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1~23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전통. 이 전통이라는 단어를 잘 들여다봅시다. 모든 사회에는 그 사회의 전통이 있습니다. 전통이 무엇입니까? 사회 안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사회가 유지하고 계승하는 것이 곧 전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 사회 역시, 어떠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손 씻고 음식 먹는 전통이었습니다. 이밖에도 기타등등, 그릇도 씻고, 사람 많은 곳에 다녀오면 물도 뿌리고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위생과 청결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깨끗한 것을 강조하는 유대사회는, 이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것들을 지켜왔습니다. 전통입니다. 그리고 이 전통을 기준 삼아, 인간은 생각합니다. 전통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는 어떤 전통을 가지고 살고 있을까요? 이 나라는 예전에 이런 전통이 있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윤씨 집안에 처음 시집왔을 때, 이 윤 씨 집안이 가지고 있던 전통에 대한 얘기인데요. 그것은 갓 결혼한 신랑과 신부가 제사상에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람직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윤씨일가는 이 전통위에서 옳고 그른 것을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윤씨 집안 안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후대에도 이 바람직한 것들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죠. 즉, 이것이 윤씨 집안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갓 시집온 새댁이, 제사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거에요. 그 때 윤 씨 집안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할머니는 웬 예수쟁이가 집안에 굴러 들어왔냐며 소리를 질렀고, 고모들은 우리 엄마와 만나자마자, 결혼 첫 날부터, 앙숙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가운데서 안절부절 못했고, 저는 아직 이 지구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니까, 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죠.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제자들은 손을 안 씻고 떡을 먹었습니다. '아, 뭐 손 안 씻고 먹을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들의 전통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전통은 그 사회를 이루는 근간입니다. 전통 없이는 그 사회도 없습니다. 그 전통을 깨뜨리는 것은, 그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 엄마가 윤 씨 집안에 시집 왔을 때, 아마도 우리 돌아가신 할머니는 '뭐, 제사상에 절 안 할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윤 씨 집안의 붕괴의 징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전통은 그러한 것입니다. 유대 사회의 기둥이었던, 그 전통을 어긴 제자들은 곧 위기에 빠졌습니다. 자신들의 전통을 무너뜨리려는 예수와 제자들을 그 전통의 사람들은 가만둘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나, 저희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이와 비슷한 일을 우리도 매일 겪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전통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죠. 그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어떠한 전통을 가지고 있을까요?
지난 300년간 과학은 가열차게 발전해왔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전화기를 들고 다닌다는 것을, 저는 중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씨티폰이라는 게 처음 나왔는데, 공중전화 근방 100미터 안에서만 통화할 수 있는 이동식 전화기였습니다. 학교에 어떤 친구가 이것을 가져오더니, 창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괴롭게 통화하면서도 자랑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런데 제가 고등학생이 되니까, 아이들이 하나 둘 다 핸드폰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고3때 스카이에서 최초 칼라 액정 핸드폰을 내놓았고, 군대를 다녀오니, 흑백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졌습니다. 이 충격적인 과학의 발전,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달라지고 있고, 우리는 이 과학 발전의 역사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전통 위에서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합니다. 무엇으로 판단합니까? 과학적으로 판단합니다. 과학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 됩니다. 그럴 수 없는 것은 '그저 신념'이 됩니다. 이 '사실'과 '신념'이라는 말이 얼마나 왜곡되어 쓰이는지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합시다. 하여간, 우리는 이 과학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기둥입니다. 만약 이 과학을 무너뜨리는 것을 말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금기시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만이 진리다!" 이런 얘기 하면, 과학 전통 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자기들의 전통과 맞지 않기 때문이죠. 무식한 소리로 듣는 것입니다. 그럼 정말 “성경만이 진리”라는 진술이 밑도 끝도 없는 신념이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된 전통 위에 서면, 모든 것이 잘못 보이기 마련입니다.
