 '머리를 써서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어떤 사람이나 일 따위에 대한 기억'이라 되어 있다. 내 생각에 생각은, '생의 끄트머리에 서는 것'이다. 생의 끄트머리에서 무엇하나?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일전에 사탄의 시험을 '허튼생각'이라 푼 적이 있다. 곧 육지 위에서 하는, 삶과 죽음과 무관한 생각이다. 이상보다 귀히 여기는 먹고 사는 문제, 명예를 얻어 권력자들에게 인정받는 문제, 폭력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문제. 모두 허튼 생각이다. 끄트머리 아닌 안전한 곳을 비집고 들어가자함이지, 생의 끄트머리에 서고자함이 아니다.
그럼 생의 끄트머리에서 무엇을 하는가? 죽음의 바다를 내다본다. 그리고 건널 것을 생각한다. 바다를 밟고서. 삶과 죽음의 양자택일 속에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제3의 길을 생각한다. 참 생각이다.
그럼 생각만하면 되느냐? 아니다. 끄트머리에서 바다로 발을 내딛어야지, 그럼 '믿음'이다. 생각만 하고 있으면 바다 건너편으로 갈 수 없다. 바다를 밟고서 건널 수 있음을 믿고서 한 발 한 발 내딛어봐야 믿음이다. 무슨 말이냐? 다른게 믿음이 아니라, 도통 될 수 없고, 불가능해보이는 일 속에서 한 발 한 발 내딛는게 믿음이란 말이다. 한센병자가, 이방인이, 여자가, 세리가 사회적 냉대를 무릅쓰고, 자신들을 사람 취급도 안해주는 유대인들 틈바구니를 뚫고서 예수께 나아오는 바로 그 걸음이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지 않는가? 삶과 죽음을 생각하다가, 이제 믿음으로 나선 것이다. 거기에 구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을 잘 보라. "서로를 죄 있다 생각" 하는건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다른 이를 생의 끄트머리로 내모는 것이다. 곧 죽으라 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내가 서지 않고, 네가 서라 하는 생각이다. 생의 끄트머리에 서는 건 누가 등떠밀어서 할 수 있는 거 아니다. 누가 강제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폭력이요, 강요다. 스스로 해야 한다. 스스로 생의 끄트머리에 서서 믿음으로 나서야 한다. 이것을 누가 대신 해줘? "쟤 끄트머리 서지도 않고, 바다도 안건너요" 이러지 말라는 것이다. 도리어 본인을 돌아봐야 한다. 내가 내 생존을 추구하느라, 하나님 가족들 앞에 슬퍼할만한 일이나, 죄 짓게 할만한 일을 두고 있는지 아닌지를 '삶과 죽음의 문제'로 여기고 철저하게 본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스스로 생의 끄트머리에 서서.
이러한 생각하는 그 자리가 그 사람에게는 곧 "땅 끝"이 된다. 생각 끝에 내가 선 땅 끝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느냐, 그렇지 않고 육지에 남느냐의 선택이 남는다. 이 선택이 곧 양의 문이다. 이 땅 끝은 곧 이집트에 있는 우리집 문설주다. 여기에 피 바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못박고서 새 시대로 진입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주저 앉을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가 집떠나서 걷기 시작하면 믿음이다. 구원얻음이다.
[2]
'생각'이 '믿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생각이 꼬여서 믿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바울은 바른 생각을 전한다.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중에 부정한 것이 있을리가 있나. 그 분의 창조세계에는 그 분의 하나님다움이 녹아있다. 다른 수식어구가 필요없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절대선이시다.
