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기억된 역사

-다니엘7, 이사야 40~66, 스가랴 6~14


 

0. "구출의 역사"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을, 우리는 하나의 그림에 압축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성서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이야기,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배웠던 것입니다. 다음의 키워드를 가지고 다시 요약해봅시다.

 

시작된 역사 :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다스림, 인간,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인간-세계]


깨어진 역사 : [타락, 바벨탑, 물질주의, 이름, 거절된 창조주의 뜻, 두려움, 자랑, ,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 아담과 하와, 죽음, (Anti-creation), ]


구속의 역사 : [아브라함, 부르심, 언약, 출애굽, 악한 압제자, 우상, 선택된 지도자, 하나님의 승리, 희생을 통한 구속, 유월절, 새로운 사명과 생활방식, 하나님의 임재, 약속된 유업의 땅]

 


  이스라엘 백성은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에 당도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땅을 차지하고도 이민족과의 지리한 정복 전쟁을 계속 벌여나가야 했습니다.(정복 전쟁이 완전히 끝나는 것은 다윗 때에 이르러서 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에서 전쟁이 그치고,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부터 시작되었던 장구한 역사, 마침내 그들은 그 땅을 얻었고, 아브라함 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처소가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 장엄하게 서있습니다. 아무 것 문제가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잊지 말아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부름을 받았습니까? 그저, 아브라함 한 사람이 잘 되고, 땅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까? 역사의 그림은 더 큰 캔버스 위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음의 질문을 던지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악의 문제는 해결되었는가?'



1. 포로가 된 언약 백성

1) 언약백성의 상황

2) A,B,P,Ms,R


2. 그들의 갈망

1) 멸망받을 압제자는 누구인가?

2) 선택된 지도자는 누구인가?

3) 하나님의 승리

4) 난해한 본문, 이사야 53장

5) 율법의 탁월함이 드러날 것이다.

6) 성전도 새롭게 하실 것이다.

7) 약속의 땅이 회복될 것이다!


3. 포로귀환이다. 어?

-그런데 아직 진정한 출애굽은 일어나지 않았어!




1. 포로가 된 언약 백성

 

1) 언약백성의 상황


  모든 것이 문제 없어보이는 그 시점,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스라엘 내부를 서서히 좀먹고 있었습니다.

이미 가나안 땅을 차지했던 그 시작부터 뭔가 위태위태 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닌, 자기들 안에서 왕을 뽑기로 한 사사기. 이후 하나님의 기름 부음받은 왕이지만, 반평생을 도망자로 살아야 했던 다윗의 이야기. 세계 최고의 무기 거래상이자, 세력 확장을 위해서 정략결혼을 일삼았던 솔로몬.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윗이 다스렸던 잠시를 빼놓고는, 계속 삐그덕 거렸습니다.


  삐그덕 거리는 원인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것들입니다. 하나님 대신 물질을 붙잡는 것,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 그 결과 인간에게서 다시 한 번 거절된 하나님 뜻. 이것은 바벨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하셨습니다. 즉,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반전으로서 이스라엘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원투수와 같습니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원투수, 이스라엘. 그러나 그 언약이 무색하게, 언약의 대상자들의 제구력은 형편없습니다. 그들은 던졌다 하면 홈런을 맞습니다.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그 문제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빛을 비출 등대로 부름을 받았으나,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이후, 남과 북으로 찢어집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집니다. 이 갈라진 나라는 서로를 미워하다가, 결국 제국들의 이빨에 하나 둘씩 분쇄됩니다. 먼저는 북이스라엘이 철기문명의 앗시리아에게 멸망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10지파는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나중에 돌아오는 앗시리아 포로들이 사마리아인들입니다) 그리고 남은 두 지파(베냐민과 유다)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보여주던 성전도 이 때 박살납니다. 그리고 땅을 잃어버린 그 언약의 민족은 전 세계로 뿔뿔히 흩어집니다. 이 흩어진 유대인들을 가리켜,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땅을 잃어버렸다고, 그들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고집스럽게 자신들을 지켜나갔습니다. 이방 지역에서도 율법을 지켜가며, 땅을 되찾을 날을 갈망했습니다. 자신들의 역사를 다시 되짚어보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예언들을 통해 미래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기나긴 포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2) A,B,P,Ms,R



