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망각과 익숙함에게 빼앗긴 것


     우리 때에도 없었습니다. 제가 청소년 시절, 교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던 그 시절에도, 제 주변에 없었습니다. 말씀에 정말 사무쳐있는, 날마다 하나님과 같이 있는, 그래서 누가봐도 남들과 무언가 다른 그런 아이, 없었습니다. 물론 부모님은 제가 그런 아이되기를 바라셨겠지만, 저는 그것에서부터 거리가 정말 먼 사람이었고, 제 주변에 함께 교회 다니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함께 다니던 친구들중 몇몇은 신앙을 버렸고, 그 당시 학생회에 대한 추억은, 그저 그런 기억으로 제 머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누나를 따라다니고, 형들이랑 농구하고, 매년 수련회를 갔던 기억, 그러나 그 시절 우리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추억속에 하나님은 안계셨습니다.


     요즘도 없습니다. 말씀에 정말 사무쳐있는, 날마다 하나님과 같이 있는, 그래서 누가봐도 남들과 무언가 다른 그런 아이, 없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식구로서 너무도 당연 것인데, 이 당연한 일이 잘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경이로움보다, 값진 보물보다, 더욱 귀하신 나의 주님이라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 분이 무슨 말씀하셨는지 관심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성경의 말투가 익숙하긴 한데, 성경의 의미는 생소한 시대입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볼때, 그 역사의 자리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까봐. 우리가 추억이라 말하는 것들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들이 될까봐. 마치 저의 무미건조한 교회 학생회 생활이, 오늘 다시 여러분에게도 반복될까봐 그것이 두렵습니다.


     제가 더욱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차원의 문을 열어두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인간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오히려 접근하려다가는 죽임당하는, 그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는 그 새로운 차원이 이미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냥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몸을 찢어, 그 차원의 틈을 만드셨습니다. 그 틈으로부터 우리는 진정한 인간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틈으로부터 우리는 변하지 않는 진리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 틈으로부터 우리는 고갈되지 않는 생명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그 틈을 찾으려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망각과 익숙함입니다. 이것들이 왜 문제가 됩니까? 우리의 역사는 창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입니다. 이 역사는 폭력의 역사보다, 문명의 역사보다, 공부의 역사보다, 범죄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역사입니다. 예수쟁이 역사의 시작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쟁이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지배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나중에 생긴 것들입니다. 사람있고, 돈이 있습니다. 사람 있고, 정치가 있습니다. 사람있고, 배움이 있고, 사람있고, 사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망각이 문제를 가져옵니다. 이 망각은 역사의 실타래를 끊어내는 가위입니다. 인간은 잊습니다. 그 망각으로 역사의 실타래를 뭉텅뭉텅 잘라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잊고, 마치 우리가 폭력의 후손인양, 돈의 후손인양,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의 후손인양 살아갑니다. 마치,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가 왕위에 올랐을 때, 똑같이 요셉을 모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겪는 괴로움의 이유를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기독인입니까? 예수쟁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의미인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역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를 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성서를 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성서를 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망각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출처를 잊게 하는 망각과 싸워야 합니다. 그 방법은? 여기 있는 성서를 붙드는 일입니다. 이 글자가 붙잡고 있는 의미에 나를 담그는 일입니다. 그 때, 우리는 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망각과 더불어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익숙함입니다. 익숙함은 이러한 것입니다.  '그 일을 왜 하는지 묻지 않고, 그냥 하는 것'이 익숙함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의 의미를 묻지 않고, 그냥 하고 있다면, 우리는 벌써 익숙함의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배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왜 학교를 가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왜 지금 이 시간 말씀 앞에 서 있는 것입니까? 왜 당신은 그 앞에서 졸고 있는 것입니까? 이건 당신의 일상인데.