그런데 정결하지 못한 음식을 먹을까봐 전전긍긍하는 공동체의 식구가 있다. 사람아, 이 사람이 왜 전전긍긍하도록 가만 두었는가? 바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어, 이전에 살던 관성 때문에 하지 못하는 그 불문율들을 깨뜨리도록 도와주어야지.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먹는 문제에 대한 그 걱정을 덜어주어야지! 핵심은 '먹느냐 먹지 않느냐'가 아니다. 타인의 '걱정을 덜어주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걱정을 덜어주기는 커녕, '넌 아직 덜 되었다'고 속으로 판단하고 얕잡아보지 말라는 말이다. 바울은 말한다.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거늘, 먹는 것 때문에 당신의 형제를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왜 망하냐? 걱정하다 망한다. 타인의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 사랑이지, 달리 사랑이 아니다. 남의 걱정 덜어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이것이 우리가 사는 삶이 목적이 된다. 남의 걱정 덜어주기 위해 살자.
남의 걱정 덜어주지 않는 공동체일때, 이 공동체는 욕을 먹는다. 하나님 닮음도 아닌데, 하나님 닮았다고 우기고 있다고 씨알이 못알아볼리 없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먹느냐 안먹느냐, 마시냐 안마시느냐의 규정에 있지 않다. 이러한 규정들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세상을 바꿔보려는 노력들이 그간 얼마나 많았던가? 규정이라 부르던 글자라 부르던 매양마찬가지다. 이데올로기 논쟁이 될 뿐이고, 결국 그 규정과 글자에 속하지 않은 이들을 매도하고 죽여놓지 않았나? 죽여놓고도 문제 해결을 할 수 없으니 정말 노답이다. 규정과 글자가 아니다. 그럼 무엇이냐? 규정을 넘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루는 그것이 무어냐?
하나님의 숨결이다. 곧 숨님, 성령이시다. 그 성령은 규정을 넘어서 진심과 실제로 남을 사랑하게 하신다. 나 아닌 개체와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그 숨줄을 통해서다. 그 숨줄이 곧 생명줄이다. 그렇게 타인을 사랑할 때 이뤄지는 것이 정의요, 평화요, 기쁨이다. "당신, 성령 받았는가?" 이 말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가?" 이 말에 다름 아니다. 나 아닌 다른 대상에게 공감하고 마음을 쏟고 있는가?
"그 숨결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 숨결이 있어야 내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었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다. 그리스도는 말이 아니시다. 인격이시다. 글자가 아니시다. 사람이시다. 소위 '텍스트 중심주의'를 주장하며 마치 객관적이고 타당한 해석이 문제 해결의 핵심인 것처럼 말하는 안타까운 이들에게 본문은 텍스트가 아니라 한 인격을 가리키고 있다. 그 인격은 숨결로 느끼는 인격이라, 텍스트 바깥에도 계시다. 따라서 텍스트는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며, 중심은 곧 산 자와 죽은 자의 소망이 되시는 그 분이시다. 하나님의 숨결 안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받든다. 텍스트 중심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게 아니라 말이다.
숨결로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람들은 하나님과 뜻이 딱 들어 맞는다. 안맞을리 없지. 하나님과 뜻 맞으니 기쁨이 샘솟는다. "하나님과 뜻 맞아서 기쁘고" 라는 말은 '에우.아레스토스'다. '에우'는 "잘, 좋은"이라는 의미인데, 곧 '하나님 닮음'이다. 아레스토스는 "속알"이다. 그래서 '에우.아레스토스'는 나의 속알이 하나님 닮았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기쁘다.
하나님과 뜻이 맞아 기쁜데, 거기다가 사람들의 칭찬도 받는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욕먹을리 있겠는가? 간혹 "진리를 추구하는 길은 욕먹을 수 밖에 없어"라고 말하며, 욕먹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없음에 대한 핑계에 지나지 않아. 예수는 욕먹은 것 이상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공생애 기간 내내 머리 둘 곳도 없이 사람들의 걱정을 덜어주었던 그 였기에, 사회적 약자들은 그를 무척이나 만나고 싶어했다. 거지가 소리치고, 세리가 나무 위에 올라가며, 여자가 그 옷자락을 붙들 정도였다. 오늘 우리가 사람들의 칭찬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추호도, 우리가 진리를 추구해서가 아니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그러니 우리, 평화의 일들과 서로를 위해 집짓는 일들에 힘을 내자" 한다. 평화의 일은 곧 싸움없게 하는 일이다. 억울한 일 없게 하는 일이다. 속으로는 화평이요, 밖으로는 평화다. "집짓는 일"은 건축사업 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 집은 서로를 위해 짓는 집이다. 타인이 들어가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드는 관계의 집이다. 이 일에 힘을 내자.
