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도행전 : 누구의 실천(行)인가?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이란 책에 대해서 배울 거에요. 성경은 작은 육십 여섯 개의 책들을 묶어놓은 큰 책이에요. 어른들 성경책에 <성경전서>라고 써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거에요. 작은 육십 여섯개의 책들 전체가 모인 책이란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성경은 대략 40여명의 사람들이 약 1000년 정도에 걸쳐서 기록한 책들을 모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육십 여섯 개의 책 중에서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이라는 제목이 보여주듯, 사도들이 무엇을 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어요. 정작 사도행전에 주로 나오는 사도는 둘 뿐입니다. 베드로, 바울. 예수님의 사도는 열 두 명인데, 다른 사도들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는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인데 사도들에 대해서 말이 없다니 이상한 책 아닙니까?


  이 사도행전의 영어 이름을 소개해드립니다. A.C.T.S. 입니다. 액츠. "실천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희랍어로도 πραξις, '실천'입니다.) 그럼 누구의 실천일까요? 이게 참 이상한 실천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다루는 실천은 사도들이 했지만, 사도들이 하지 않은 실천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겠지만, 베드로를 생각해보세요.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성전 아름다운 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킵니다. 베드로에게 만일 '와, 당신 대단하네요. 어떻게 그 사람을 고칠 수 있었나요?' 라고 묻는다면, 베드로는 '네, 제가 정말 잘했죠?' 라고 말하지 않을 거에요. 게다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이 있기 불과 두어 달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신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신했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처럼 병든 사람을 고쳤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실천입니까? 베드로의 실천입니까? 베드로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실천이 아닙니다.


  이 베드로의 실천이면서도 베드로의 실천이 아닌 이 이상한 실천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나요? 여러분이 했지만, 여러분이 한 것이라 할 수 없는 실천 말입니다. 만일 내 친구가 불타는 집에 갇혀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내가 그 불타는 집에 들어가서, 그 친구를 용감하게 꺼내왔습니다.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와서 묻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기셨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럼 여러분은 뭐라고 말할 건가요? 그때 아마도 상상할 수 있는 건,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니다. 그때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서 '네, 제가 그런 용기가 났네요. 저는 참 멋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 거에요.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고 칩시다. 이렇게요.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베드로의 실천은 이런 것과는 좀 다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좋은 일을 하고도 전혀 부끄러워하는 연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당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오히려 베드로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럼 베드로의 말을 직접 들어볼까요?


사도행전 4:8~10, 새번역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누구의 힘으로 그를 낫게 했느냐?"는 질문에 베드로는 당연한듯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2. 나의 할 수 없음에서부터


  그런데 저는 이 말이 너무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보고서, 그 사람에게 턱턱 걸어갈 용기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못 일어나면 어떡해요? 얼마나 어색한 장면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라고 외치면서 손에 힘을 주었는데, 그 사람이 다시 털썩 주저앉는 장면이 말입니다. 그리고 일어나도 문제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정말 일어났고, 그 장면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고 있을 때, 저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이라 말하기는 커녕, 누구보다도 가장 놀라서 그 자리에 벌벌 떨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솔직한 제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나면, 그 다음에야 비로소 상상해볼 수는 있습니다. 내가 이전의 내 모습과 달리 행동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손 내밀고, 그 사람을 일으켜주고, 그 다음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 일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된 것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내 모습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에 없는 상상입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여러분들은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제가 그렇게 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일 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은 어떤 이름이었을까요?


3. 나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의 이름, 예수

  저는 사도행전에서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베드로를 보며, 부활하시고 나서 세 번째로 자기 자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던 예수님이 떠올랐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침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베드로는 예수님이 지어준 반석이라는 별명이고, 이게 베드로의 본명입니다), 네가 나를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네. 주님께서 아시잖아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어린 양 떼를 먹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내가 배신했던 분이 다시금 살아서 돌아오시더니, 사랑하느냐고 묻고 또 예수님의 사람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이 부담스러운 질문을 베드로에게 던지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대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돌아오는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 양 떼를 이끌어라" 

  여기서 분위기 좋게 대화가 끝날만도 한데, 예수님은 "한 번 더" 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불안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자꾸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니, 이것은 필경 예수님은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그런 불안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그 예수님이 내 사랑을 의심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몰라선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나서 베드로는 상상속으로 셀 수 없을만큼 그 시간, 그 장소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6:69
베드로가 안뜰 바깥쪽에 앉아 있었는데, 한 하녀가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네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그 어린 하녀의 말이 베드로의 귓전을 떠나질 않습니다.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네요." 저 말에 베드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손사래쳤던 바로 그 날 말입니다. 베드로가 되고 싶은 베드로는, 예수를 배신하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는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꾸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확실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자신이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배신으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다급하게 베드로는 다시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자, 비로소 예수님은 베드로가 어떻게 죽임당할 것인지 말씀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할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남들에 의해 살해당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그 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더 이상 배신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 이상 배신하고 싶지 않다면, 사랑만 하는 길이 남습니다. 베드로는 그 길만을 걷고 싶었습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이, '너는 이렇게 죽을거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너는 이렇게 죽고, 나 처럼 살아날거야' 아니겠습니까? 죽어도 죽지 않은 사람 앞에서, 베드로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데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는 그런 이름입니다. 그냥 써먹으면 마법과 같은 효과가 나오는 주문같은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는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의 이름. 내가 확실하게 소리칠 때까지 계속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그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내 속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려고 작정하신 분의 이름. 베드로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분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4. 그 이름 안에서 불가능한 가능성


  오는시대의 좁은 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현주소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지만 믿지 않고, 우리는 가끔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조금도 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나에게 좋고, 나에게 편하고, 내가 대장인 것만 좋은 사람일 뿐입니다. 이점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제대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는 나'. 그러는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러지 않는 나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제 자꾸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을 내가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계속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가슴이 휑하니 구멍이 난 것 같고 몹시 슬펐습니다. 미워하지 않는 내가 무척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알게 된 것은, 내가 남을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남을 미워하지 않는 나를 바라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비로소 잘못되지 않은 나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라는 것만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이름이 필요합니다. 그 이름의 주인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이 우리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우리에게, 우리가 배신한 횟수만큼 속에서 불편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은 '나를 사랑한다는 놈이 그 따위로 사냐?'가 아닙니다. 이건 오해에요. 그분이 바라는 것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배신을 인정하고, 더 이상 배신하는 나로 살고 싶지 않아서, 그저 소리치는 일입니다. 예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거기서부터, 바로 거기서부터 우리가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는 우리를 죽음으로 초청할 것이고, 우리는 그 길을 생명길로 알고서 담담히 걸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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