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깊게 읽는, 스데반의 '최후 변론' (3)

  스데반의 최후 변론을 계속 이어서 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과 야곱 이야기, 야곱의 열 두 아들과 요셉 이야기, 그리고 그 야곱 가족이 이집트에 들어갔던 이야기, 그리고 모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 이야기가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을 '정의로운 복수'로 구원하려던 모세는 자신도 그 복수를 당해야 마땅한 사람임을 알게 되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나이 마흔에 이집트를 떠나 떠돌이가 되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조상들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40년이 지난 뒤가 스데반의 최후 변론에 이어집니다.

사도행전 7:30~43, 개인번역


  그리고 40해들이 채워지고
그 산 "시나"의 그 광야에서 떨기나무 불의 불꽃 안에 있는 천사가 
그에게 목격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보고 그 본 것에 경악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관찰하고자(κατανοῆσαι) 앞으로 나가려는데
주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들의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나이 마흔에 떠났던 모세가 팔십이 되었을 때, 그는 여전히 떠돌이로서 이 산 저 산 옮겨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시나"라는 이름의 산에 있었을 때, 그는 산의 낮은 나무 덤불이 '불타고 있는/불타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마치 베드로의 실천이 본인이 한/하지 않은 실천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장면에 경악한 모세가 가까이서 들여다보려고 했더니,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말 소리였습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들의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스데반이 앞에서 언급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기 소개에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이 이뤄지는 것을 기다리다가 죽었던 사람들이고, 바로 하나님 때문에 떠돌이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주겠다고 했던 땅에 도착했을 때도, 하나님은 그 땅을 주지 않으셨고 이들을 떠돌이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이렇게 불러도 될 거에요. 하나님은 "떠돌이들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의 모세도 이집트를 떠났다가 이집트로 돌아가게 되었고, 또 이 "시나"를 떠났다가 다시 "시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온통 떠돌이들, 난민들, 손님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떨리게 되어서 감히 관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 두 발의 그 신발을 풀어라, 

  왜냐하면 네가 서 있던 그 장소, 땅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보면서 내가 알았다, 이집트 에서의 나의 그 씨알의 열악함을,

  그리고 내가 들었다, 그들의 그 한숨을,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들어내고자 걸어 내려갔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너를 이집트 속으로 보낸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거룩한 장소'라고 하면 '성전'을 떠올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즉 나무 덤불이 우거져있던 이 황량한 산이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모세는 보냄을 받습니다. 바로 모세가 살고 있던 이집트로 말입니다. 

  그가 보냄받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그 이집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알고있고, 또 그들의 한숨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확인했던 것처럼,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가 등극하여, 이스라엘을 손님이 아닌 적 취급하며 자신들을 공격할까 노예로 삼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살고 있던 상황은 무척 열악하여, 그들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신 400년이 지났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빼내오실 작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집트로 걸어 내려가실 것이고, 모세도 하나님과 함께 이집트에 당도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만큼은 가장 하기 싫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동족들에게는 배신을 당했고, 게다가 이집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것처럼, 자신도 폭력을 당할까 두려웠을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세는 다시 이집트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과 함께.

  그런데 그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에 주목해보세요.


  바로 이 모세를, 그들이 부인하며
"누가 너를 지도자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라고 말했으나,
바로 그를 하나님께서 그 떨기나무 안에서
그에게 목격된 천사의 손과 함께 지도자와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사람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집트 땅 안에서 홍해 바다 안에서와
40해들 동안 그 광야 안에서 기적들과 표적들을 행하며.
이 사람이 모세입니다, 그가 그 이스라엘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예언자를 일으키실 것이다
  너희들 형제들로부터 나 같은.


  모세가 이집트에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부인했습니다. 스데반은 이 짧은 말 속에서 "이 사람이" 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합니다. 그 이 사람, 모세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가 너를 지도자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라고 따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구절은 얄궃게도 모세를 지도자와 재판장으로 세우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부인한 이스라엘은 모세만 부인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한 셈입니다. 


  물론 몰라서 그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내고, 심지어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광야에서 여러 기적들과 표적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럼 좀 달라질까요? 모세는 자신과 같은 예언자가 이스라엘 형제들로부터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모세의 말을 경청한다면, 그런 예언자가 자신들 중에 나타나는지 그렇지 않는지 주목해야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목은 커녕, 이스라엘에 나타난 예언자들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관심, 냉대, 욕, 폭행, 심지어 죽임까지 당했습니다. 이들은 표적을 보고도 모세를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그 광야의 에클레시아 안에서 

그 ("시나" 산에서 그에게 말한) 천사와 

우리의 아버지들과 함께 있어서, 

우리에게 주기 위해 살아있는 법령들(λογια)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우리 아버지들은 경청하는 이들이 되기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거절하고 그들의 가온들 안에서 이집트 속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들이 아론에게 (이렇게) 말하며.


