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뺨대기는 2주 전에, 빌려서 쓰고 있던 아파트 도서관 공간에서 쫓겨났습니다. 비밀번호가 유출되었나본데, 다른 아이들이 들어가서 놀다가 관리사무소에 민원이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건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거지' 라는 생각에 군소리 하나 없이 그냥 나왔는데, 막상 나와보니, 돈도 없고 마땅한 공간도 없었습니다. 공간의 고마움, 집없는 설움이 뒤범벅된 일주일을 보내며, 여기저기를 다녀보다가, 
적절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간판에는 '갓'이 빠져있다? 아, 우리가 가서 God 얘기하면 되지.


  오목천동 남광 하우스토리 아파트 정문 앞에 있는, '갓 볶은 커피'! 첫째는 조용해서 맘에 들었고, 또 점원 분이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아, 여기 아니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곳에서 '왼뺨대기 + GG 연합 모임' 2번째 시간을 어제(2013년 7월 27일, 금요일) 7부터 9시까지 가졌습니다. 저번 주부터 '이야기로 성서읽기' 를 12주 과정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어제 강의 내용에 대한 요약입니다. 어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친구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공을 들여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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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를 읽기 전에,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어떤 맥락 위에서 성서를 생각하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다원주의(pluralism)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다원주의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회 문화 시간에 다 배운다고...) 그렇다면, 다원주의는 무엇일까요?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두산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회는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권력 엘리트에 의하여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에 의하여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된다고 보는 사상

  아래 내용을 읽어보니, 다원주의는 국가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에 종속되었던 여러 집단들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다들 좋은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권력 엘리트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다원주의 사회인데, 오늘날 다원주의인 이 사회는 그 어느때보다 권력 엘리트들에게 종속된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첫번째 물음은 이것입니다.


1.
이러한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
"성서만이 진리다!", "예수만이 구원자시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 어떻게 들릴까요? 


  D양 왈, '사람들이 안받아들일 것 같다'고, 어제 처음 왔던 K군도 '무식한 소리 하는 것처럼 들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흠, 그럼 우리는 누구인가요? 우리는 사람들이 안받아들일 것 같은 말, 사람들이 무식하다 손가락질하는 말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저 말들을 해왔던 것일까요? 우리가 정말 무식하기 때문에? 맹목적인 신념 때문에? 우리는 다원주의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봅시다. 레슬리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에서 주된 내용을 가져왔습니다.

꼭 읽어보시라!

  먼저 [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남녀 이성'할때 이성이 아니라, reason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성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이 사람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데카르트입니다.

Cogito ergo sum

  데카르트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간지나보이는 말은 사연이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확고부동한 앎의 토대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난로가에 앉아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어요. 그리고 고민했습니다. '정말 확실한 진리는 무엇일까?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토대로 해서 다른 앎들을 쌓아 올리면 될 것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입니다. 즉, 생각하는 동안,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니까, 그 '생각하는 나'를 토대로해서 앎을 쌓아올리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해서, 이성은 앎의 토대가 됩니다.

  이후, 300년간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뉴튼과 칸트가 등장하면서 이성은 더욱더 확고부동한 토대로 여겨집니다. 이 시절이 '계몽주의' 입니다. 즉, 무지몽매한 인간은 이성에 의해 일깨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생각은 이 이성의 토대 위에서 평가를 받는 시대가 됩니다. 바야흐로, 이성의 시대가 막이 오른 것입니다.
렇게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원주의의 사고구조입니다. 모든 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다원주의지만, 그 앞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성을 중심으로 한) 다원주의' 입니다. 그리고 그 이성은 확고부동안 앎의 토대이기 때문에, 신념 A, B, C, D는 이성에 의해서 판단 받습니다. 우리는 일상속에서, "내 생각에는 ~ 같아요" 이런 말을 자주 씁니다. 학생들의 경우에 더욱 그러한데, 이것은 아직 이성에 의해서 검증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신념을 밝힐 때는 이성으로 밝혀지기 전에는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성을 중심으로 한 다원주의에 우리는 말투부터 완전히 녹아 있지요.

  다시 성서 이야기로 돌아와봅시다. 이러한 다원주의 시대 속에서, "성서만이 진리다!" 라고 외치는 것이 어떻게 들릴까요? 이성에 의해서 아직 옳고 그름이 증명되지 않은, 근거 없는 신념이라 여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념을 갖고 사는 것은, 무식하게 들릴 것입니다. 앞서 말했던 D양과 K군의 반응은 그들이 다원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성서 이야기는 이성의 토대 위에서 평가 받는 하나의 신념이라 여겨집니다. 

