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6:15~34

from 예언들 2019. 8. 1. 08:24

찬송가 276장 아버지여 이 죄인을

에스겔 16:15~34

 

1.

에스겔 16:15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피투성이가 된 채 발길질 말고는 할 수 없는 것 없던 아기를 데려다, 씻기고 피를 닦아주고 기름을 발라 옷을 입혀주고, 보호자가 되어 사랑해 주었더니, 예루살렘은 비뚤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여자에게 화려함과 명성을 가져다 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는데, 이젠 그 사랑을 믿지 않고 그 사랑의 결과만을 믿습니다. 사랑을 믿지 않고 그 사랑의 결과만을 믿습니다. 15절에 있는 “네 화려함을 믿고”에서 “믿고”는 본래 “의뢰하다”라고 많이 번역되던 단어입니다. 안전과 평화를 보장해줄 것을 믿고 기대어 쉴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로 찾아온 화려함과 명성이 안전과 평화를 보장해줄 것을 믿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도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사랑과 사랑의 결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안락함, 따뜻함, 편안함, 부유함을 주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의 결과가 있기 위해서는 피투성이 아이를 끌어안고 닦아내야만 했고, 나에게 아무 것도 준 것 없는 그 아이를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내어줘야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사랑’이었는데, 예루살렘은 사랑과 사랑의 결과를 혼동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 결과 타락했습니다.

 

2.

  사랑하는 이가 입혀준 의복을 가지고 산당을 꾸밉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편 아닌 자와 성관계를 맺습니다. 에스겔은 말합니다.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니라(16절)” 사랑하는 이가 준 보석들을 가지고 남자 우상을 만들어 음란한 행위를 벌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준 것을 우상에게 입혀놓고, 사랑하는 이가 준 기름과 향을 그 앞에 피웁니다. 예루살렘은 “과연 그렇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이와의 사이에서 나온 자녀들을 모두 우상 앞에 태워 바쳤습니다. 열왕기하에 보면 이스라엘 왕들도 몰렉이라는 우상에게 자녀를 불살라 바칩니다. 버림받은 피투성이 발짓하던 아기는 자신이 버림받았던 사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작 자신은 자녀를 물건 취급하며 불 가운데를 지나게 합니다. 이 자녀를 불사르는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잊을만 하면 나옵니다. 레위기에도, 열왕기하에도, 예레미야에도, 그리고 오늘 본문인 에스겔에도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은 정말 미쳤습니다. 사랑의 결과만 유지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생각입니다.

 

  예루살렘이 누렸던 사랑의 결과 중 화려함 외에도 이방인들에 대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쓴 방법은 창녀의 집을 만들어 모든 지나가는 자에게 가랑이를 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우상숭배가 앗수르의 폭력이 갈대아의 돈만 밝힘이, 그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타락한 본성이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창녀 짓을 하면서도, 이것은 이방인들에 대한 자신의 명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돈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잤던 제국들에게 선물을 쥐어주며 다시 찾아와서 우상숭배하자고 화친을 맺습니다.

 

3.  

  화려함과 명성. 결국 줄여서 말하면 남들이 보기에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남들에게 보여줘야 할 정말로 “잘 사는 것”이란, 한 분에 대한 충성과, 그 한분을 따라 사랑하는 삶뿐입니다. 설령 사랑의 결과가 따라오지 않더라도, 화려함과 명성이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더라도, 그 한 분에 대한 충성과 맹세를 지켜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그분을 얻는 것이 곧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만일 그 한 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 남자 저 남자 모두를 사랑하게 되고, 성경은 이것을 사랑이 아니라 음행이라 부릅니다. 이 따위 삶은 사랑하는 이가 기껏 입혀주었던 옷을, 입을 필요가 없어진 삶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이야기는 실재이고 역사라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때로 돌아가 버렸고, 그들은 “인자”의 공동체로 불릴 수 없으며, 예루살렘은 몸을 내어준 그 제국의 남자들과 싸우게 될 것이고, 다시 피투성이의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를 돌이킬 순 없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남아있고 오늘 이 이야기를 들음으로 선택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 여러분, 우리는 오늘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랑의 결과만을 바라고 정작 사랑을 훌훌 벗어던지고 있습니까?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이에게 돌이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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