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4:1~23

from 예언들 2019. 7. 29. 09:21

찬송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에스겔 14:1~23

 

1.

  바벨론은 남유다의 귀족들을 모조리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 이들은 남의 땅의 포로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중심으로 유대인 공동체를 꾸려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포로들 중 서른살 제사장 견습생이었던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 말한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그 장로들 중 몇이 에스겔을 찾아와 질문하고자 합니다. 아마 이들은 이 바벨론 포로 생활이 언제 끝날지를 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언약백성이 개, 돼지 같은 이방민족 아래서 노예 생활을 하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도 비슷한 질문을 하나님께 드리곤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 힘든 시기가 언제쯤 끝날까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런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지금 바벨론의 포로로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은 이방 민족의 회초리를 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로들의 질문은 마치 아버지에게 훈계를 듣는 아이의 머리 속에 '아버지의 훈계가 대체 언제 끝날까'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훈계를 그런 식으로 듣는 아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이 기회를 통해 성숙해질 수도 없습니다. 훈계를 듣는 아이는 '시간'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신이 아버지 뜻에 걸맞는 사람인지를 돌아볼 때, 그때야 말로 시간이 적기입니다. 최고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야 말로 아버지가 원했던 시간이고 아이가 한 걸음 성숙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묻는 사람은 정작 그 최고의 시간을 누릴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끝나는 시간이 언제인지 답해주시는 바가 없습니다. 그저 시간이 충만히 차야 한다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면 시간은 언제나 적기입니다. 바로 그 순간입니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말했듯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답변이 돌아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우리의 정직한 질문은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죄입니다. 우상숭배자인 장로들은 자신들이 끌리고 있는 우상, 마르둑에 대해 물어야 합니다. "마르둑"은 당시 바벨론이 섬기던 우상의 이름입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점령해버리자 이스라엘의 장로들마저도 여호와보다는 마르둑이 더 강한 것은 아닌지 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시 예루살렘은 왜 파괴되었으며, 왜 하나님은 마르둑에게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지, 또 하나님이 정말 강하시다면 이 바벨론 안에서도 마르둑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바로 이 주제, 우상숭배로 인한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야기하고 싶어하십니다. 오늘 본문 4,5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상의 갯수만큼 직접 답변해 주시겠다고 나서실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에 대해 직접 논박하실 것입니다. 그 목적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함이고, 이스라엘을 누구보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14장 6절에 있습니다.

 

에스겔 14: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2.

  그런데 7,8절에 보면 또 예언자를 찾아와 질문하는 장로들과 비슷하지만 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 속한 유대인이나 외국인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우상에 끌리는 것은 장로들이나 마찬가지이고, 하나님께서 질문에 직접 답변해주시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충격적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면박을 주고 이들을 백성의 놀림거리가 되게 하며 백성 가운데서 끊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4절에 나오는 장로들이나 7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족속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단 하나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이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은, "나는 변하지 않을테다"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상숭배에 대해 대화 하면서, 자신은 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자신은 변할 생각 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 말로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그것을 이용하려고 만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내가 변할 마음으로 뵈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만난다면 하나님을 우상 취급한 것이니, 이렇게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진실하게 들여다보고 진실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이 깨달아지면 즉각 달라질 각오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진중한 대화의 기본입니다. 하물며 사람과도 그럴진대 하물며 하나님과의 대화는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하나님과의 진실한 대화가 '나'를 살릴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과의 진지한 대화 뿐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과의 진실한 대화가 없다면, 그 가정은, 그 직장은, 그 사회는, 그 나라는 그 교회는 창문 없는 방과 같습니다. 푹푹 찌는 한낮 무더위에 선풍기 없이 창문을 닫아놓은 것처럼 답답합니다. 하나님과 진실한 대화를 하려는 자들이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그 예언자들 마저도 유혹에 빠져, 우상 찾듯 하나님을 찾은 자들에게 그럴듯한 답변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상숭배자나 그런 예언자나 모두 죄의 책임을 지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죄의 책임이란 다름 아닌 예루살렘의 멸망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겪도록 허용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다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그림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순애보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라도, 깨닫는 사람, 다시는 속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 죄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을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이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하나님이십니다.


  12절부터 이어지는 전쟁, 기근, 사나운 짐승, 전염병의 재앙은 모두 레위기 26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을 때 겪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 저주들'입니다. 그러니 언약백성이 언약백성답게 살지 않을 때 저주는 실재가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발생한 저주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걸어 다음과 같이 맹세하십니다. 20절입니다.

에스겔 14:20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시간만 묻느라 자신의 죄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예언자들, 그리고 우상숭배자들 모두가 함께 망합니다. 그리고 그 망하는 나라에 노아, 다니엘, 욥과 같은 사람이 있더라도 그들은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고 오직 자신들만 생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맹세는 절망스러운 메시지 같지만, 우리는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저주를 극복하고 복의 생존자가 되는 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폐허의 도시 위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여우도 아니고, 사냥꾼도 아니라 바로 노아, 다니엘, 욥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저주와 심판 속에서도 생존자가 되는 길을 하나님이 맹세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노아가 되면 됩니다.
  우리 자신이 다니엘이 되면 됩니다.
  우리 자신이 욥이 되면 됩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한 분께 신실했던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죄악을 돌아보고 하나님과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이들을 통해 세상이 위로를 얻으며, 훈계를 훈계답게 받아들인 이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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