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깊게 읽는, 스데반의 '최후 변론' (4)

  스데반이 기소 당한 내용은 네 가지였습니다. 하나님, 모세, 성전, 율법. 유대인들이 죽고 못 사는 이 네 가지 주제를 스데반이 모독했다는 것이, 그가 죽임당하는 이유였습니다. 스데반이 아브라함 이야기부터 이스라엘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이 하나님, 모세, 성전, 율법을 모독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모독의 주범임을 논증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 살펴본 이야기는 모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모세의 말을 경청하기는 커녕, 오히려 모세를 거절하고 배격했음을 이스라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모세와 하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이 만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것이 하나님이다'라고 만든 금송아지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뿐만 아니라, 아기를 제물로 받는 끔찍한 신 몰록, 하늘의 토성을 숭배하는 이집트의 레판신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는 바로 "바벨론 너머로 쫓겨나는", '포로기'였습니다.

사도행전 7:44~50, 개인번역


  그 증거의 그 장막이 그 광야 안의 우리의 아버지들에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포로기를 포함, 그들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건물이 있습니다. 그 건물은 텐트에서 시작했습니다. 십계명 두 돌판과 싹이 돋아난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들어있는 그 텐트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증거의 장막"이라 불렀습니다. 


그 모세에게 말하시는 분이 그(모세)가 보았던 그 꼴(τυπος)을 따라
그 장막을 만들도록 명하신대로, 그 장막을 우리의 아버지들이 

예수(여호수아)와 함께 받아들였고


  이 장막은 모세가 자기 마음대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꼴(τυπος)을 따라 만든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장막의 꼴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이 장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렸고,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지도자가 넘어가면서도 이 장막은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남아있었습니다. 이때 히브리어 여호수아는 희랍어로 '예수'입니다. 여호수아와 예수는 같은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보냈던 그 이방인들의 물러선 곳 안에서 

우리 아버지들의 얼굴에서부터 다윗의 날들까지 들어갔습니다,


  그 장막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점유하고 있던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모세 때 시작되었던 장막은 다윗 때 이르기까지 여전히 있었습니다. 지금 스데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포로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장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 이방인인 로마가 물러서는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로마와 전쟁 마저도 불사하려고 하고 있는 와중에, 스데반은 그 이방인들의 물러섬이 "하나님께서 내보내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 앞에서 카리스를 발견했고

그 야곱 집에 (속한) (하나님의) 텐트를 발견하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그에게 속한 집을 지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집은 멋지고 화려한데,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리는 성막은 텐트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집을 다시 지어드리고 싶어했지요. 그러나 다윗은 정작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짓지 못하고, 그의 아들은 솔로몬 때가 되어서야 성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고,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마다 성전은 수모를 당했으며, 이스라엘이 다시 땅을 찾아오기 위해 전쟁을 준비할 때도, 이 성전이 이스라엘 민족을 결집시키는 중심이었습니다. 율법을 해설하는 자들의 권위와 정당성이 모두 저 성전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것들 안에 거주하지 않습니다.

그 예언자가 말했듯이 말입니다.


  "하늘이 나에게 (속한) 왕좌이고, 

  땅이 나의 두 발들의 발판이다.

  너희들이 나에게 (속한) 어떤 집을 짓겠느냐, 

  주께서 말씀하신다,   

  아니면 나의 그 쉼에 속한 어떤 장소를 (짓겠느냐)?

  나의 손이 이 모든 것들을 하지 않았느냐?"


  스데반은 이스라엘 동족들에게 죽임당했던 많은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이사야 66:1,2, 공동번역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어디에다 마련하겠다는 말이냐?

  모두 내가 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다 나의 것이 아니냐?"

  야훼의 말씀이시다.

  "그러나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그 건물, 성전으로는 하나님을 가두어 놓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왕좌는 하늘이고, 땅은 하나님의 발판입니다. 즉 하늘과 땅, 만물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렇게 말한 스데반이 성전을 모독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특정 건물에만 하나님이 사신다는 말이야 말로 성전이 무엇인지 모르는 성전 모독입니다. 이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려던 사람들은 건물 성전만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했고, 그 건물 성전을 능욕했던 이방 사람들과는 목숨을 각오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방법만이 포로기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단히 착각에 빠져있습니다. 그들은 땅에 목숨 걸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은 땅을 상속받은 떠돌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조상 아브라함의 씨라면, 그들 스스로 떠돌이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떠돌이로 살았던 이들은, 사실은 떠돌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성전을 거닐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집을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들이 가는 모든 곳이 그들의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특정 건물을, 특정 땅뙈기를 얻고자 전쟁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스데반은 자신이 쓰고 있는 네 가지 누명 중 세 가지를 해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세를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역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입니다. 마치 자신들의 아버지들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진정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스데반이 해명해야 할 단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바로 토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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