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7:14~23)

  예수께서 다시 무리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잘 듣고 깨달았다.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히지 못한다.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힌다."

  그들이 다시 집으로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이 비유에 대해 예수께 물었다.

  "너희도 깨닫지 못했느냐? 사람 밖에서 사람 안에서 들어가는 것은 그들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느냐?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나온다."(그러므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악한 의도는 안에서부터,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데, 곧 성적 부도덕,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사악함, 사기, 방탕, 시기심,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다. 이 악한 것들이 전부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1.


     오늘도 '죽음의 바다'에서 시작합시다. 그 바다 위에는 많은 전통들이 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전통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힘껏 노를 젓고 있습니다. 아니면, 이 죽음이라는 망망대해에 떠 있음에 절망하고, 죽어서 이 배를 떠나기를 바라고 있거나 말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전통들은, 그 전통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체성'이라는 것을 줍니다. 즉, 전통이 정체성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영어로는, identity인데, 사전을 찾아보니,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갖는 독립적 존재" 라고 써놨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밑에 예문을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청소년기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이다.'


     정신이 버쩍 났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청소년기는 이 사회의 전통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사전대로라면,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정체성, 즉, 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시기입니다. 여러분이 왜 존재하며, 왜 살아가며,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의 청소년들이, 이 사회의 전통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주위 또래 친구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무엇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했습니까? 자신의 존재의 본질은 누가 가르쳐줄 수 있습니까? 자신은 왜 존재하며, 왜 살아가며,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원래 전통은 그 전통에 속한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말해줘야 하는데, 오늘 우리가 속한 전통은 정체성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냥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해결되겠거니 생각하거나, 아니면 이 더러운 세상하고 침을 뱉고, 심하게는 죽음을 예찬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더군다나 우리가 속한 전통 역시 이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학교 선생님도, 때론 부모님도, 친구도, 연인도, 이 중요한 정체성에 대해 깊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진로, 직업, 뭐해서 먹고사느냐는 관심이 많은데, 정작 자신이 누구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뿐입니다. 


     오히려 요즘, 이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광고들이죠. '당신은 이것이 부족합니다. 저것이 부족합니다.' 말합니다. 그리고 돈을 쓰고,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를 통해서 나를 발견합니다. 당연히, 물건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어떤 취급을 받습니까?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합니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인간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속한 전통 위에서는 정체성에 대해서 아무도 말해주지 않고, 그 사이를 상업주의가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돈 벌고 돈 쓰는 것이 사람의 정체성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헛소리들에 대해서 귀를 닫으십시오. 광고는 여러분의 정체성의 소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쇼프로가, 예능이, 잘난 연예인 이야기가 여러분의 정체성에 영향을 끼쳐셔는 안됩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인지 말 안해줍니다. 사람의 전통은 당신이 누군인지 알지도 못하고 말해줄수도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디에서 발견해야 합니까? 오늘 우리에게 도움을 줄 사람들은 '유대인'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독특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바다 위에 떠 있는 무수한 인간의 전통들과는 달리, 이들은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다가 갈라지고, 그 바다를 뚫고 나온 그들의 경험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출애굽입니다. 


2. 자신들을 '하나님이 백성'이라 말하는 사람들


     오늘 본문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정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정체성이었습니다. 누군가 그들에게, "당신들은 누구요?" 라고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오!"  이것이 그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세상이 줄수 없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답변을, 그들은 성서를 통해 얻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우리 역시, 성서를 통해, 우리가 왕되신 예수를 믿고, 그 분이 우리의 죄의 속박을 끊으셨으며, 우리는 그에게 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새로운 율법을 받고 마지막 심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러나 이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유대인들의 방법이 왜곡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 민족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방 민족과 구별되는 이러저러한 법들을 많이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들과 달리, 이 법들을 지키고 있으니까, 깨끗해. 하나님의 백성이야!' 수백가지의 법을 만들어놓고, 그것들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남들과 달라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르긴 다른데, 자신들이 정한 법을 지키냐 지키지 않느냐를 통해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소중하다는 생각에, 쇼핑에 중독되고, 성형에 중독되어 자기 자신에게 잘못된 투자를 하는 젊은 여성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잘못된 행동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마치 '결벽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놓고 열심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번 주에 확인했던 것처럼, 손 안씻고 먹는 제자들에게 득달같이 쫓아와 그들에게 손가락질 하는 유대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했던 것입니까? 자신들의 정체성. 그것에 위배되는 사람들에 대한 손가락질. 잘 생각해보십시오. 죽음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쪽배가 아니라, 바다를 가르고 나온 역사 위에 있던 민족이, 지금 출애굽의 든든한 토대를 떠나서, 자신들이 만든 전통이라는 배로 옮겨타고 있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아니라, 죽음에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자신들이 만든 법들로, 자신들의 깨끗함을 유지해보려는 어리석음이 보이십니까? 



