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어떻게 될까요? 얘 걸릴까요? 안 걸릴까요? 얘는 100% 걸립니다. 만약에 얘가 안 걸리고 승승장구하면, 시청자 게시판에 난리 납니다. 사람들 이 드라마 안 봅니다. 왜 일까요? 왜 사람들은 이 여자가 걸리길 바라는 것일까요? 왜 일까요? 왜 사람들은 이 여자의 악행이 드러나서, 제대로 된 판결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나중에 이 여자는 몰래 디자인을 훔친 것도 모자라서, 이제 뻔뻔함이라는 무기를 갖추게 됩니다.





  시청자는 이 장면을 보고 열을 받습니다. '아니, 디자인을 도용한 것도 모자라서, 오리발을 내밀어? 너 이제 걸릴거다.' 이것이 저의 집안의 반응이었는데, 다른 집의 반응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드라마를 볼 땐, 저런 사람이 걸릴 것이라 뻔히 알면서도, 현실 속에서 살 땐, 나의 저런 행동은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저 여자처럼, 현실에 있는 자기의 문제를 숨기는 뻔뻔함마저도 이미 탑재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뭔가 남들지 알면 안되는, 뭔가 캥기기 때문에 발각되면 안되는, 뻔뻔하게 감출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저런 드라마를 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티뷔가 없었기 때문에, 스크린이 아니라 글자를 통해서, 저런 드라마를 알고 있었습니다. 채널은 다니엘 7장.


다니엘 7:1,2

벨사살이 바빌론 왕이 된 첫 해에,

다니엘은 잠자리에서 꿈을 꾸면서,

머리 속으로 환상을 보고, 그 꿈을 적었다.

그가 적은 내용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다음은 다니엘이 한 말이다.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동서남북 사방에서, 하늘로부터 바람이 큰 바다에 불어 닥쳤다.


  A.D.1세기. 그러니까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모두 이 다니엘의 꿈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시청률을 가지고 그 드라마의 흥행을 따진다면, 이 다니엘의 꿈 이야기는 가히 시청률 100%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믿고 있던 얘기였습니다.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오늘 우리가 처음에 봤었던 그 드라마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1. 짐승들


다니엘 7:3~8

그러자 바다에서 모양이 서로 다르게 생긴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왔다.

첫째 짐승은 사자와 같이 보였으나, 독수리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살펴보고 있는 동안에, 그 날개들이 뽑혔다.

그 짐승은 몸을 일으키더니, 사람처럼 발을 땅에 디디고 섰는데,

사람의 마음까지 지니고 있었다.


  또 살펴보니, 다른 짐승 곧 둘째 짐승은 곰과 같았는데, 뒷발로 서 있었다.

그 짐승은 갈빗대 세 개를 물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일어나서 고기를 많이 먹어라.'


  그 뒤에 내가 또 살펴보고 있는데, 또 다른 짐승이 나왔다.

그것은 표범처럼 생겼으나, 등에는 새의 날개가 네 개나 있었고,

머리도 네 개나 달려 있었으며, 아주 권위가 있어 보였다.


  그 뒤에 내가 밤의 환상을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 넷째 짐승이 나왔다.

그것은 사납고 무섭게 생겼으며, 힘이 아주 세었다.

이 짐승은 쇠로 된 큰 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먹이를 잡아 먹고, 으스러뜨리며,

먹고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아 버렸다.

이 짐승은 앞에서 말한 짐승들과는 달리,

뿔을 열 개나 달고 있었다.


  내가 그 뿔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자니,

다른 작은 뿔 하나가 그 뿔들 사이에서 돋아났다.

먼저 나온 뿔 가운데서 셋이 새로 돋아난 그 뿔에 밀려서 뿌리째 뽑혔다.

새로 돋아난 뿔은 사람의 눈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입이 있어서 거만하게 떠들었다.


  여기에 네 마리 짐승들이 있습니다. 이 짐승들은 생긴 것 부터가 기괴합니다. 첫번째 괴물은 날개를 가지고 공중에 있다가, 날개를 뽑고, 네 발로 기는 형태로 이 땅을 디디고 섰습니다. 마치 트랜스포머 같이. 또한 사람이 아닌데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괴물입니다.


