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
뒤집힌 역사
-십자가 고난과 하나님 나라
  
0. 

 오늘은 H 양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하나님의 승리를 위한 인자의 전투방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전투방식은 치유, 용서, 진리로 요약할 수 있었고, 이것은 한편으로는 예수의 메시아 정체성과 관련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이 낯선 어휘들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출생에서 바로 십자가로 점프하지 않고, 그 분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낯선 어휘들을 배우고, 이것을 전달할 방법들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1)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이고, 2)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역할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이며, 이것이 메시아 예수에게 있어서, 사람들을 고치고,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언하며,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이러한 사역의 결과는 '하나님 나라' 입니다. 다시 말해, 악은 소멸되고, 사람이 신원되며, 인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위에 오밀조밀 여러가지 개념들을 뭉쳐서 적어놓은 것이 지난 주에 했던 내용이었습니다. 처음 들으면 갸우뚱할 저 내용들을, 우리는 역사 위에서, 복음서 본문을 통해서 확인했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확인했던 내용들을 토대로, 이스라엘의 소망의 어그러진 그림들을 다시 바로잡는 것이, 우리가 금요일날 마지막으로 했던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H의 질문.

  "아, 왜 치유, 용서, 진리를 출애굽의 재앙 그림에 배치합니까?"

  왜냐하면, 이집트가 받은 열 가지 재앙의 사건을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위에서 정리한 내용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재앙 이야기에서도 1) 메시아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건져낼 메시아, 즉, 모세. 그리고 2) 그 모세는 메시아의 역할들을 수행합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파라오와 맞서고,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과 연결시키며, 파라오에게 진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3) 이러한 모세의 액션에 대한 결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늘로부터 이집트 땅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이 돌입합니다. 그 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열 가지 재앙들이 벌어집니다. 그것으로 이집트의 파라오와 그를 따르던 자들이 파멸되며, 반대로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신원됩니다. 그리고 동족들도 의심하던 모세는 이스라엘의 참 지도자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을 이렇게 표현했던 것이죠.




1. 예수 십자가 처형의 이유
-생존과 평화


  다시 예수, 그 분의 이야기로 돌아옵시다. 그 분은 치유로, 용서로, 진리로, 그렇게 이스라엘 땅을 종횡무진 누비십니다. 그 분은 마치 이스라엘 땅에 떨어진 운석과도 같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존재.(사실 역사의 맥락 위에서 보면 갑자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미 세례요한이 충분한 예고를 했었으니까그 강한 충격에 어두움은 소멸되고, 진리로 인해 밝혀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안개를 걷어내고, 다시 하나님을 봅니다. 그 분을 찬양해야 할 넘치는 이유들을 예수 안에서 발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예수께서 죽임당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오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의 죽음의 이유는 무엇인가?


  다음의 순서를 따라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 십자가 처형의 이유
1)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했던 이유
2) 로마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했던 이유

2. 예수, 그 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1) 이집트의 슈무엘 이야기
2) 예수와 함께 하는 저녁식사

3.  고난과 하나님 나라
1) 마침내 풀린 수수께끼 : 고난을 통해 왕이 된 어린양
2) 십자가 :  악에 대처하는 신의 한 수
3) 고난으로 출범한 하나님 나라(수정중)