     잘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깨끗해지는 방법은 다름아닌 금긋기였습니다. 이 금긋기는 사람의 전통입니다. 어디에 금을 긋는 것입니까? 유대인과 유대인 아닌 사람들 사이에 금을 긋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들이 정해놓은 정결법을 지키는 사람들과 지키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금을 그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깨끗해. 너는 더러워.


     우리 주변에 얼마나 이런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까? 자기 자신은 괜찮고, 다른 사람은 탓하는 일들이 그러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끼리끼리를 만들어놓고, 금을 그어놓습니다. 우리 편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안됩니다. 이런 거 우리가 어디 한 두번 봅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금긋기로는 결코 깨끗해질수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해서는 안되는 짓거리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 역시 이 금긋기를 시전한 적이 있습니다. 


     다, 사람의 전통에서 온 것입니다. 이 배에 타도 되냐, 되지 않느냐, 인간이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옆에 두고도 말입니다.


3. 마음의 문제


     그리고 이 꼬라지를 보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히지 못한다.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힌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에 관해서도 깨끗함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다양한 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먹어라. 저렇게 먹어라.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야! 사람이 정해놓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금을 긋는 이러저러한 것들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더러워지는거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의 말씀을 더 들어봅시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만 그따위 쓸데없는 결벽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금긋는 일을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 저것 법들을 다 정해놓고, 이거 먹으면 더러운거야. 이렇게 먹으면 더러운거야. 너는 우리 배에 타도 돼, 너는 내려. 사람이 주인된 세상. 타락한 아담의 복사판아닙니까? 


     "악한 의도는 안에서부터,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데, 곧 성적 부도덕,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사악함, 사기, 방탕, 시기심,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다. 이 악한 것들이 전부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 금을 그어야 합니까? 진짜 더러운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자신의 마음입니다. 나와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악이 스물스물 올라옵니다. 곧, 성적으로 음란한 것, 도둑질, 남을 죽이고 싶은 마음, 욕심을 부리는 마음, 사악함, 남을 속이려는 마음, 이간질하려는 마음, 하나님보다 자신이 높아진 마음, 어리석음.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럽습니다. 더러운 것의 정체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나오는 바로 당신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더럽습니다. 


     따라서, 금을 그으려거든, 자신의 마음에 금을 그어야 합니다. 이것이 더럽기 때문에, 이것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마음이 더러운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에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말도 안되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이 더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마음과 떨어질 수 없는, 끔찍한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사람은 그 일생 동안 끊임없이 더러운 것들을 쏟아낼 것입니다. 사람은 이 더러운 것들을 쏟아내는 마음을 끝까지 안고 죄책감에 짓눌려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나는 아직도 전통의 배에 몸담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 아닙니까?


     예수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을 까발리고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씨꺼먼 마음은 감춰둔채, 이것 저것 마음과 상관없는 법들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면 아무런 문제 없는 양 굴고 있는 이스라엘 전체의 중대한 문제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출애굽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쪽배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쪽배가 죽음의 바다에서 자신들을 구원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벌어지는 문제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문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는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예배를 그냥 드리면 되는 것입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예배에 빠지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까?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예배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모두 삶의 정해진 옷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정해진 시간이 일어나고, 정해진 장소에 가며, 정해진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회에서 정해진 자리로 가서, 정해진 행동을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괜찮은 것입니까? 문제 없는 사람입니까? 아니,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가 입는 형식의 옷들은 모두 소용이 없습니다. 이 마음의 진퇴양난에서 구원받지 못하면, 그 예배는 의미 없는 예배, 예배할 이유 없는 예배입니다. 의미없는 삶, 그저 다람쥐 쳇바퀴 구르는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4. 마음의 문제가 해결된 하나님의 백성


     저는 이 시간 감히,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익히 들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유일한 구주를 여러분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는 그저 정해진 루틴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닌, 오히려 삶을 그 분의 말씀으로 덮고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 분에게서는 언제나 그러한 삶을 개혁하는 강력한 힘이 흘러나옵니다. 허나,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악하고 더럽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일입니다. 형식의 껍데기에서 문제없는 양 우리를 속이고 있는, 그 마음, 여러분의 마음, 나의 마음, 이 마음이 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를 만납니다. 


