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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1:1~6

  1) 나의 다소 어리석음을 여러분이 좀 버텨주길 바랍니다. 오히려 나를 버티십시오! 2)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여러분에게 열심내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여러분을 한 남자에게 알지 못하는 처녀로 메시아 곁에 세웠습니다.


  바울이 전과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말로 어제 풀이를 마쳤습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줄 바울의 새로운 전략은, '어리석은 이들에 맞서 어리석음은 방식으로 말하기'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리석은 방식으로 말해볼테니 좀 버텨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일단 평이하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등장했습니다. '열심(ζηλος)'은 우상을 소멸하는 불, 그 불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는 메시아의 형상, 바로 그 메시아에게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중매했습니다. 코린토스 인들도 불 속에서 소멸되지 않는 새창조의 형상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3) 그런데 나는 뱀이 하와를 그의 모든 노력으로 하와를 완전히 속인 것같이, 여러분의 앎들도 메시아에게로의 꼬이지 않음에서 떨어져 망쳐 버리진 않을까 두렵습니다. 4) 왜냐하면 만일 한편으로 온 사람이 다른 예수를 전한다면, (우리가 전하지 않은), 여러분들은 이질적인 숨결을 받았거나, (여러분이 받지 않았던) 이질적인 복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도) 온전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 뱀이 등장했습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을 유혹하던, 사랑하는 관계를 깨뜨리는 모든 부정적인 힘, 간통 유발자입니다. 이 뱀이 한 번 던져본 말에 하와가 넘어간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의 형상에서부터 사람들을 떨어지게 하는데, 이 뱀은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죄의 속성인 자가당착적인 속성, 즉 완전한 속임은 누군가의 불타는 성실과 노력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뱀이 그토록 성실합니다. 그 성실의 결과는 메시아에 이르는 '꼬이지 않음'에서 벗어나게 해서, 결국 사람을 망치기 위함입니다.

  이 '꼬이지 않음'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전 편지인 8장과 9장에서 이미 언급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2
왜냐하면 즉 많은 어려움의 입증 속에서
                                        (A) 그들에게 속한 그 기쁨의 넘침과
                                        (B) 깊음을 따라 (있는) 그들에게 속한 가난이
                                        (C) 그들에게 속한 '꼬이지 않음'의 풍성함에 이르도록 넘쳤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9:11,12
모든 면에서 모든 꼬이지 않음을 향해 흘러넘치게 사는 이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공적 업무의 섬김이 그 거룩한 이들의 모자람들을 흘러넘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흘러넘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꼬이지 않음'을 말하면서, 바울은 이사야 55장의 비를 순환시키시는 하나님이 에클레시아들 안에서 연보 프로젝트를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즉 꼬이지 않음은 하나님께 감사로 돌아가는, 모든 순환 과정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에클레시아를 돕는 부유한 에클레시아의 섬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섬김에 참여하는 것이 메시아의 형상을 닮는 일이고, 남편과의 사랑의 관계를 온세계에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반대자들은 이 일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운 생각과 이론은 '살몸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예수를 부정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문에 "다른 에수"가 언급되어있지만,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예수를 부정한 적은 없습니다. 본문의 "다른 예수"는 바울의 대적자에 의해 오해된 예수, 잘못 해석된 예수입니다. 예수를 잘못 이해하고 나니, 하나님의 숨결이 아닌, "이질적인 숨결"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이 공적 삶이 전하는 소식은 바울일행이 전한 복음이 아니라, "이질적인 복음"이 됩니다. 이렇게 문제가 꼬여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뱀의 모든 노력을 기울인 노력은 그들을 자가당착에 빠뜨려 놓았습니다. 바울이 이를 비꼬며 말합니다.

  "여러분이 잘도 온전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비아냥은 어리석은 표현 방식이지만, 좀 버텨보시기 바랍니다. 비꼬아서라도 전달하고픈 의미가 있습니다.

5) 즉 나는 내가 저 대단히 위대하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다고 산정합니다. 6) 그런데 만일 내가 말로는 능숙하지도 못하다해도, 오히려 깨달음으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모든 면에서 모두 안에서 여러분에게로 나는 드러나 있습니다.


  뱀의 수족이 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저 대단히 위대하다는 사도들". 바울이 앞에서 했던 말을 가지고 유추하자면, 저 "대단히 위대함"은 "대단히 위대하다는 사도들"이 자신들에게 스스로 내린 평가일 것입니다. 뻔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려고 합니다. 물론 바울의 말은 그들의 표현대로 "별 시덥지 않습니다(10:10)." 그러나 깨달음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깨달음"을 줄곧 성령과 연결시켰습니다. 바울은 성령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그들을 맞설 생각입니니다. 빛나는 깨달음은 어눌한 말마저도 무색하게 만들만큼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음과 함께 바울이 내놓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끊임없이 넘겨지는 자신의 삶입니다. 바울은 이 삶에 대해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속인 적이 없고, 이것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증거가 곧 자기 자신인 사람, 바울은 증인입니다. 이것은 다시 스스로를 추천하는 대적자들과 같은 입장으로 떨어진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1:1~6

  1) 나의 다소 어리석음을 여러분이 좀 버텨주길 바랍니다. 오히려 나를 버티십시오! 2)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여러분에게 열심내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여러분을 한 남자에게 알지 못하는 처녀로 메시아 곁에 세웠습니다. 3) 그런데 나는 뱀이 하와를 그의 모든 노력으로 하와를 완전히 속인 것같이, 여러분의 앎들도 메시아에게로의 꼬이지 않음에서 떨어져 망쳐 버리진 않을까 두렵습니다. 4) 왜냐하면 만일 한편으로 온 사람이 다른 예수를 전한다면, (우리가 전하지 않은), 여러분들은 이질적인 숨결을 받았거나, (여러분이 받지 않았던) 이질적인 복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온전하게도 버티고 있습니다. 5) 즉 나는 나를 저 대단히 위대하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다고 산정합니다. 6) 그런데 만일 내가 말로는 능숙하지도 못하다해도, 오히려 깨달음으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모든 면에서 모두 안에서 여러분에게로 나는 드러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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