1) 이스라엘이 예수를 죽이려했던 이유
-역설의 향연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요 11:47~50)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하나하나 이들의 발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근심가득한 표정으로,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표징'이라 말하는 것은 분명 예수의 '치유와 용서와 진리의 현장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의료사역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안에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에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의미 역시 우리가 이미 확인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출애굽 이야기의 선택된 지도자라 말씀하십니다. 인자 이야기의 인자라 말씀하십니다. 그의 병고침은 출애굽의 현장이었고, 그가 귀신을 쫓아내는 현장은 인자의 승리 장면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유대 지도자들이 우려하는,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다'는 말의 뜻은,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로 여길까봐 걱정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유 뒤에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생존입니다. 이방제국의 위협 앞에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생각했던 존재의 이유는 바로 생존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이방제국들중 끝판 대왕인 로마. 그 로마 앞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에 의해 땅과 민족이 약탈되지 않는 것'이 삶의 기준입니다.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생존이 그들이 바라는 바 입니다. 이스라엘이 혁명을 부르짖었던 이유가 여기에 등장합니다. 살기 위해서. 즉, 로마에 의해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혁명을 해야하고, 그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을 통해 자신들을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적실한 이유입니까? 살기 위해서 오늘을 사는 무수한 사람들과 동일한 이유입니다. 세상의 이빨은 너무 거칠고, 조금만 한 눈팔면 가난과 비천함의 목구멍으로 집어 삼켜지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오늘도 입술을 깨물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 말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기 때문에 특별히 나쁘고 사악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지워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평범함이 있습니다. 생존이라는 평범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평범함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고, 착취하고, 심지어 죽일 수 있는 평범함입니다. 세상의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는 평범함입니다. 언약 백성의 삶이 될 수 없는 평범함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벽을 쌓고, 원수를 감시하는 망대를 오르는 바벨의 사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늘도 생존을 말하고,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우리가 망하지 않으려면, 저들을 없애야 한다고 소리 지릅니다. 너무도 평범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앞에 예수가 있습니다. 예수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출애굽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출애굽은, 살고자 부르짖던 출애굽과는 다르게 아무도 해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살립니다. 가난한 자도, 사람취급 못받던 자도, 이방인도, 심지어 원수조차도 살립니다. 이것은 예수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닌, 인간의 생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출애굽이었습니다. 살기 위한 출애굽이 아닌, 살리는 출애굽. 이것이 유대 지도자들의 불안의 원인이었습니다. 로마에 대항해서 자신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로마에 대해 날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 앞에서 예수의 출애굽은 혁명의 열기를 누그러뜨립니다. 예수를 따르는 민중들은 더이상 로마를 미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라니.

  게다가 예수가 가지고 있는 출애굽의 그림은, 유대 지도자들이 보기에 그야말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사탄의 힘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성전에서만 해야 할 죄용서의 선언을 지붕 뚫린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해버리고, 자신을 인자라 말하는 예수. 그는 성전에서의 제사를 중단시키고, 유대 지도자들의 율법 해석에 토를 다는 불경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 말한 그의 발언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혁명에 대한 소망을 모두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존재자체가 이스라엘 생존에 대한 극심한 위협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정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 이 민족의 생존을 위해, 민족 전체를 위험으로 이끄는 저 거짓 예언자를 무참히 살해하기로 유대 지도자들의 공의회는 결정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지금 포로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포로들에게는 누군가를 죽이고 살릴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포로들이 예수를 죽일 수 있는 기가 막힌 방법.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를 이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로마에 신고합니다. 율법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고 신고해봐야, 율법을 존중하지 않는 로마는 들어주지도 않을테니까, 이스라엘은 로마의 가장 민감한 사안을 가지고 예수를 고발합니다. 다음의 내용으로 말입니다.

눅23:2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카이사르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여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고발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는 로마에 대항하려는 혁명가다' 그 세부 내용들을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이 세부내용들은 온통 역설 투성이입니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출애굽 그림이 아니라, 새로운 그림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대단히 아이러니한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그림은 로마를 악이라 여기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지고 있는 그림은, 로마를 악이라 보지 않습니다. 즉, 로마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의 악한 권세와 대결하는 그림을 가져온 예수에 대해, "우리 백성을 미혹했다"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로마'에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예수를 로마에게 끌고 온 장면에서부터 뭔가 이상합니다. 로마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스라엘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로마에 대항하는 사람을 잡아왔어요" 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로마에 대항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그 고발자들이고, 오히려 예수는 로마에 대항하여 유혈 혁명을 일으킬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저 죄목은, 백성을 혁명에 선동한 그 성전 지도자들의 죄목이어야 마땅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여"
  게다가 그들은 예수를 혁명가의 혐의를 씌워서 로마에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이 사실일 경우, 로마는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을 부과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 살펴본 유다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로마에 세금 반대운동을 벌였다가,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유다와 달랐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지난 주에 확인했습니다. 예수의 혁명은 로마를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그렇다고, 로마의 황제숭배를 인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내용은 뒤에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카이사르에게 세금 내는 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유대 당국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그들과는 달리 예수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에게 죄를 덮어 씌웁니다. 이 자는 혁명가라고. 로마에 대항하고 있다고. 이 자를 십자가에 매달아야 한다고.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자기 자신들을 향하는 죄목들이 아닙니까?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이 메시아 사상을 빼놓고는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갈망하는 출애굽의 그림을 완성시켜줄 인자. 메시아. 
  그들 앞에 메시아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와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메시아를 버립니다. 그리고 카이사르 앞에다가 그를 놓고 말합니다. "얘가 자기가 왕이라고 했어요." 이 말 앞에는 이러한 내용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진정한 왕임에도 불구하고)". 즉, 이 발언 앞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진정한 왕이 카이사르임을 인정해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들의 언약백성 정체성 마저도 완전히 부정해버린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버리고, 사람을 왕 삼자던 사사기의 이스라엘 같이, 그들은 '카이사르가 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앞에, '메시아'를 고발했습니다. 마치 자신들은 메시아와 상관없는 사람들마냥. 마치 자신들은 카이사르만을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인들 마냥.