   이스라엘은 포로로 비참한 삶을 사는 동안, 이방의 제국들은 점점 그 세력의 크기를 더해갑니다. 이 부분이 단군신화와 다르게,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가 세계사와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날조된 신화가 아닙니다. 역사 입니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세계역사는 큰 나라를 중심으로 기록됩니다. 그래서 세계사 교과서를 펴보면, 이스라엘 역사가 한 쪽 귀퉁이에 있거나, 없는 책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도 마찬가지로 세계사 안에서는 그저 중요하지 않은 변방의 역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큰 나라가 아니라 포로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포로의 역사는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요? 큰 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삶은 중요한 역사가 아닌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계사의 한계입니다. 세계사는 정작 포로들의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선사와 이스라엘 역사는 다릅니다. 처참한 포로의 역사, 비참한 패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전쟁에 이기고, 이렇게 해야 발전한다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 인간이 붙잡으려했던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제국에는 흥망성쇠가 있습니다. 영원한 제국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국을 중심으로 쓰인 역사를 보면 허무하기 그지 없습니다. 결론은 언제나 "잘나가다가 망하더라"입니다. 그래서 포로의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망했지만, 이것을 붙잡더라" 가 결론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국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땅이 없었던 민족의 역사, 힘이 없었던 민족의 역사, 고난에 사무쳤던 민족들의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이스라엘과 동시대를 살았던 제국들의 역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국들은 마치 태풍과 같습니다. 8,9월이 되면 갑자기 세력이 커져서 북상하나, 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함께 이내 사라지듯, 제국도 흥망성쇠가 있습니다. 먼저는 앗시리아가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그들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영원할 것같았던 그들의 힘은 이후 나타난 새로운 태풍인 바벨론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바벨론은 남유다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성전을 박살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귀족들을 모두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그렇게 끌려간 포로중에 '에스겔'이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막강했던 바벨론도 영원하지 못하고, 이후 그리스가, 페르시아가,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가 나타났습니다. 알렉산더 이후, 거대한 마케도니아 제국은 세 개로 분할되었고, 이스라엘은 그 중 한 나라인 시리아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시리아의 태풍도 지나가고, 이제는 로마가 시대의 패권을 쥔 새로운 태풍으로 역사에 나타났습니다. 지금 그 태풍은 남아 있습니까?  제국은 흥망성쇠가 있습니다. 


  그러나 줄곧 포로였던 민족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제국의 흥망성쇠 속에서 이스라엘은, 계속 포로였습니다.  생각을 해봅시다. '창조주의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면치 못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견딜 수 없는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현실이기도 했습니다. 


 

  2. 그들의 갈망

 

포로기를 겪는 유대인들, 땅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날마다 수치를 느꼈습니다. '언약 백성이 포로라니!' 그렇다면, 포로기의 이스라엘은 무엇을 갈망하며 살았을까요? 이것이 포로기에 쓰였던 성경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질문입니다. 


기나긴 포로기를 겪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갈망했을까요? 비참한 포로생활 속에서도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어떠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사는,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 대한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가, 그들을 버티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악한 압제자가 언약 백성 위에 군림해 있는 이야기. 

선택된 지도자가 등장하는 이야기.

하나님이 그 악한 지도자를 파멸시키시고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주시는 이야기. 

그렇게 언약 백성들이 구출되는 이야기. 

지금 땅을 잃어버린 자신들이 붙잡고 있는 새로운 사명과 생활방식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이 그 언약백성과 함께 하심이 너무도 분명했던 이야기.

지금 자신들이 잃어버린 그 땅을 처음 얻었던 이야기.


바로 출애굽, 구속의 역사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실제로 겪었던 역사였고, 
현재 포로인 그들이 갈망하는 역사였고,
현실의 상황들을 해석하게 하는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포로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출애굽의 역사를 그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출애굽이라는 안경을 얻었으니, 비록 오래 전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면, 포로기 시절 쓰였던 성경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하나 출애굽의 요소들을 떠올리며, 포로기를 사는 이스라엘의 마음을 함께 읽어내려 갑시다.

 

1) 멸망받을 악한 압제자는 누구인가?


  만약 출애굽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것이 분명하다면, 지금 누가 파라오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물음이 됩니다. 포로기의 이스라엘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당시 포로기의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새로운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다니엘이라는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가 이스라엘을 짓밟던 시절의 사람입니다. 그가 꿈을 통해서 예언하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다니엘7:1~8

다음은 다니엘이 한 말이다.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동서남북 사방에서, 하늘로부터 바람이 큰 바다에 불어 닥쳤다.

