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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왕
그래서 예수께서 가셨고 무덤 안에 나흘 동안 있던 그를 발견하셨다. 그런데 베다니는 유대로부터 15 스타디온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다니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은지 4일이나 지난 나사로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이 말을 덧붙입니다. "그런데 베다니는 유대로부터 15 스타디온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베다니라는 동네가 예루살렘과 가깝다는 얘기를 합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스타디온'은 고대 희랍에서 거리를 재던 단위였습니다. 1 스타디움은 185미터입니다. 여기서 '스타디움'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달리기 경기장 크기가 1 스타디온이었거든요. 그러면 15 스타디온이면 얼마일지 얼른 계산해보세요. 2.7km 정도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장소에서 수원역까지가 3.5km입니다. 그러면 베다니와 예루살렘은, 성도교회에서부터 수원역보다 가까운 거리에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곧장 아픈 나사로를 보러 가지 않으시고, 일부러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예루살렘 근처로 '왕의 행차'를 시작하셨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성전은 무너지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떠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괴롭고 힘든 포로기를 지나는 동안, 예언자들은 시온으로 마침내 돌아오시는 하나님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왕이 시온 근처로 아주 가까이 왔습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2. 마르다와의 대화 : 부활에 관하여
그런데 유대인들 중 많은 이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으로 와서, 그 형제의 일에 관하여 그들을 위로(이야기 곁에 있게) 하고자.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가 오셨다는 말을 듣고서, 그이를 만났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베다니의 집에 모여있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베다니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마르다는 예수를 맞으러 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만일 여기 계셨더라면, 내 형제가 죽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는 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진작 계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마르다는 지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 시온으로 왕이 돌아오시는 그 예언이 이뤄지는 것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왕의 귀환이, 지금 예수님이 베다니에 이르신 발걸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르다는 '안다'고 말합니다. 마르다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추구하시는 것을 이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대체 무엇을 안다는 말일까요?
예수는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마르다가 그이에게 말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일어남 속에서 그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걸 저도 압니다."
예수님께서 '안다'고 말하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부활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다시 일어나다'라는 뜻입니다. 간혹 부활과 환생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내 몸이 아닌 다른 몸으로 살아나는 건 부활이 아니고요, 내 몸 가지고 내가 다시 일어나 사는 것이 부활입니다. 하여간 부활이 '다시 일어나다' 라는 뜻임을 기억해두세요. 러시아의 흔한 이름 중에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이 있잖아요? 이 이름에서 '아나'가 '다시'고, '스타샤'가 '일어나다'입니다. 그래서 아나스탸사는 그 이름이 부활이에요.
예수님이 나사로가 부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마르다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저도 알거든요? 마지막 날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 중에 우리 오빠도 있는 게 당연하지요!"
그럼 생각해봅시다. 마르다는 언제를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유대인들은 이 "마지막 날"을 유대인들이 이기고, 이방인들은 모두 패배하는 역사의 결말로 생각했습니다. 즉 시소 같은 것이에요. 이방인들이 무겁게 앉아 있고 유대인들이 그 이방인들 때문에 포로 상태로 둥둥 떠있는 시대는 현시대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이 되면, 유대인들이 무거워지고 이방인들이 둥둥 떠서 하나님께 심판받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이것을 현시대와 오는시대로 배웠지요. 즉 마르다는 로마를 비롯한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모두 심판받고, 유대인들은 모두 부활해서 살아날 때, 나사로도 그 속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알고 있던 겁니다.
그리고 이 유대인들의 부활, 이방인들보다 유대인들이 무거워지는 때를 인자가 가져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인자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방인들을 이기고 유대인들의 승리를 가져다주시면, 그날에 유대인 모두가 부활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 쪽 시소에 앉아주시는 무거운 분이라 생각했던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마르다가 생각한 것과 좀 다른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하셨다.
"바로 내가 다시 일어남이고 그 삶이다. 나에게 신실한 이는 죽는다해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살면서 나에게 신실하기도 한 각각 모두는 오는시대에 이르도록 정말로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에 너는 신실하겠느냐?"