  이러한 아이러니 속에서, 예수는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로마에 고발되었습니다. 범죄자들이 무고한 자를 법정에 세우는 역설의 향연입니다. 그리고 그 무고한 자는 아무 말없이 범죄자들의 손에 이끌려 이제 로마에게로 갑니다.


2) 로마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했던 이유

  그렇게 로마 앞에선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예수.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을 관리하던 로마 총독, 빌라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유혈 폭동을 일으킬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로마에 대항하는 위험 요소가 아니라는 것.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의 처형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께름찍한 마음에 자신은 손을 씻고, 뒤로 물러설뿐입니다. 왜 였을까요?

  바로 평화 때문입니다. 어? 평화 때문에 예수를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세계는 카이사르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카이사르를 신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가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 이전, 세계가 로마에 의해 정복되기 이전에는, 이런 저런 국가와 분파들로 나뉘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고, 사람들은 죽고 죽이는 나날속에서 깊은 상처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나라와 나라가 생존을 위해서 서로를 죽이는 각축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진정으로 평화를 원했습니다. 전쟁이 그치길 원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카이사르라는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강력한 군대들을 이끌고, 가는 족족 로마의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무수한 이민족들이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고, 그로 인해 로마는 대 제국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강력한 남자 앞에서, 세계는 비로소 평화를 말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 카이사르가 가져오는 평화에 대해서 사람들은 찬양했습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로 인해서 세계는 전쟁을 멈추었느냐?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이민족들과 맞닿는 국경 지역도 넓어졌고, 그 국경에서는 이민족과의 싸움이 그칠줄 몰랐습니다. 본토에서는 젊은 청년들이 끊임없이 전장으로 차출되어야 했고, 전쟁터 나간 아들, 아버지를 기다리는 부녀자들의 걱정은 그칠줄 몰랐습니다. 안으로는 혁명을 일으켜 로마의 평화에 균열을 내려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라면, 카이사르라면.

  팍스 로마나를 위해서는 밖으로는 군사력을 더욱더 증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으로는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강력한 제제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본래 로마가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 지도자게 주는,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누군가 말하길, 십자가를 목에 달고 다니는 것은, 당시에는 전기의자를 목걸이를 목에 달고 다니는 것과 같았을 것이라고 그럽디다) 이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로마에게 덤비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마에게 대항했다가는 이 꼴난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그 제국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 강력한 제국이 꿈꾸는 평화의 이면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로마에 대항하는 자들이 끔찍하게 죽어나갔고,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로마의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마치 싸움 잘하는 일진 아이 때문에, 그 반 아니들이 쉬쉬하며 서로 싸우지 않는 꼴처럼 말입니다.

  빌라도는 이 평화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카이사르 앞에서 감히 자신이 왕이라 말하는 이 예수에 대해서 어떠한 조치를 내려야 했습니다. 또한 만약 이 예수를 죽이지 않았을 경우 벌어질, 이스라엘 사람들의 난동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유혈 폭동을 일으킬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로마에 대항하는 위험 요소가 아니라는 것. 

  머뭇거리는 빌라도를 향해 유대 지도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이 사람을 놓아 준다면 당신은 카이사르의 벗이 아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합니다. 로마의 평화를 위해서. 그가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로마의 평화를 위해서 그를 처형합니다. 그 평화는 누군가의 피를 부르는 평화, 사람들이 나라 안과 밖으로 무고하게 계속 죽임당해야 얻을 수 있는 평화. 그 평화 때문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수락합니다.