그러자 바다에서 모양이 서로 다르게 생긴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왔다.

첫째 짐승은 사자와 같이 보였으나, 독수리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살펴보고 있는 동안에, 그 날개들이 뽑혔다. 

그 짐승은 몸을 일으키더니, 사람처럼 발을 땅에 디디고 섰는데, 사람의 마음까지 지니고 있었다.

또 살펴보니, 다른 짐승 곧 둘째 짐승은 곰과 같았는데, 뒷발로 서 있었다. 

그 짐승은 갈빗대 세 개를 물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일어나서 고기를 많이 먹어라.'

그 뒤에 내가 또 살펴보고 있는데, 또 다른 짐승이 나왔다. 그것은 표범처럼 생겼으나, 

등에는 새의 날개가 네 개나 있었고, 머리도 네 개나 달려 있었으며, 아주 권위가 있어 보였다.

그 뒤에 내가 밤의 환상을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 넷째 짐승이 나왔다. 

그것은 사납고 무섭게 생겼으며, 힘이 아주 세었다. 

이 짐승은 쇠로 된 큰 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먹이를 잡아 먹고, 으스러뜨리며, 

먹고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아 버렸다. 이 짐승은 앞에서 말한 짐승들과는 달리, 

뿔을 열 개나 달고 있었다.

내가 그 뿔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자니, 다른 작은 뿔 하나가 그 뿔들 사이에서 돋아났다. 

먼저 나온 뿔 가운데서 셋이 새로 돋아난 그 뿔에 밀려서 뿌리째 뽑혔다. 

새로 돋아난 뿔은 사람의 눈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입이 있어서 거만하게 떠들었다.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되었을까요? 그들이 보기에 이 예언은 너무도 분명한 예언이었습니다. 언약 백성인 자신들을 짓밟고 괴롭히는 이방 제국들이 그 네 마리 짐승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공식. 악한 압제자 = 네 마리 짐승 = 이방 제국. 




 

2) 선택된 지도자는 누구인가?


  포로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한 압제자에 맞서는 선택된 지도자가 나타나리라 기대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약하기 때문에 으레 갖는 허망한 기대가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도 점점 증폭되어 갔습니다. 그 예언은, 우리가 방금 살펴보았던 네 마리 짐승 이야기의 뒷 부분입니다.


다니엘 7:9~14

내가 바라보니, 옥좌들이 놓이고, 한 옥좌에 옛적부터 계신 분이 앉으셨는데, 

옷은 눈과 같이 희고, 머리카락은 양 털과 같이 깨끗하였다. 

옥좌에서는 불꽃이 일고, 옥좌의 바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불길이 강물처럼 그에게서 흘러 나왔다. 

수종 드는 사람이 수천이요, 모시고 서 있는 사람이 수만이었다. 

심판이 시작되는데, 책들이 펴져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동안에, 작은 뿔이 크게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살펴보니, 넷째 짐승이 살해되고, 그 시체가 뭉그러져서, 타는 불에 던져졌다.

그리고 그 나머지 짐승들은 그들의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얼마 동안 연장되었다.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옛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배역이 등장합니다. '옛적부터 계신 분'. 이 옛적부터 계신 분은, 바로 창조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땅을 선하게 창조하신 바로 그 분,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그 분, 인간에게 거절당하셨지만, 끝까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분.


  그 옛적부터 계신 분이 나타나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네 마리 짐승들이 살해당하고, 불에 던져지고, 힘을 빼앗겨 목숨만을 부지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또다른 인물이 등장합니다. '인자(The son of man)'. 옛적부터 계신 분은 네 마리 짐승이 가지고 있던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빼앗아, 모두 그 인자에게 이양합니다. 민족과 언어가 바벨에서 갈렸던 모든 민족들이 그 인자에게 나아와 그를 경배하는 장면. 그리고 그 권세와 나라와 영광이 영원하리라는 선언! 