한꺼번에 부활이 이뤄질 것이라 생각한 마르다와는 달리, 예수님은 부활을 둘로 나누어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내가 다시 일어남"입니다. 즉 예수님이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다음 말씀하신 것은 "삶"이에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삶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란 죽음에 패배하지 않는 삶입니다. 죽는다해도 살게되는 삶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그 부활은 예수님 한 사람의 부활이 아닙니다. "모두"의 부활입니다.
1) 예수님이 부활이고 삶
2) 예수님에게 신실한 사람은 죽어도 삶
3) 신실한 모두는 오는시대에 이르도록 죽지 않음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과 비슷하지만 다른 말씀이에요. 부활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한꺼번에 이뤄진다고 생각한 유대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부활은 두번에 걸쳐 일어납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인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 알았다면, 놀라거나 되묻거나 했을텐데 그녀의 반응은 뜨뜻미지근 합니다.
그녀가 그이에게 말씀하셨다.
"네, 주여. 저는 당신이 메시아, 곧 코스모스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이미 신실했어요."
3. 같은 말, 다른 반응
그리고 이것을 말한 뒤 돌아가서 그녀의 형제 마리아를 불러 몰래 말했다.
"선생님이 오셨고 널 부르신다."
바로 그녀가 이 말을 듣고서, 몸을 급히 일으켜 그이에게로 갔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셨고, 오히려 마르다가 그이를 만났던 바로 그 장소에 계셨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집에 있던 유대인들과 그녀를 이야기 곁에 있게 했던 이들은, 빠르게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는 마리아를 보고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무덤으로 향한다고 여기고서, 거기서 울기 위해.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 계셨던 곳에 갔을 때, 그이를 보고 그이의 두 발로 엎어져, 그이에게 말했다.
"주여, 여기 계셨더라면, 나의 형제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마르다는 돌아가서 마리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찾으신다고 '몰래' 말했습니다. 왜 몰래 말했을까요? 지금 이 이야기가 벌어지는 장소가 베다니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3km도 떨어지지 않은 베다니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에라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행동이 서툴렀습니다. 그녀가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마리아가 무덤으로 간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런 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계신 곳에 다다르자, 그녀는 예수님의 발 아래 엎어져서 울면서 말합니다.
"주여, 여기 계셨더라면, 나의 형제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이 말은 마르다가 예수님께 했던 말과 같은 말이지요. 예수님은 이번에도 마리아에게 부활에 대한 애기를 해주실까요?
그래서 예수는 그녀의 절규와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의 흐느낌을 보시고, 숨결이 격해지셨고 격동하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그녀가 웁니다. 그러자 위로하러 온 유대인들도 웁니다. 한 사람이 울자 모든 사람이 웁니다. 마치 한 사람이 부활하면 모든 사람이 부활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예수님도 계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어디에 그를 놓았느냐?"
그들이 그이에게 말했다.
"오셔서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물을 터뜨리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말했다.
예수님은 '어차피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테니까, 너무 슬퍼하지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눈물 흘리셨습니다. 죽음은 슬퍼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부활할 것이니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제 살을 맞댈 수 없는데,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보아라, 얼마나 그이가 라자로를 사랑(필리아)했는지."
그런데 그들로부터 누군가가 말했다.
"시각 장애인의 두 눈을 열었던 사람이, 이 사람이 죽지 않게는 할 수 없었습니까?"
그래서 예수는 다시 그 자신 안에서 격동하시고 그 무덤을 향해 가셨다. 그런데 무덤은 동굴이었다, 그리고 돌이 그 위에 누워있었다. 예수는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우는 예수를 보고, 그이와 나사로 사이의 우정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와 중에 누군가 말합니다. "시각 장애인의 두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이, 죽음은 막을 수 없었던 말인가?" 예수님은 이 말에 반응하십니다. 그 마음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고, 예수는 이제 나사로를 안치시킨 동굴로 항하십니다. 죽은 자를 지키는 큰 돌이 놓여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말씀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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