2. 예수, 그 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렇다면, 유대 지도자들에게 고발되고, 로마 당국자에 의해 처형된 예수, 그 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분명한 진술은, 그가 마치 그렇게 되기 위해 오신 분처럼, 아무런 저항없이 그 부당한 처형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의도를 알기 위해, 십자가 처형 전날 밤에 일어난 사건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만약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면, 죽기 전날의 밤은, 그것을 밝히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날은 사람들이 잔치로 바쁜 유월절 전 날이었습니다. 


1) 이집트의 슈무엘 이야기

  이집트에 '슈무엘'이라는 청년이 살았습니다. 이 청년은 아주 키도 크고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슈무엘은 이집트의 노예입니다. 지금 슈무엘의 민족 전체가 이집트에서 중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슈무엘은 인생을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파라오의 곡식창고 짓는 일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하루에 200개씩 흙벽돌을 구워내면서도, 이게 원래 내 운명이겠거니 하면서 불평없이 매일매일 가마 앞에서 분주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슈무엘이 일하다 잠깐 쉬려고 허리를 피면 나일강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나일강은 주기적으로 범람하여, 그 주변의 농토를 풍성하게 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슈무엘이 보기에, 나일강에 사는 하피신 때문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그렇게 배웠거든요. 게다가 그 나일강의 신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잘되게 섬기는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슈무엘은 나일강을 볼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아 나일강도 파라오를 섬기는구나. 내가 파라오를 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네' 
  
  나일강 뿐만 아니었습니다. 어느날 슈무엘은 흙벽돌을 만들기 위해 짚을 구하러 나갔다가, 짚단 사이에서 뛰노는 개구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자기 백성들에게 개구리는 영원히 사는 영물이라 가르쳤습니다. 슈무엘도 당연히, 영물인 개구리를 보고 꾸벅 절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사는 개구리신이 섬기는 파라오에게 더욱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파라오가 가르쳐준 이야기를 믿는 슈무엘. 그 슈무엘이 보는 모든 세상은 다 파라오를 섬기는 파라오의 세상이었습니다. 파리도. 흙도. 하늘도. 메뚜기로부터 보호받는 풍족한 양식들도. 그리고 파라오의 분신인 태양의 자손, 태양의 아들, 호로스 신의 분신인 파라오의 맏아들을 볼 때면 그는 경외에 휩싸였습니다. 신의 자손이 다스리는 이집트. 슈무엘은 바로 그 이집트의 노예입니다.

  그러던 슈무엘에게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모세라는 사람이 이집트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 살인을 저지르고 파라오가 무서워 도망친 현상수배자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니, 하나님을 따라서 이집트를 떠나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슈무엘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연만물들이 다 파라오를 섬기고 있는데, 이 강력한 왕을 떠나 우리가 어떻게 살아?' 그리고는 못들은 척 다시 벽돌 굽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를 풍성하게 해주던 나일강이 어느날 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리고 영물이라 생각했던 개구리는 찬장에도, 책장에도 나타나 온 나라의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이집트를 덮고 있는 하늘은 사람 주먹만한 우박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메뚜기가 지나간 자리, 먹을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태양신은 어디있는 것인지, 이집트는 암흑으로 캄캄하기만 했습니다. 

  슈무엘이 그간 믿고 있는 것들이 하나하나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 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그 지시에 따랐습니다. 물론 우리의 슈무엘도 그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먼저 슈무엘은 가족들을 다 한 자리에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집에서 기르던 어린 양을 잡았습니다. 그 양은 슈무엘이 어미의 태에서 부터 받아서 아들처럼 기르던 양이었습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그 어린양의 몸에 칼을 꽃았습니다. 그 양은 물과 피를 다 쏟았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슈무엘은 쏟아지는 피를 받아, 집 문설주에 고루 발랐습니다. 그리고 그 고기를 시뻘건 불에 구워다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었습니다. 혀 끝이 아려오는 쓰디쓴 나물과 누룩을 넣지 않는 납짝한 빵도 함께 먹었습니다. 고기집에서 먹듯 느긋하게 먹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따라, 어디 막 나갈 사람처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이집트에서의 마지막 밤이 되었습니다. 자칭 세상의 왕이라던 파라오의 아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발견되었습니다. 메뚜기와 우박에 쓸린, 폐허가 된 땅위에  모든 병력을 바다에 쳐박은 파라오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포로생활이 종결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슈무엘은 이제 벽돌 굽기가 아닌, 자신이 걸어야 할 진짜 길,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아름다운 땅을 향해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광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넘어간, 노예에서 자유로 넘어간 이 날을 유대인들은 대대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입니다.