학생들에게도 전통이 있습니다. 어떤 전통 위에 오늘날의 학생들은 살고 있습니까? 이 사회는 높은 교육열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이 교육열입니다. 이거 왜 생긴걸까요? 저번 주에 얘기했던 것과 같이, 먹고 살기 힘들어서 생긴 것입니다. 자원도 없는 나라 인재라도 잘 길러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공부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내 아들, 딸, 잘 먹고 잘 살고 편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 육체노동이나 기술직 보다는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옛 세대의 생각들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경제발전시기에는, 대학생만 되면 기업들에서 서로 모셔가려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인생의 선배들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기업들이 아예 버스를 대절해서 학교로 찾아온다더군요. 그래서 그 차 타고 회사 견학하고, 입사 지원서 종이 한 장 쓰면 다음 날 취업이 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생이 미래가 보장된 든든한 신분으로 여겨질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다 옛날 얘기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이런 저런 것들이 짬뽕되어서, 오늘 학생들은 교육 절대주의의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전통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서 있는 사회의 전통, 그 토대가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배에 타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배에 타고 있는데, 그 배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같이 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불안해하겠죠? 그런 소리 말라하겠죠? 그래서 언제나 자기가 서 있는 토대를 비판하는 일은 금기시 됩니다. 그래서 유교 집안 며느리는 자기 집의 제사 문화를 비판할 수 없고, 학생은 교육 절대주의를 비판할 수 없으며,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과학 아닌 성경을 붙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번 주에 이 전통에 반기를 든 학생, 아니 크리스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예수를 믿은지 얼마 안 되는 아이였습니다. 얼마나 갓 예수 믿은 아이냐 하면, 설교를 연설이라 부를만큼, 이 아이는 교회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교회 수련회를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고3입니다. 집에서 난리가 났고,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엄마는 말합니다. "넌 고3이야!", 학교에서도 말합니다. "너 공부 해야 돼!" 저도 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 놈이 집에다가 한 통, 학교에다가 한 통, 편지를 써놓고, 수련회 전날 교회 집사님 댁에서 잤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난리가 났습니다. 이 엄마는 저한테 전화 걸어서 막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결국, 이 아이를 끌고 오려고, 그 집사님댁으로 새벽에 처들어 갔습니다. 한참을 실갱이하다가 아이는 먼저 나가버렸습니다. 엄마는 교회로 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교회로 찾아가 문을 두드립니다. 집에서 재회한 모자가 대화합니다. "왜 수련회 가면 안되요?" 엄마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넌 고3이잖아!", 아이가 반문 합니다. "고3인데 왜 수련회 가면 안되요?" 엄마가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엄마도 이유가 없거든요. 아이들은 왜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부모는 왜 공부에 열을 올려야 하는지 모르죠. 이것은 그저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의 왜곡된 표출입니다. 아이는 자신의 확고한 마음을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그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수련회를 그날 홀로 떠났습니다. 수련회 가는 도중 엄마한테 계속 문자가 옵니다. "이번은 가, 그런데 다시는 교회 가지 마라" 수련회 가 있는 아이에게 또 다른 전화가 걸려옵니다. 학교에요. 선생님은, 아이에게 어디냐고 묻습니다. 수련회라고 문자도 보내고 편지도 썼다 하니까, 선생님 대답이 가관입니다. "그게 너 였냐? 어쨋든 너 갔다오면 좀 맞자. 뚝"
여러분, 뭘 느끼십니까? 왜 일까요? 아이가 수련회가는 일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기에, 부모은 필사적으로 말리려고 하고, 선생님은 노골적인 협박을 할까요? 이것이 이 사회의 전통입니다. 공부를 안하고 수련회를 가는 아이는, 이 사회의 근간인 교육 절대주의의 전통에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이 교육 절대주의의 토대위에 세워진 가정과 학교는 당연히 이 아이를 막으려고 합니다. 이런 아이가 많아지면, 이 시스템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쨋든 그 아이는 수련회에 참가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오니,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주루룩 흐르고, 집회만 시작하면, 앞 자리로 나가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 아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온 줄 알고 있는 몇몇 아이도, 이 아이를 따라서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수련회가 끝나는 날, 이 교회 집사님께 전화가 왔어요. 자초지종을 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진실로 예배했다는 소식, 그 교회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 얘기했습니다. 오늘날 박해가 없다고 하지만 박해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을 온전히 선택하려면, 그것은 충격적인 반작용을 불러온다고. 우리가 박해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우리가 그동안 박해를 피해왔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저께 이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사이에, 그 아이가 자랐더라고요. 어려움을 겪고 선택해본 아이 티가 나더라고요. 물론 아직도 '설교'를 '연설'이라 말하긴 했지만.