     그리고 이 익숙함의 관성은 망각과 함께 움직임입니다. 의미를 잊기 때문에 그냥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망각과 익숙함에 대해서 싸움을 벌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망각과 익숙함에게 절대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의미입니다. 우리가 매주 확인하고 있는 성서 본문의 의미입니다.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 할 수 없네"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 바로 의미입니다. 우리는 다시 시간을 돌려, 첫 시간으로 돌아갑시다. 마가복음의 의미, 망각과 익숙함에 흘려보내지 말아야 할 그것을 우리는 지금 이 시간, 다시 붙잡으려고 합니다.


     총 3부로 구성된 마가복음, 오늘 그 1부를 정리하는 시간,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다음 소제목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1.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마가복음의 시작은 세례요한부터였습니다. 그는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안 입는 옷을 입고, 남들이 가지 않는 장소에서, 남들이 안하는 말을 외쳤습니다. 그는 그가 외친대로, 정말 왕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혼자 준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왕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일에, 많은 사람이 함께 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연극배우처럼 의상을 차려입고, 역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무대 위에서,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오늘 우리야 연구하고 깊이 들여다 봐야 하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았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만나러 요단강을 건넙니다. 요단을 건너면 광야 한 복판에서, 소리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마치 "역사를 기억하라!" 라고 말하는 듯이, 당시의 의상과, 당시의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어떤 역사입니까? 하나님께서 광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오셨던 바로 그 역사, 출애굽의 역사 아닙니까!


     그 역사의 전달자, 세례요한 앞으로 누군가 걸어옵니다. 세례요한이 목이 쉬도록 외쳤던 바로 그 왕, 예수가 세례요한 앞으로 걸어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때, 예수님의 머리에 성령이 부어집니다. 성령이 부음받은 그를 '메시아'라 불렀습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인데, 희랍어로 하면, 크리스토스입니다. 즉, 이 때,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이 땅 위에 밝혀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우리는 그저, '예수 그리스도', 마치 영어의 first name과 last name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이 '예수'라는 말과 '그리스도'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기독교 믿음의 핵심이라 말할만큼, 이것은 중요한 표현입니다. 예수는 메시아시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이 메시아는 구약의 그림을 생각나게 합니다. 구약에 기름이 부어진 사람은 세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왕과 선지자 제사장이 그것인데,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신 이후, 마가복음이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독자들에게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먼저 어떤 사건이 벌어졌습니까? 그가 귀신을 쫓으시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럼,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악한 권세와 싸우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어떤 사건입니까? 새벽에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몰려왔는데도, 그들을 뒤로 하고 다른 마을에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시기 위해 떠나신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옳은 말을 하시는 선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은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침상에 싣고, 예수님의 집 지붕을 뚫어버린 사건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니가 오늘 용서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부를,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로 설명한다면, 그 첫번째 질문인, '누가?'에 해당하는 답변은,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입니다. 악한 권세와 싸우시고, 하나님 다스림의 소식을 전하시며, 죄인에게 용서를 행하시는 바로 그 예수가!


-우리에게 

     마가복음은 세례요한을 보여주고, 예수가 누구이신지 몇가지 사건들의 퍼즐들을 통해 수수께끼처럼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갑니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3먹이라 불렀던 내용입니다.

     먼저는 레위가 등장합니다. 그 레위는 가버나움에서 통행세를 걷어다가 로마에게 바치는 민족 반역자 레위입니다. 모든 사람이 무시하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레위입니다. 그 레위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레위는 이제 예수님과 함께 먹습니다.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금식하지 않는 예수 일생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예수와 함께 먹는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포로기와 함께 엮을 수 없는 새로운 옷감이요, 포로기가 담을 수 없는 새로운 포도주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통해 포로기가 끝나고, 광복이 찾아왔습니다. 이 말을 듣던 포로기의 절망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기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도망자였으나, 왕이었던 다윗과 같이, 자신이 지금 도망자이나, 그리스도임으로, 자신을 통해서 쉼이 찾아올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메시아가 어떠한 사람에게 찾아오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찾아갔던 사람들은 레위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절망했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죄의 포로가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던 사람들, 그래서 결코 몸과 마음에 참다운 쉼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오늘날에도 예수를 만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 분은 삶에 낙이라곤 하나 없이, 자기 자신에게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사수생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 사수생은 밤마다 친구들을 따라 술을 퍼마시며 죄의 노예되기를 자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몸과 마음은 쉼이 없이 언제나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레위였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에게 그리스도이신, 우주의 왕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레위 같고, 죄의 포로에다, 쉼이 없는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것은 아무도 하지 않던, 올바르고, 아름다운 일임에도, 이 일을 하는 예수를 사람들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손 마른 사람을 미끼로 예수를 죽이려 하는 사건이 이 시점에 벌어집니다. 