2)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슈무엘의 일이 있은 후, 1500여년이 지나고, 이스라엘에 또 다시 그 날 밤이 찾아왔습니다. 슈무엘이 이집트를 탈출했던 그 날 밤 말입니다. 그 날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날입니다. 이스라엘을 옭아매던 세상 왕이 파멸된 날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해방과 자유를 얻은 날입니다. 아름다운 땅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인도를 받은 날입니다. 그리고 이 날은 광야에 첫걸음을 내딛은 날이기도 합니다.

  이 감격스러운 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눅 22: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예수와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가 거의 실행 직전에 와있었습니다. 게다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든든한 우군을 얻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예수의 은신처를 말해주겠다며 제 발로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또다시 역설을 발견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해방을 축하하는 유월절이, 한 사람에게는 해방이 아닌 속박의 날로 코 앞에 찾아왔습니다.

(눅 22:2~6)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애버릴 방책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다.
열둘 가운데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
유다는 떠나가서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여, 그에게 돈을 주겠다고 약조하였다.
유다는 동의하고, 무리가 없을 때에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대제사장이 일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게 하는 일. 이 일을 위해서 한 사람이 자유를 박탈당하는 끔찍한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일을 제자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께서 명하신대로 유월절을 준비합니다. 무엇을 준비하겠습니까? 1) 유대인 대신 목숨을 내어놓은 양고기와 2) 죄를 상징하는 누룩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납짝한 빵과 3) 파라오 밑에서 이스라엘의 고생한 것을 상기시키는 쓰디쓴 나물입니다. 이것을 어디 빨리 가야할 사람처럼, 허리띠를 매고 지팡이를 들고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에 살던 모든 유대인들이, 바로 이 유월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과 자유를 기념하려고 다들 들떠 있습니다. 수많은 양들이 그 날 불에 그을려 살점이 뜯기고, 붉은 피가 모든 유대인들의 집 앞에 칠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어느 다락방에서 유월절 식사를 마주 하고 앉아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지팡이를 짚고. 어디를 막 갈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날 예수의 식탁에는 양고기가 없었습니다.
 
(눅 22:14,15)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예수께서도 이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먹기를 바라고 바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지금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한 작전이 마침내 벌어지는 그러한 밤입니다. 위기 중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그 위기 중에도,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고자 하십니다. 분명 어떤 의도와 목적, 가르침이 있을 것입니다.

(눅 22:19,20)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는 자신을 누구라 생각하셨으며, 예수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셨던 것일까요? 
이 자리에 동석한 제자들은 이 말을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사실 이 날 먹어야 하는 것은 단연 어린양의 살점입니다. 그리고 이 날 보게 되는 것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살점을 먹어야하고, 자신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이 발언으로, 우리는 예수께서 생각하신 출애굽의, 핵심 퍼즐을 얻었습니다.

그는 어린양이십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기대대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그들에게 왕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왕은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왕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제국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폭력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외모로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이 나타난 그 인자는 이방제국이 아니라, 악의 실체와 대면하셨습니다. 그래서 악에 짓눌려 살아가는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구해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했던 메시아에 관한 말씀 그대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역설로 뒤범벅 되어 있는 부당함, 자신을 살해하려는 민족적, 제국적 움직임 앞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같이, 털을 깎이는 암양같이 아무런 반발도 없이, 그렇게 죽임당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자는 유월절의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그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서 벌어지는 일은 무엇입니까?

1) 파라오의 무릎이 꺾입니다. 그가 신이 아니라, 그저 파멸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이 밝혀집니다. 

2) 그 아래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파멸당하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그들이 누구인지를 보증해주었기 떄문입니다. 그들은 악 밑에서 짊어졌던 수고하고 무거운 진짐을 내려놓고, 마침내 자유를 얻습니다.