이 일을 가로 막는 것은 사람과 사람을 판단하게 하고, 차별하게 하는 잘못된 생각들이다. 잘못된 생각들로 인해, 아무도 죄책감을 갖지 못하도록 하자. 글자를 지키려다가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일 하지 말자. 사람 있고 글자있지, 글자 있고 사람있지 않다. 진리를 한 점 흐트러지지 않게 담아낼 수 있는 글자가 세상에 어디있나? 글자가 인격의 그릇이 아니라, 사람이 인격의 그릇이다. 글자가 아니라 그 각각의 인격이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다. 그러니 "이 글자로만", "이 해석으로만", "저 글은 안되고", "저 해석은 의미없고" 이런 식의 독단은 부질없다. 말 때문에 숨 끊어지는 일 생겨선 아니된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자신을 향해 옳다고 믿는 바가 각자 있을텐데, 그것을 지켜나가야 한다. 글자에 써있어서 지킴이 아니요, 내가 착한 사람이라 그런 것도 아니라,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의 신뢰 때문이다. 이게 진짜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신다. 아무리 작은 것이든, 성경에 안쓰여있는 것이든 상관없다. 그 분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정하고 지켜나가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분의 신뢰를 쌓는 그에게 복이 있다.
반면 글자에 매이는 사람은 그 글자에 매인 죄를 문책받게 될 것이다. 사람은 글자의 지배를 당해선 안된다. 글자를 가지고 놀아야지, 글자에 묶어서 행동이 제약을 받으면 그게 글자라는 목줄에 묶인 것과 다름없다. 하나님과의 신뢰가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경전들의 모든 문구들을 넘어서는 인격을 갖게 된다. 하나님과의 신뢰 안에서 그냥 행한 것인데, 그것이 경전과 맞아 떨어지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 경지가 바로 '믿음'의 경지다. 끄트머리에 서서 바다를 내다보다가, 마침내 바다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바다에 붙잡을 것이 무엇있나? 내 발 밑에는 반석이신 그리스도 계시고, 저 수평선 너머에는 부활의 영광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숨결 따라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지. 생각만해선 걸을 수 없고, 해봐야지. 그래서 우린 모두 베드로와 같다. 죽음 위를 걸어 걸어, '믿음이 부족한 자'라는 소리 듣지 말고, 또 걸어 걸어. 하나님 만나기 위해 땅 끝을 박차고 바다 밟고서, 저 건너편으로 가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 끝에 믿자"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관계 속 신뢰요, 성령으로 숨쉼이요, 믿고 숨쉬며 걷는 삶이다. 여기서 나지 않은 것은 죄다 삐뚤어짐이다. 바다를 건널 수 없으니 육지에 선 긋고 내 땅이라 우기며 여럿으로 쪼개져 싸운다. 그래서 삐뚤어짐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생각만으로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고, 믿지 않고서 할 수 있는 것도 하나 없구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객관적인 검토를 통해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어디있을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다 예측이고, 넘겨 짚음이고, 섭정티브고, 가정법이지. 그럼 당신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나는 소개하는 중이다. 죽음의 바다보다 깊은 인격, 바다 건너편에서 불어오는 숨결. 사랑하게 하는 그 힘!
이것 믿고 내딛으면 아버지께 닿을 수 있단다. 나도 아직 잘 모른다. 그러니 우리 함께 이것을 믿고 살아 확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