그리고 집에 와서 이런 저런 책들을 펴놓고, 말씀을 봤습니다. 바울은 열심 내어 전도하는 것보다 먼저, 타협하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전도가 되거든요. 세상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자신들의 보이지 않는 소망을, 보이게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도보다 타협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한 베드로는, 정금과 같은 믿음을 말했습니다.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순물이 제거되는 고난을 통해서 정금이 되어가는 광야 백성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전통의 토대 위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과감히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전통은 풍랑 위의 배 입니다. 금방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을 배 입니다. 마치 암초에 부딪친 타이타닉과 같습니다. 저는 지금 경고방송 중입니다. 빨리 그 배에서 내려와 예수를 붙들라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그 분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막으려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 세력들은 우리가 이 배 위에서 예수를 부르는 것은 상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배에서 내리지는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리세요. 우리가 예수를 붙잡고, 그 분은 예배하는 일에 타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통에 젖은 우리가 가끔 착각할지라도, 저는 이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학생이기 이전에, 크리스챤입니다. 학교가 여러분을 부르기 이전에, 하나님이 만세 전에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 어떤 이 사회의 전통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러분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설령 누군가 막는다 하여도, 우리가 믿고 전진할 때, 우리가 고난을 감내해낼때,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의 갈 길을 갈 때, 우리는 자라납니다.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피어나는 꽃입니다. 점점 순도를 높여가는 금입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이 구절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외식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 하나님 섬기는 척 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외식하는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으로는 먼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세상 전통 속에 굳건히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여러분들을 정죄하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빨리 그 배에서 내리라는 권면입니다. 세상 전통이 여러분에게 그간 무엇을 가져다 주었습니까? 마음의 평안을 주었습니까? 참된 안식을 주었습니까? 진리를 향한 달려갈 길을 주었습니까? 그 전통에서 내리면,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위해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공부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창조세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언제 나빠집니까? 하나님보다 귀해질 때 나빠집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도사님, 보충인데요? 수업인데요? 과외인데요? 야자인데요? 이런 말 참 많이 들었는데요. 여러분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물로 가라앉을 성공의 바벨탑입니까? 물 위의 예수입니까? 물 위의 예수를 붙잡은 사람은, 삶의 역전이 있습니다. 창조주의 형상을 반영하는 예배와, 그의 말씀을 경청하는 말씀과, 그에게 자신을 고백하는 기도. 그리고 그의 뜻을 함께 실현하는 공동체. 그리고 공부가 있습니다. 이거 너무 당연한 건데, 내가 말하기가 미안할정도로, 우리의 삶은 이와 정 반대로 움직이고 있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창조의 정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진 이유입니다. 이것 망각하고 하는 공부 똥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멈추라 말했을 때 두려워하는 것? 똥입니다. 생기부가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집니까? 하나님께 예배 하려다가, 생기부에 적힌 부정적인 표현 하나를 뒤집지 못하실 만큼 하나님은 약하지 않으십니다. 생명을 걸었던 우리의 선배들이 전해준 그 ‘타협하지 않음’이 우리 안에 없다면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그들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무어라 하겠습니까? 아직도 그 배설물같은 전통을 붙잡고 버티시겠습니까?
유대인들의 전통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안쓰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고르반이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대인들의 말도 안되는 전통을 꼬집으십니다. 하나님께 바치면 부모에게는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통을 핑계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딴 것도 전통이라고 열심히 지킵니다.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여, 이따위 일을 많이 하고 있구나!" 예수는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한 전통이 있습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다른 것들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어느날 고3이라는 특별 신분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 값으로 세운 공동체, 그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는 것, 말씀 보는 것, 함께 우리가 누구인지 발견하는 것, 그 공동체가 독립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이것은 너무도 소중한 것인데, 이 소중한 것을 파먹는 것이 생겼습니다. 길을 지나가다가 학원 현수막을 봅니다. “어머니, 중3이면 이미 늦었습니다!” 뭐가요, 도대체 뭐가요! 무엇입니까? 이 사회의 전통입니다. 학벌 중심의 100년도 안된 전통이 우리의 신앙을 갉아먹습니다. 세상의 전통이 하나님 말씀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따위 일을 참 많이 하고 있습니다.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께서 전통에 매인 사람들을 모두 불러 말씀하십니다. 듣고 깨달으라 말씀하십니다. 전통에 매인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부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나는 전통 위에 굳건하게 서 있으니까, 괜찮아”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마치 '나는 정결법을 지키고 있으니까 좋은 유대인이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통에 서 있는 것은 굳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위태로운 것입니다. 책상에 앉아 하나님 예배할 줄 모르는 아이들의 위태함을 왜 모르십니까? 삶의 목적, 이유, 세상의 의미, 창조주 모르는 그 위태함은 옆에서 보기에도 아슬아슬할 정도입니다. 그런 애들이 승승장구 하는 것은 눈뜨고는 못볼정도로 비참합니다. 점점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멀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헛된 전통에 기대 있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이 썩어서 문드러져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예배하는 것보다 학교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 편안한 마음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편하십니까? 이 학벌중심주의, 교육절대주의의 전통 위에서 안락함을 느끼십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을걸요? 불안하잖아요? 미래가 걱정되잖아요? 나도 4수해봐서 알아요. 그 때 하나님에 나에게 인도하신 선택은, 그 배에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공부를 버리고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전통 아니라,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쁨이 있어요. 타협하지 말고 예배하세요. 타협하지 말고 찬양과 기도의 자리를 찾아가세요. 자유롭게 예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세요. 진실하게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 우리가 두 발 딛고 있는 이 썩을 이 사회의 전통에서 벗어나려 할 때 비로소 이뤄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전통에 얽매이지 말고, 한 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때 이뤄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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