3) 자유를 얻은 이들이, 약속의 땅을 향해 여행을 떠납니다. 자신들을 구출하신 창조주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과 동행하는 여행. 이집트의 찌꺼기들을 일소하는 여행.

4) 그리고 마침내 약속된 그 땅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이제 어린양 예수로부터, 이 이스라엘의 갈망의 촛점이 맞춰집니다. 새로운 출애굽의 그림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께서는 악에 대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어린양의 죽음으로 가져오는 파라오의 파멸. 그것이 가리키던 실제 역사의 성취.

  이것은 우발적이거나,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예언자의 노래의 울림이 여기에도 공명하기에, 이것이 뜻입니다. 이것이 역사입니다. 수수께끼는 풀리고, 진실이 드러납니다. 


 

3. 고난과 하나님 나라


1) 십자가 : 악에 대처하는 신의 한수





  여기에 로마의 영토에, 로마 황제도 아니면서,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 사람을 무수한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제국에 나타난 진짜 왕의 존재는 제국이 지배가 정당성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람의 존재 자체가 로마의 지배에 대한 균열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대표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던 와중에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죄가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가 어떠한 폭력적인 전쟁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대표인 빌라도는 이 사람을 살려주지 않습니다. 로마 대표 빌라도는 예수를 죽이지 않았을 경우 벌어질, 이스라엘의 폭동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손을 씻고 뒤로 물러날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폭동은 제국의 안정과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기에, 제국의 평화는 한 사람의 죄 없는 생명을 죽음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논리에 따라, 이 사람은 죄가 없지만 죽어야 합니다. 제국의 존립과 안정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악과 로마의 제국적인 악이 한 사람을 죽이는 일에 맞물렸고, 악의 톱니바퀴는 진리를 소멸하기 위해 거친 회전을 시작했습니다.

 

  "진짜 적은 로마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아니었습니다. 우상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내면적 악에 물들어 왕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조차도 아니었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그들은 출애굽이 필요한 사람들이지, 섬멸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하늘의 군대를 불러 모두 멸절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악의 차원들 뒤에는 어떠한 어두움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에덴에서 만났던 뱀, 그리고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를 시험했던 사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사탄은 예수 마저도 덮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전투에서 패한 사탄은, 이제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인자를 무릎꿇리기 위해 무차별적인 공습을 펼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생명소멸의 움직임, 반창조의 움직임이 한 사람을 노리고 골고다로 몰려듭니다.


  그러나 그 왕 역시, 인간이 아닌 그 악 자체에 대한 최후의 반격을 치밀하게 준비하셨습니다.


  그 악에 대한 인자의 방식은 이것이었습니다. 예수 이전에도 십자가 형을 받은 유대 랍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기 전에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홍콩 느와르와 중국 무협 영화가 보여주는 일반적인 모습 아닙니까? 받은대로 되돌려주고, 당한 만큼 갚아주는 복수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수가 멋있게 포장되어도,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일 뿐입니다. 이것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또다른 악을 낳을 뿐입니다. 