     시편 51:16, 하나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 멸시치않으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가져가야 할 제물은, 바로 찢어진 마음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입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멸시치 않으신다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예수께 나아가, 그 마음의 문제를 해결받아야 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그 악함을 그리스도께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럼 그 분은 당신에게 알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있는 모든 악함이, 예수의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뿜어내는 그 모든 악함을 예수께서 홀로 짊어지고 계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악함으로 그 분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진실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정의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죽음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실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이 사실을 믿는다면, 당신은 예수의 죽음에 빚진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는 살인자들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살해한 하나님의 아들을 경배하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아무런 대가 없이, 나의 모든 악을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예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예수로부터 마음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결코 금긋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수 없습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금을 뛰어넘어 예수께서 나에게 오셨고, 그 분이 나를 고치셨는데, 어찌 내가 또다시 존재와 존재 사이에 금을 그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금을 철폐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전하시고, 아마도 죽음의 위협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의 문제를 이런 저런 법들로 감추고 싸맸던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마치 그들 자신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따가움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깨끗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마음이 악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가히 그들로부터 죽임당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언제든, 그 사람의 정체성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을 자초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갈릴리 북쪽에 있는 동네로 몸을 피하셨습니다. 아직, 십자가의 위대한 사건 이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십자가 사건의 시점까지 자신의 몸을 보전하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피신 갔던 그 동네에서 유대인들이 생각할 수도 없었던 충격적인 일을 벌이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7:24~30)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 자리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셨다. 거기서 어떤 집에 머무시면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를 바라셨지만,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오히려 예수에 대한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더러운 귀신이 들린 어린 딸을 둔 어떤 여인의 귀에 들어갔다. 그 여자가 예수를 찾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렸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이었고, 인종으로는 수로보니게 사람이었다. 그 여자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이 먼저 먹어야 한다. 자녀의 빵을 가져다가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주님, 식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제대로 말했다! 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으로 가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유대인들이 '개'라고 생각하던 이방인이, 피신해있는 예수께 찾아왔습니다. 자기의 딸이 귀신들렸다고,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가져다가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녀는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개들은 이방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을 개로 보시는 것입니까? 유대인들의 그 금긋기를 인정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는, 교묘하게 말을 비트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비틀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 이방여자가 대답한 것을 보십시오. "주님, 식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 먹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 제대로 말했다! 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유대인들이 더럽다고 금 그었던 여자가 예수로부터 은혜를 입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달리, 이 여자는 어떠한 전통도 의지하지 않은채 금을 넘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께 나아왔을 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예수는 유대인이고, 여자는 이방인입니다. 그것도 귀신들린 자기 딸을 치료해줄 것이라 믿고 나아가는 이 여자의 발걸음이 결코 쉬운 발걸음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자는 사람이 그어놓은 금을 넘어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게다가, 예수가 자신을 개라고 불렀으나, 이 여자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 예수께 끝까지 나아갔습니다. 마지막 언덕을 넘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 여자의 걱정과 고민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로부터. 이 여자의 마음의 걱정의 근원이었던 딸의 귀신들림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이 '개'라고 불렸던 여자는,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은 철폐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세상의 전통에서 여러분의 정체성을 찾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이 사람 저 사람 사이에서 금 긋고 있다면, 누군가는 좋아하고, 누군가는 미워하며, 니 편 내 편을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진짜 모습도 아닐뿐더러, 당신은 세상의 정체성에 의해 오염된 사람입니다. 마음이 악하고 병든 사람입니다.

     예수께 가십쇼.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분께 가십시오. 그 분께 당신의 문제들을 다 쏟아내십시오. 그 분은 상하고 찢긴 마음으로 나아온 당신을 결코 멸시치 않을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혼자 있는 방에서 기도하십시오. 그 분은 만나주십니다. 혼자 있는 방에서, 그 분께 하나하나 조목조목 모든 것들을 말씀드리십시오. 그 분은 당신의 마음을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로 씻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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