  게다가, 그다지 좋지 않은 신념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이성의 눈으로 성서를 평가해보니까, 너무 잔인한거에요.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는거에요. 그래서 누군가는 성서를 분해해서 그 안에서 사실과 신념을 나눠보려고 했습니다. 이성을 토대로한 분명한 진리와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죠.(아쉽게도 이러한 연구들이 지난 신학의 주류 방향이었습니다) 또한 어떤 기독인들은 성서를 믿는 신념이 이성적이라는 것을 증명해보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이러나 저러나 결과는 참으로 참혹했습니다. 이성주의자들에게 성서는 튕겨져 나갔고, 어떻게든 이성에 성서를 맞춰보려했던 사람들은 성서를 갈기갈기 쪼개놨고요.


저 초라한 말풍선을 보라!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던 지난 300년간, 이성의 위치는 점점 튼튼해졌습니다. 그리고 성서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사실의 문제'를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이성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게 된 것이죠. '신념의 문제'는 사실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성으로 확인하는 과학적 사실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성서에 대한 믿음은 사실과 관계없는 일종의 신념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성서의 가치를 찾으려 했던 사람들은, 성서를 영적인 지식, 내면의 지식에 대한 책으로 축소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2. 
그럼 이것이 옳습니까?


  그럼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것이 옳습니까? 모든 신념들을 이성이 평가하는 다원주의 사회가 옳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진리를 발견해 왔습니까? 다음의 문제들을 생각해봅시다.

  1) 이성은 확고부동한 앎의 토대인가? 
  2) 만약, 이성이 앎의 토대가 아니라면, 이성은 무엇으로 검증받아야 하는가?

 

1) 이성은 확고부동한 앎의 토대인가?

  정말 그렇습니까?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다 배웠을 것입니다. 이 경우를 통해서 저는 이성의 불완전함 이야기하려 합니다.

  에덤 스미스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합니다. 에덤 스미스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구매할 때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합리적인 결정이 모이고 모여서 적정 가격이 결정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 부른 것이죠.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인간은 합리적으로만 생각합니까? 고도 비만 환자는 자신이 초콜렛을 먹지 말아야 함에도, 손에 초콜렛을 이미 들고 있습니다. 폐암 말기면서 담배를 끊지 않는 아저씨를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에덤 스미스의 논조에는 충격적인 구멍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가격 결정에 있어서, 정부개입을 이야기하는 케인즈 주의가 만들어 졌습니다. 가격을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에 맡겨둘 수 없다는 것이죠. 최근에는 고전 경제학의 프레임을 넘어서 행동 경제학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 돌아가지 않아도 각자 자신의 경우를 돌아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여러분의 생각과 선택은 어떠했습니까? 인간 이성은 그 자체로 확고부동한 앎의 토대가 아닙니다. 그렇게 착각할 수는 있을지언정.

  전지구적인 착각. 이성이 앎의 최종 심판자라는 착각이 우리 삶에 많은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과학적 사실 아닌 모든 것들은 기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저 신념이라 여겨졌습니다. 이성에 의해 검증받아야 하는데, 이 세상에는 이성에 의해 검증되지 않는 일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의 토대 위에서 확실한 것 아니면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착각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는 사실과 신념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어떤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야기하면서, 당신 이야기 속에서 사실과 신념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습니까? 아니, 어제 K군에게 물었던 것을, 당신에게도 물읍시다. 당신의 삶이 목적은 무엇이가요? 왜 살고 있나요? 그건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이것이 이성을 통한 과학적 사실로 얻어낼 수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들은,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답해주지 않는 것들입니다.


2) 만약, 이성이 앎의 토대가 아니라면,
이성은 무엇으로 검증받아야 하는가?

  이성은 사실의 영역을 밝혀내고, 신념의 영역은 다원주의로 남겨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개념들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실]이라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과 신념을 이성으로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허구입니다. 자신이 어떠한 전통위에 서 있는지가, 그 사람이 어떤 진술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성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성은 자신이 어떤 [전통] 위에 서있는가에 영향을 받습니다. 전통은 이성이 진행되는 방향에 대해서 [권위]를 제공합니다. 즉,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아' 이것의 가장 밑바닥에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은 전통에게 [타당성 구조(plausible structure)]를 제공하죠. 타당성 구조는, '그럴듯한 생각의 구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저는 기독교 [전통]을 가지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기독교는 [권위]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기독교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권장 받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생각하다보면, 그 전통이 [맞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전통이 왜 맞는지, 제가 생각한 바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신념들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당신이 불교에서 태어났다면, 불교 [전통]의 [권위] 위에서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성은 다시 그 전통에 대해서 [타당성 구조]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사실과 신념을 결정하는데 하나의 주요한 관점으로 기능했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어떠한 생각을 받아들이거나 배척할 때는 반드시 전통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성을 맹신하면 안됩니다. 그 이성이 기능하게 하는 토대. 그것은 전통입니다. 그리고 이 다원주의 사회에도 전통이 있습니다.