  예수는 달랐습니다. 악은 진리이신 그 분을 향해 총공습을 펼쳤으나, 예수는 그 악을 모두 받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조금의 악도 되갚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 없이 죽임을 당하셨으나, 예수는 복수를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로마를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악을 감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으셨습니다. 자신에게 쏟아진 모든 부당함을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 안에서 악은 소멸되어 힘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충격적인 반전입니다. 아담의 타락의 결과들이 뒤집어지는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의 방법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은 선이고, 로마는 파멸되어야 할 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로마가 아니라, 타락이후 인류를 지배한 반창조가 악이며, 로마를 포함한 이방 사람들 역시 파멸의 대상이 아니라, 출애굽이 필요한 사람들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대선이라고 생각했던 율법 역시, 죄 없는 한 사람을 나무 위에 올려놓으므로, 선이 아니었음이 십자가에서 폭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은 그렇게 두부 자르듯 사람과 사람을 나눠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지나가지 않고, 모든 인간을 관통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아니라, 선과 악이 당신의 내면을 관통한다는 것입니다.모든 인간은 그 내면에서부터 속해있는 사회와 국가와 제국에 이르기까지 악에 참여하고 있고, 그러한 인간을 구하는 일은,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는 행동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악은 모든 인간을 볼모로 잡고 있으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악의 포로였습니다. 예수는 이것을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타락 이후 하나님의 세계에 기생하고 있는 거대한 반창조의 권세들을 말입니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저당잡고 있는 그 악의 권세의 사형식이었습니다. 악은 모든 힘을 예수에게 쏟아 부었으나, 예수로 부터 흘러나오는 그 악을 선으로 갚는 능력이 그 모든 악한 것들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악은 선 안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십자가. 이것이 악을 처리하는 창조주의 방식이었습니다. 더불어 세상을 갱신하기를 원하는 당신이 살아가야 할 방식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내면으로부터 거미줄치고 있고, 세상의 구석구석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 악. 그 악에 참여하는 것에서 떠나, 악을 소멸하며 사는 길이, 그 빛나는 길이, 한 사람의 처절한 죽음으로부터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십자가에서 드러났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이러한 것입니다. 악을 대처하는 신의 방법이 마침내 드러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금까지 선의 가면을 쓰고 자행되었던 지금까지의 모든 방법들을 뒤집었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더 큰 폭력을 추구했던 사람들, 정당함을 이유로 타인의 파멸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폭력은 폭력을 낳고 거짓은 거짓을 낳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면에서 발생한 악은 사람의 관계를 타고,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빠르게 물들여갑니다. 악은 선에 기생해야 하기 때문에, 악한 일은 인간에게 기생하지 않고는 그 범위를 확장시킬 수 없습니다. 악은 인간을 통해 또다른 악을 낳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속에서 이러한 경험들을 자주 합니다. 거짓은 거짓을 불러옵니다. 폭력은 폭력을 불러옵니다. 복수는 복수를 불러오고, 살인은 살인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악을 처리하는 신의 방법 안에서 이 악순환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예수를 공격했던 폭력과 거짓은, 그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고, 예수 안에서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악을 깨닫게 하면서도, 악을 처리하는 정말 말 그대로 신의 한수를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주인이 종을 경멸할 때, 손등으로 뺨을 때립니다. 그러나 부정하다고 여겨진 왼손은 사용하지 않고, 오른손등으로 때립니다. 그럼 오른뺨을 맞겠죠. 그런데 그렇게 경멸을 받은 종이 왼뺨을 돌려대는 순간 사태는 미지의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주인은 손을 트위스트 하지 않는 이상 종을 때릴 수가 없게 됩니다. 순간 주인은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왜 왼뺨을 돌려 대는거지? 이 사람은 왜 더 맞으려고 하며, 나는 이 사람을 왜 때리는 거지?"


  "5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10리를 더 가주라"는 말씀도 동일한 맥락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로마 군인이 요청할 경우, 로마 군인의 짐을 지고 5리를 동행해야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짐을 지고 5리를 동행해주고도 5리를 더 가고자한다면, 로마군인은 돌려댄 왼뺨을 보는 주인과 같은 상태에 빠질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왜 자진해서 더 고생을 자처하는거지? 그럼 나는 이 사람을 왜 부리고 있는거지?" 로마 군인들은, 반란군의 수장을 처형할 십자가의 가로 기둥을 자신들이 옮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골고다의 예수에게조차 그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반란군의 수장이 아니었음에도-말없이 그들의 몫인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걸으셨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길입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지 않고도 평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길입니다. 아무도 배제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모두를 용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입니다. 십자가는 화평케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타인을 위해 부당함을 끌어안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마저도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당해주면서도 진리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입니다. 그 신비로운 사건 속에서, 죄 없으신 분이 인간의 모든 악을 감당하셨을 때, 악의 총공습의 현장이었던 끔찍한 사형틀이, 그 분 안에서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대로 인자가 십자가에서 높이 들렸을 때, 그 분이 타락을 뒤집어 악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진짜 왕이심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왼뺨을 대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진정한 평화가 이뤄집니다. 카이사르가 아닌, 진정한 왕만이 이룰 수 있는 참 평화.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넘어서, 창조와 타락이라는 모든 인류를 담는 큰 그림 안에서 바르게 이해됩니다. 즉, 왕이신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은, 그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지역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저지른 악에 대한 완전한 반전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순종입니다. 아담으로 시작된 송장냄새 진동하는 악의 결과들 속에서 피어난 회복의 꽃입니다. 절대선에 순종하지 않은 아담과의 완전한 대비입니다. 그는 아담의 자손이지만, 그럼에도 아담을 뛰어넘으십니다.시간 안에 계셨지만, 시간을 넘어 계십니다. 그 안에서, 해결될 줄 몰랐던 악의 문제가 해결되는 새로운 길을 인류는 보게 되었습니다. 곧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 대한 복음입니다.