-복음을          

     그러나 그러한 일이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부지런히 이끌어가십니다. 바다를 건너 산에 오른 사람들, 예수님은 새로운 열둘을 선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치십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 분이 악을 짓밟습니다. 이미 악은 더 힘센 그리스도로 인해 결박되었고, 그 분은 악을 밟고서 말씀하십니다. 그는 마치 새 시대의 소식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와 같이 말씀하시고, 사람들의 마음 밭에는 그것이 떨어집니다. 예수, 그 분이 세상 모든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라는 그 사실이 마음에 떨어집니다. 그 씨앗은 두려움을 뚫고, 현실의 걱정을 걷어내고, 아무도 모르게 자라나고 자라나서 주의 날을 맞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영광으로, 아무도 해할 수 없는 생명의 풍성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제로 보여주십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과, 혈루증 걸린 여인은 12년 전에 운명이 갈렸습니다. 한 사람은 딸을 얻는 기쁨을, 한 사람은 병을 얻는 절망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12년이 지나고, 한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그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아왔으나, 예수를 붙들고, 두려움과 걱정을 이겨내는 공통점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조금 전에 가르쳐주신 바와 같이 말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여자는 아무도 모르게 병이 나았으며, 야이로의 딸은 죽음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 이후, 세례요한의 죽음의 기록을 마가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둘씩 나누어 보내십니다. 너무도 귀한 소식을 들고 가는 자들이기에, 여타의 옷이나 돈을 가져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 귀한 소식을 가져온 제자들을 대접할테니까요. 그렇게 제자들은 세례요한으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아 역사를 전달합니다. 이스라엘이 망각한 역사, 익숙함이 지워버린 역사를 다시 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이 지금 예수를 통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1부의 마지막을 장식할 거대한 사건을 하나 남겨두고 있습니다.


2. 어떻게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 가르침은 저 위에 언급한 바로 그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명씩 뻗어나간 제자들을 통해 이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았습니다. 그가 정말 메시아인지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여러 마을에서 예수가 계신 곳으로 구름떼같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마지막 질문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말씀하신 복음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오병이어입니다. 그 분은 복음을 어떻게 이루실 것입니까? 무한히 찢어지는 것을 통해서 이룰 것입니다. 빵이 계속 찢깁니다. 물고기가 계속 찢깁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계속 먹입니다. 생계의 문제로 고통받는, 꺼져가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무한히 찢기는 빵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생계로 고생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더이상 일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그래, 이제는 쉴 시간입니다" 언제 참으로 쉴 수 있습니까? 무한히 찢어지는 빵이 있을 때 참으로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만 부르면 그만입니까? 무한히 찢기는 빵이 있어서,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으며 살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입니까? 사람들은 오해했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 이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액션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무한히 찢기는 빵, 사람들의  몸도 마음도 쉴 수 있게 하는 무한히 찢기는 빵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자신입니다. 예수는 찢기실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로 인해 자신이 몸이 찢기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무한한 양분을 공급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방법으로,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복음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찢기는 예수의 살점이 광야 백성의 만나입니다.

     그 찢기는 예수의 살점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먹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였습니다. 예수를 먹는 자들이 모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히시는 왕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면 어떻겠느냐?"


     예수로부터 영원한 양분을 공급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먹일 수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의 살점이 공급되는 사람은, 날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얻은 생명이 바로 누군가 자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놨기 때문에 얻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복음은 이뤄집니다. 이것으로 복음은 이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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