  포로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다니엘의 환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네 마리 짐승이 출애굽 이야기 안에서 악한 압제자의 역할이라면, 선택된 지도자의 역할은 누가 맡는 것일까요? 바로 '인자'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오고, 언약 백성을 구출할 바로 그 선택된 지도자는, 이 다니엘의 예언 속 인자인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 역사의 퍼즐을 맞춰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선택된 지도자가 해야 할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이것 역시 출애굽의 그림 안에서 고민되었습니다. 먼저 그 선택된 지도자가 오면, 자신들이 지금 붙잡고 있는 사명인 율법과 그 율법으로 사는 생활방식이 옳다는 사실을 만방에 드러낼 것입니다. 마치 선지자 처럼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징하는 성전에 대해서 무언가 할 것입니다. 마치 제사장 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약속의 땅을 되찾아 줄 것입니다. 마치 왕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왕, 제사장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머리에 기름을 부어 임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를 가리켜, 히브리 말로, '메시아', 희랍어로는, '크리스토스' 라 부릅니다. 즉, 선택된 지도자=인자=메시아.


  역사의 퍼즐들과 예언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은 선택된 지도자, 메시아를 고대하기 시작합니다.



3) 하나님의 승리







  그 선택된 지도자, 인자, 메시아는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올 것입니다. 문제는, 그 방법입니다. 포로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네 마리 짐승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이방 제국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인자가 오셔서 그들에 대해서 승리하는 방식은 '폭력'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강력한 힘으로 네 마리 짐승인 이방 제국들을 압살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메시아를 통해 자신들에게 돌려주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치 파라오가 망한 것 같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능욕하는 이방 제국 역시 그렇게 망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전혀 다른 방법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레미야는 동족들에게 얻어맞고 왕따를 당하지만 말입니다.

 

예레미야 29:4~10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고,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그들은 단지 나의 이름을 팔아서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보낸 자들이 아니다. 나 주의 말이다.

나 주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빌로니아에서 칠십 년을 다 채우고 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아, 너희를 이 곳으로 다시 데리고 오기로 한 나의 은혜로운 약속을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지금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는 바벨론을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이 예레미야가 말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예언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일본 제국주의 군화발에 짓밟힌 조선 땅에서, "우리 일본이 잘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돌 맞기 딱 좋은 소리였죠.


  어쨌든 나중에 이 하나님의 승리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나눠집니다. 이것은 바로 다음 시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4) 난해한 본문 이사야 53

 






  다니엘서 외에, 포로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말 중요한 본문이 더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이 끝나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현될 것이라는 메시지의 책입니다. 그 중에 한 대목인 이사야 40장입니다. 이것이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읽혀졌을지 생각하며, 읽어봅시다.


이사야 40:1~11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

  

  한 소리가 외친다. "너는 외쳐라." 

그래서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어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거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힘껏 높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 하고 말하여라.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오신다. 

그가 권세를 잡고 친히 다스리실 것이다. 

보아라, 그가 백성에게 주실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 

백성에게 주실 보상을 가지고 오신다.

그는 목자와 같이 그의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들을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며, 

젖을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죽어서 천국간다는 구원이 아닙니다.(성서는 그러한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법정 판결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판결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존재하는 악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 재판장은 악에 눌려 괴로운 삶을 살던 언약 백성들의 손을 들어줍니다. 이것이 구원이 가지고 있는 그림입니다. 즉, 이 땅을 덮고 있는 반창조가 종결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이 땅을 새롭게 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도 이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방 제국이 틀렸다는 사실이 마침내 드러나고, 그 아래서 괴로움에 신음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손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이것이 출애굽의 결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계가 재편되고,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계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구원이었고, 그들은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하고 이사야서를 읽으면, 정말 그렇게 읽힙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넘어갈 수 없는 턱을 만납니다. 그 지점이 이사야서 53장입니다. 


이사야 53장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주님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님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주님께서 세우신 뜻을 그가 이루어 드릴 것이다.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



  고난받는 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사야가 이것을 포로기 때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를 쭉 읽다가 이 지점에 오면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올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은 당시의 난해구절이었습니다. 의미를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이사야 53장이 멸망받을 제국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 해석했으나, 마음이 찝찝한 것은 여전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이 이사야서 53장은 읽을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 하게 하는 본문이었습니다. 



5) 율법의 탁월함이 드러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옛날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조화롭게, 정의롭게, 더불어 살아가도록 주신 공동체의 헌장입니다. 흔히 하는 오해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마치 미국법을 지켜야 미국 사람인 것이 아니라, 미국 사람이어야 미국법을 지키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일에 관한 책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자부심이고, 이 자부심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지켜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이방 민족들은 오히려 그것을 비웃습니다. 그러나 포로기의 이스라엘은 믿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방 제국들을 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이 붙들고 있었던 그 율법이 정말 옳다는 사실도 드러낼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무엇이 옳다 말하실 것인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백성의 율법이 옳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을 이스라엘은 고대했습니다.