2) 마침내 풀린 수수께끼 : 고난을 통해 왕이 되는 어린양


이사야서 53장

누가 우리가 전한 것을 믿었는가? 
누구에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났는가?

그는 
주 앞에서 자라리라.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고운 모양도 없이, 
훌륭한 풍채도 없이, 
우리가 보기에 좋아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 없이,
그렇게 자라리라.

그는 
사람들로부터 무시되고, 버림 받고, 
슬픔의 사람이 되어 눈물을 흘리고, 
그러나 
우리는
얼굴을 감추고, 그를 경멸하고,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너무도 선명하게,
그는 가진 것이다.
우리의 고통을. 
우리의 슬픔을. 

그리고 
우리는 여긴 것이다.
그가 얻어 맞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그를 치신다고,
그가 틀렸다고.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짊어지게 하셨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체포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누가 그의 자녀들에게 선언하겠는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추방당한 것에 대해,
하나님 백성의 허물이 그로 인해 사라진 것에 대해.

그는 어떤 폭력도 행하지 않았고,
그는 어떤 거짓도 말하지 않았기에, 
그는 악인들과 함께 죽었고,
죽은 후에는 풍요로운 자들과 함께 있었다.

창조주께서 그를 고통 중에 놓으시고, 
창조주께서 그를 상함 중에 놓으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죄에 대한 제물로 바치면,
그는 그의 씨앗들을 보게 되리라.
그는 그의 날들을 더하리라.
창조주의 기쁨이 그의 손에서 넘치리라.

(그가 말씀하시길,)
"그는  고난으로 얻은 빛을 보고 만족하리라.
나의 약속에 충실한 바로 그 종이 
그의 진리로 많은 사람을 
그 약속에 충실하게 하리라
그가 그들의 죄악을 친히 짊어지는 것을 통해서 그렇게 하리라.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나는 그에게 위대한 유산을 상속할 것이다.
그는 강한자들과 함께 그 전리품을 나눌 것이다.'

그가 그의 영혼을 죽음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허물 가득한 범죄자 중 하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의 죄를 짊어졌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의 연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사야서의 난해구절은, 그 진정한 왕이 나타나는 방식에 대해서 이제 그 감춰두었던 진실을 보여줍니다. 이사야서 53장 앞부분은 끊임없이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찔리고, 상처입고, 매맞습니다. 그는 체포당하고, 유죄 판결을 당하기 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묵묵히 그 고난을 받아냅니다. 범죄자들의 죄악을 홀로 친히 짊어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즉, 이러한 고난들로 인해, "나는 그에게 위대한 유산"을 상속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니엘 7장의 인자 이야기와의 중첩을 봅니다. 여기서 '나'는 '옛적부터 계신 자', 곧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 고난 받는 종에게, '위대한 유산'을 상속합니다. 그 위대한 유산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힌트를 우리는 인자 이야기에서 발견합니다.


(단 7:13,14)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옛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고난을 통해서 왕위에 등극하는 메시아. 이것은 민족주의적 혁명에 눈이 어두워진 이스라엘은 발견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이사야서 예언의 그 고난받는 종이라는 사실과, 그 고난받는 종을 통해서, 진정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 메시아에게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상속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그 괴로움의 잔을 남김없이 마시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이 땅에 이뤄진다는 사실을 예수는 알고 계셨습니다.

 

  '고난 받는 인자'. 당시에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던, 성서에 드러난 진실을 예수는 올곧이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직 이 목적, 고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바로 그 목적을 단 한 번도 잊으신적이 없습니다.


(마 20:28)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인자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고난 받는 인자. 그것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르러 오신 예수. 그 예수를 보고 역사의 전달자였던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아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진하여, 왕은 높이 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어 죽으셨을 때, 

악의 권세는 뒤집혀서, 고난 받으신 어린양 발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이 탈출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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