  "당신이 우리에게 우리를 앞장 설(προπορεύσονται) 신들을 만드시오..

  왜냐하면 바로 그 모세, 우리를 이집트 땅으로부터 밖으로 이끈 그에 관해,

  그에게 어떤 것이 되었는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오."


  또 "이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그 광야의 에클레시아 안에서"(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버지들" 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조상들과 함께 있었고,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열심히 지키려고 하는 "살아있는 법령들", 곧 토라를 받은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모세의 말을 "우리 아버지들"은 경청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경청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모세의 말을 거절하고, 마음 속으로 이집트 속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토라를 받으러 올라갔고, 오늘날처럼 휴대폰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또 있다 하더라도 시내산에서 터질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모세에 대한 소식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물론 자신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은 무언가를 결심하고, 그 다음 모세의 형인 아론에게 요구합니다. "우리를 앞장 설 신들을 만드시오" 라고 말입니다. 이때 만든 것이 금송아지입니다. 즉 금송아지는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맘 먹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이끌어줄 신이 필요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이건 신도 아닙니다. 그저 본인들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걸 만드는 사람들의 목적은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충돌질을 하기 위해 신성모독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다른 별개의 신을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금송아지가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낸 바로 그 하나님이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열왕기상 12:28). 그리고 이 금송아지가 바로 출애굽의 하나님이니까, 이 금송아지가 이끄는 곳인 이집트로 이제 돌아가자는 주장을 펴는 것이지요. 아무 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런 줄로 알고 이 사람들을 따라 금송아지에 절하고, 이집트로 가자는 데 한 목소리를 냈을 것입니다. 그러니 금송아지는 기만 정책이고, 속임수입니다.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벌인.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 날들에 송아지제작했고 

그 우상에게 희생을 위로 이끌었으며,
그들의 손들에 속한 일들 안에서 좋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쁜 일에는 늘 실천이 빠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 날 금송아지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가 뭐라고 그 앞에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자신들 손으로 만든 이 우상과 제의를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좋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좋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넘기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돌아섰고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에 (고용되서) 섬기게 팔아넘기셨습니다,
그 예언자들의 책에 기록된 바와 같이,


  '40해들 동안 너희들이 그 광야에서 희생물들과 제물들을

  나에게 앞으로 가져왔던 적이 없었느냐(μη...προσηνέγκατέ), 이스라엘 집아?'[각주:1]

  그리고 너희들은 그 몰록의 그 장막을 받들었고(ἀνελάβετε)

  그 하나님의 그 별인 롬판, 즉 너희들이 그들에게 

  앞으로 가져오기 위해 만든 그 장소들을 받들었느냐?
  그리고 나는 너희들을 바뷜론 너머로 집 옮길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부터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하늘의 군대"를 섬기도록 팔아넘겨졌습니다. 여기서 "그 하늘의 군대"라는 말에서 "군대(στρατιά, 스트라티아)"는 '군대'도 되고, '별들'도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하늘의 별들을 섬기도록 넘겨집니다. '뭐 별을 섬기는 게 어때서?'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만 못한 별을 섬길 때, 인간은 인간성을 잃어버립니다. 스데반은 아모스라는 예언자의 말을 인용합니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멸망 직전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문서로 보존되기 시작한 최초의 예언서이기도 합니다). 이 예언자가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하길,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희생물들과 제물들을 바친 신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떠나서 이스라엘은 몰록의 장막을 받아들였고, 롬판을 받아들였습니다. 몰록은 어린아이를 제물로 받는 끔찍한 신이고, 롬판은 토성을 가리키는 이집트의 신입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모두 하나님을 배신한 결과였고, 그 우상숭배의 결과는 비인간화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무치는 기억인 바벨론 포로기 역시, 그 우상숭배의 결과였습니다. 단순히 바벨론이란 나의 포로가 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벨론 넘어서" 그들의 인격은 하나님을 반영할 수 없도록 변질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듯, 스데반의 최후 변론 속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민족 이스라엘의 정체가 폭로됩니다. 떠돌이들의 후손 이스라엘은 모세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거절하며, 스스로 포로기에 빠지도록 우상숭배를 멈추지 않았던 비인간화를 대표하는 민족임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던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을 돌로 치려는 자들의 아버지들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들은 어떠할까요? 아버지들의 잘못을 바로 세울 수 있을까요?

  1. μὴ σφάγια καὶ θυσίας προσηνέγκατέ μοι, οἶκος ᾿Ισραήλ; LXX인용. 이 구절을 어찌 이해해야할까?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저자(김근주)는 제사를 안드린 것은 아니지만,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쓸 수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예레미야 2:2, 7:22,23을 근거로 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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