이사야 2:2~5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6) 성전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참으로 많은 수난을 겪었습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왔을 때는 박살났고, 페르시아 지배 때 돌아와서 기껏 다시 지은 제2성전은,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해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가 제우스의 신상을 성전 안으로 들여온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연결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상징이기에,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인 사건, 몸서리칠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카비 가문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시리아에 대항해 들고 일어났고, 그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왕조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사실 이스라엘의 힘이 강했다기 보다는, 당시 시리아를 죄어 들어오는 로마에 신경쓰느라, 시리아는 자신들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에 총력을 다하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어찌되었든, 이 사건,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으로 이방 제국을 몰아낸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뇌리에 진하게 각인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고대하던 출애굽의 재연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마카비 혁명이라 부릅니다. 마카비 혁명 속에서, 마카비 형제들은 선택된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시리아는 심판받을 짐승들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약속의 땅을 다시 수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카비 형제들은 능욕당한 성전을 다시 봉헌하기도 했습니다.(지금 출애굽의 순서를 따라 마카비 혁명이 설명되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매년 12월 25일 '하누카'를 기념합니다. 이 하누카가, 마카비 형제들의 성전 봉헌절을 기념하는 일입니다. 즉,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진정한 출애굽이냐 묻는다면, 그들 마저도 고개를 끄덕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잠시 자신들의 왕조를 회복했던 이스라엘든 다시금 로마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메시아가 오면, 성전을 새롭게 할 것이라는 것이 선지자들의 예언이었고, 포로기 이스라엘의 믿음이었습니다.


스가랴 6:12,13

너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만군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을 보아라. 그의 이름은 '새싹'이다. 

그가 제자리에서 새싹처럼 돋아나서, 주의 성전을 지을 것이다.

그가 주의 성전을 지을 것이며, 위엄을 갖추고, 왕좌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다. 

한 제사장이 그 왕좌 곁에 설 것이며, 이 두 사람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함께 일할 것이다.' 

  

   여기서 이 예언을 들은 이스라엘이 새싹을 누구라 읽고, 그가 어떤 일을 할 것을 기대했을지 생각해보면, 답은 자명해집니다. 

   헤롯이 제2 성전을 증축한 일도 가만 생각해보면, 이유가 분명합니다. 로마에게 아첨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받은 헤롯이 왜 성전을 리모델링하는 일에 열심을 냈을까요? 이유는 하나 입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지도자, 메시아라고, 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7) 약속의 땅이 회복될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면 벌어질 최종적인 일. 그것은 바로 지금 빼앗긴, 약속의 땅을 되찾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되었던 땅. 이스라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땅을 다시 얻으려고 했고, 메시아가 오시면 당연히 그 일이 벌어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생각처럼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1926년 벨포어 선언으로, 영국과 미국의 힘을 등에 엎고 팔레스타인 땅을 비집고 들어가 지금의 땅을 차지한 것 역시 이 때문입니다. 그들의 그 땅에 대한 열망은 곧 팔레스타인 땅 내전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들이 잃어버린 땅이 회복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요?


61:1~4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그들은 오래 전에 황폐해진 곳을 쌓으며,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곳도 세울 것이다. 

황폐한 성읍들을 새로 세우며, 대대로 무너진 채로 버려져 있던 곳을 다시 세울 것이다.

 

 




 

 3. 포로 귀환이다! 어? 

-그런데 아직 진정한 출애굽은 일어나지 않았어?



  이스라엘은 페르시아가 통치하던 시기, 포로귀환을 경험했습니다. 그 땅을 차지하게 된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지위가 회복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마카비 혁명도 경험했습니다.


  그 때마다 이스라엘은, 

  에덴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떠나서, 아브라함의 땅으로 돌아오는,

바벨론 포로로 떠나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위대한 이야기가 

마침내 자신들에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열망으로 제2 성전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들에게 새로운 출애굽이 이루어진것인가? 


  아직입니다. 아직입니다.

 











  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였느냐?

누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였느냐?

태초부터 나 주가 거기에 있었고, 끝 날에도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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