  또 다른 짐승이 나왔습니다. 이는 곰같은 짐승입니다. 뒷발로 서서는 갈비를 뜯고 있는데, 누군가 그 곰같은 괴물에게 말합니다. '고기를 많이 먹어라' (이 고기가 무엇일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셋째 짐승은 날개와 머리가 네 개씩 달린 표범이었습니다. 아주 권위가 있어보였다고 다니엘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짐승입니다. 이 짐승은 아주 사납고 무섭게 생겼으며, 힘이 아주 강했는데, 쇠로된 이빨을 가지고 모든 것을 으스러뜨리며, 먹고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아 으깨버렸습니다. 파괴의 짐승. 그리고 앞에서 말한 짐승 세 마리와 달리, 이 마지막 네 번째 짐승은 뿔을 열 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뿔들 사이에서 하나의 뿔에서 또 뿔이 나왔습니다. 원래 있던 뿔 가운데 셋이 밀려나 뿌리째 뽑혔습니다. 새로 돋아난 뿔은 입도 있습니다. 그 입으로 거만하게 떠듭니다.


  이 괴물들에 의해 이 땅은 짓밟히고 있습니다. 이 땅은 어떠한 땅이냐, 하나님이 선하게 지으신 땅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네 마리 괴물들이, 그리고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이 괴로움에 신음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뻔뻔하게도 짐승은 교만하게 떠들며, 자신들에게 나라와 영광과 권세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다니엘의 꿈에서 짐승들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까요? 궁금한 사람들은, 나중에 다니엘서 7장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이 천사로부터 들은 이 꿈의 해석이 그 뒤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만약 아까 드라마가 저 여자의 악행이 드러나지 않으면 결말이 나지 않듯이, 이 다니엘의 꿈 이야기도 절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악하고 뻔뻔한 네 마리 짐승들이 득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야기는 다음 내용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2. 옛적부터 계신 자


  바로 옛적부터 계신 자입니다. 옛적부터 계신 자가 등장합니다.


  드라마와 같습니다. 저 드라마에서 저기 숨어있는 저 친구가 저 여자의 악행과 뻔뻔함을 알리는데 무언가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니엘의 이야기에서는 그 네 마리 짐승들의 악행과 뻔뻔함을 심판할 존재가 결코 숨어 계시지 않습니다.


다니엘 7:9~11

내가 바라보니, 옥좌들이 놓이고, 한 옥좌에 옛적부터 계신 분이 앉으셨는데,

옷은 눈과 같이 희고, 머리카락은 양 털과 같이 깨끗하였다.

옥좌에서는 불꽃이 일고, 옥좌의 바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불길이 강물처럼 그에게서 흘러 나왔다.

수종 드는 사람이 수천이요, 모시고 서 있는 사람이 수만이었다.

심판이 시작되는데, 책들이 펴져 있었다.


  그 분은 흠이 없으신 분, 불꽃 같으신 분, 모든 사람의 높임 받기 합당하신 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이제 악하고 뻔뻔했던 짐승들에 대한,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아마도 짐승은 자신이 악행과 뻔뻔함이 심판을 받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교만하게 떠들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를 망가뜨리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서도 알고 있고, 야구 경기 9회말 2아웃에 만루 상황에서 바라는 그 갈망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오늘 다니엘의 이야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역사의 진실은, 악행과 뻔뻔함은 반드시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확인합시다.


다니엘 7:11~14

내가 보고 있는 동안에,

작은 뿔이 크게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살펴보니, 넷째 짐승이 살해되고, 

그 시체가 뭉그러져서, 타는 불에 던져졌다.

그리고 그 나머지 짐승들은 그들의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얼마 동안 연장되었다.


  짐승들,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뻔뻔했던 짐승들은, 옛적부터 계신 이의 심판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교만하게 떠들며 강했던 그 짐승은 살해되고, 그 시체가 뭉그러져서 타는 불에 던져졌습니다 나머지 짐승들은 권세를 빼앗기고, 목숨만 간신히 붙어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이 짐승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 짐승들의 정체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이 분분했습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로마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이는 세계대전과 공산주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 이 짐승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짐승의 정체는 악입니다. 악 그 자체입니다. 즉, 이 이야기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에, 이 땅에 있는 모든 악이 심판받는다 는 것입니다.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악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상해볼 수 있겠습니까? 악이 사라진 세계. 우리는 경험해보지 않아서 믿기 어려울지라도, 옛적부터 계신 자는, 아무도 보지 못했던 이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을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옳지 않은 것을 붙잡고 있으니, 그건 고집이 맞아요. 이 자리에 아직도 사랑과 정의의 예수를 붙들지 않은 사람있습니까? 아직도 예수 아닌 것들을 고집하는 사람있습니까? 허나 악을 고집하는 것은 없어질 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끊어질 동아줄을 잡는 호랑이와 같습니다.