3.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성서를 읽는 것

  최종적으로 그림을 이렇게 수정하려고 합니다.

  모든 생각에는 그 아래에 전통이 있습니다. 그 전통 위에서 이성의 집을 짓습니다. 당연히 말이 되게끔 짓습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종교든 사상이든, 말이 안되게 쌓은 것은 없습니다. 다 그럴듯 합니다. 그러나 그럴듯하다고 해서 진리는 아니고, 내가 그럴듯해보인다고 진리도 아닙니다. 어떠한 전통 위에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또한 사실과 신념도 칼로 두부 자르듯 나눌 수 없습니다. 그 전통 위에 세워진 타당성 구조에 따라, 받아들이는 생각이 있고, 거부하는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우리의 논의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다원주의입니다. 

  그러나 이 다원주의의 진짜 이름은, '과학 발전의 전통위에 세워진 이성중심의 다원주의' 입니다. 모든 것의 가치를 인정해준다고 하지만, 그것은 고작 사실과 상관없는 신념으로 여겨지는 것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과학에 의해서만 사실의 옳고 그름이 정해지는데, 그렇다면, 권력 엘리트에게서 더더욱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과학을 알고 이용할 수 있는 자들에게 자연히 권력이 모아질테니까요.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에 의해서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것은, 서로 합의 할 수 있는 사실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원주의는 그 기준이 과학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연으로 생긴 세계, 법칙으로 인해 닫힌 세계를 말합니다. 이 과학이 인간의 삶의 목적과, 도덕과 윤리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지금 문제가 단단히 꼬였음을 느끼십니까?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전통입니다. 우리는 이 전통 위에서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성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것들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 결과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자연스러운 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옳은 것은, 우리의 상식과 관습에 대단히 거스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아, 이러한 사회 속에서 성서를 읽습니다. 그 이야기를 믿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결코 무식하거나 부끄러운 일일 수 없습니다. 이것을 무식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성 중심의 과학 전통 위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자신이 서 있는 토대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고 있죠. 저와 똑같습니다.

  성서는 바로 그 점, 전통에 있어서 탁월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전통이냐? 텍스트에 대한 유구한 해석의 전통이 그것입니다. 성서는 역사를 따라 끊임없이 해석되어 왔고, 언제나 그 시대의 전통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기능했습니다. 그 전통 위에 서서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배우는 일은 값진 일입니다. 필요한 일입니다. 의미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목적이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 일,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성서의 전통 위에 서 있다면, 우리에게도 성서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전통을 비추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무수한 성서의 해석 전통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배우려면, 그 배움의 원천을 믿어야 하죠. 선생님을 의심하면서, 그 선생님이 가르치는 바를 배울 수 없고, 문제집을 의심하면서, 그 문제가 가르쳐주는 바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언제나 배움은 자기헌신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성을 절대시하는 이 시대의 전통이,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을 미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의심합니다. 그러나 의심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렸을 때 구구단외울 때, 2x2가 정말 4일까 의심했습니까?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구구단을 배웠는데, 저는 구구단이 옳다고 믿었어요. 그러니까 따지지 않고 배웠겠죠. 그리고 믿고 외운 구구단은 제가 수학적 사고를 하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성서는 당신에게 올바르고, 진실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것을 가르쳐줄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성서의 전통 위에서, 이 시대의 전통이 가지고 있는 허위를 볼 수 있습니다. 믿고, 그 전통 위에 서면, 새로운 사고의 지평이 열립니다. 우리의 전통은 이것을, '하나님의 관점'이라 말합니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서의 전통이, 그것을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려왔습니다.

  따라서, 오늘도 그 전통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하나님께 영광이되고, 사람에게 기쁨이 되는, 성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 이것 때문에 모인거잖아요? 

  

(아, 여기까지 쓰는데 두 시간이 걸렸는데, 이걸 매주 할 수 있을까, 얘들아. 위에 있는 내용은, 제 말처럼 써놨지만, 위에서 언급한,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의 청소년판 요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지리한 글을 읽으시는 것보다 그 책을 읽독 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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