  악은 망하고, 정의가 승리합니다. 그 분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언가를 속이고, 무언가를 감추고, 무언가 캥기는 행동을 계속할 때, 이것은 없어질 무언가를 의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5:10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자가 선악간에 그몸으로 행한 일에 따라 보응을 받을 것이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이 구절.사람들은 흔히 예수 믿으면 나는 천국 가니까, 이제 대충 살아도, 기도하고 회개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철처한 착각입니다. 구원파라는 이단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 우리의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질 그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9~32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해 준 언약의 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모욕한 사람은, 얼마나 더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하겠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원수를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


하고 말씀하시고, 또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신 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징벌하시는 손에 떨어지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빛을 받은 뒤에, 고난의 싸움을 많이 견디어 낸 그 처음 시절을 되새기십시오.


  이러한 구절은 한 두 구절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해 준 언약의 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모욕한 사람은, 얼마나 더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하겠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악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사람이 어떠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다시 죄를 짓는 삶으로 돌아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도 힘이 빠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은혜의 성령이 없다 생각하여,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 할 때, 그것은 악과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악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인격도 점점 없음의 블랙홀 속에서 왜곡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다니엘의 꿈 이야기는, 이 악의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3. 인자


다니엘 7:13,14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옛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악은 심판 받고 가지고 있던 모든 나라와 권세를 빼앗깁니다. 나라는 다스림입니다. 악은 폭력적인 다스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권세는 힘입니다. 악은 폭력으로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악은 자신의 폭력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소멸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다스림, 새로운 권세, 그리고 영광이 등장합니다. 그 다스림은 섬김의 다스림이요, 그 권세는 창조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이요, 그 영광이 마침내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원래 '억측'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억측이란 뜻이, 나중에 예수님 이후에, '드러남'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쓰는 '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왜 억측에서 드러남으로 뜻이 달라졌을까요?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짐승같이 폭력적인 현실 앞에, 선이 이길 것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여겨지지 않을 때, 하나님의 아들, 인자가 오실 것이고, 악은 패배할 것이고, 마침내 악이 없는 세상.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가 온 땅에 드러날 것이다.”이 얘기를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이 없는 세상에 대해서 얘기해보세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것을 '억측'이라 여깁니다. 즉, 근거 없는 주장 정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근거 있습니다. 그 근거는 역사입니다. 역사 위에 그 인자가 정말 나타났습니다. 그가 악을 처리했습니다. 악은 인자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최후의 무기인 죽음을 사용해서, 그 인자를 공격했습니다. 인자는 그 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이것으로 세계는 악의 구렁텅이가 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인자는 그 죽음마저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인자를 따라, 그래서 악으로부터 구출받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이후, 바로 이 의미와,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 억측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바뀌어 영광이 되었습니다. 드러남이 되었습니다. 즉, 이 말이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 억측이 사실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에 의해서! 악은 파멸하고, 선이 이긴다. 사랑과 정의가 승리한다. 결국 옳은 것이 드러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사실이, 하나님의 아들, 다니엘 이야기에서 인자의 배역을 맡고 계신 예수로 인해, 억측이 아니라 진실이 아님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드러나게 하신 진실인 것입니다. 


4. 이제


  이제 드라마를 우리는 다 시청했습니다. 짐승이 나와서 그 기세등등한 악의 위용을 보여주었으나, 옛적부터 계신이가 그 짐승을 파멸시키고, 인자가 오셔서, 참 사랑과 정의로, 우리를 새롭게 다스리시는, 이 위대한 드라마를 함께 확인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악을 내려놓으십쇼. 악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악입니다.

악을 내려놓으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붙들라는 말입니다. 사랑과 정의를 완성하셨고, 완성하실 그 분을 인정하지 않고, 진정으로 사랑하며, 정의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2:30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실, 그 예수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사랑스럽지도, 정의롭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가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셨고, 그리고 정말 실현하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분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악인입니다.


  둘째, 마지막 날, 우리의 모든 행위가 그 분 앞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고린도후서 5:10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자가 선악간에 그몸으로 행한 일에 따라 보응을 받을 것이다.

 

  셋째, 여러분의 말과 여러분의 삶으로 이 드라마를 알리십시오. 아직도 사랑과 정의가 끝내 승리할 것이라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그래서 헛된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많은 청소년들. 그들에게, 이 위대한 드라마를 알리세요. 이것을 위해 연구하고, 전하는 일에 참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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