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하여(12:13~17)
그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을 보냈다.
그들이 말했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진실한 분이시고, 누구도 편애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이 겉으로 내보이는 모습은 신경 쓰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진실하게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타당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세금을 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는 대답하셨다. "왜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동전을 나한테 가져와 보라. 한번 보자."
그들이 예수께 동전을 하나 가져왔다.
예수께서 물으셨다. "이 그림은 누구의 것이냐? 그 위에 쓴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그들이 대답했다. "황제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그들은 예수께 크게 놀랐다.
0.
이 본문은 저를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던 본문입니다. 매우 유명하면서도, 다양한 해석이 있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본문의 핵심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을 살펴보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1.
먼저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음을 말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황제의 일과 하나님의 일은 분리되어 있으니까, 종교는(특히 기독교는) 정치에서 손을 떼야한다는 말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정교분리가 익숙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을 자신들의 생각에 맞추어 그러려니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종(宗)'자 위에 올려진 '갓'은 신적인 것을 상징하고, 그 아래놓인 것은 위패, 즉 족보를 상징합니다. '교'(敎)자는 가르칠 교 자 이므로, 우리의 조상들을 따라 올라가면 만나는 신적인 것, 우리의 뿌리, 우리의 근원을 찾는 일이요, 이것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 어떤 일도 이 뿌리와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누구인지, 근본을 묻지 않고서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물며 정치는 안그렇겠습니까? 흔히 어르신들 욕할 때 보면 '이 근본도 없는 놈아' 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 배운 것을 적용하자면, 종교적이지 않은 놈이란 뜻이요, 자신의 뿌리와 근원 찾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될 것입니다.
17세기에 카톨릭과 개신교가 부딪쳐 전쟁이 난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싸움이 그렇듯, 주변의 이해관계를 물고 늘어지며 점점 판이 커져서, 나중에는 덴마크, 프랑스, 스웨덴, 신성 로마제국등이 가세한 유럽 전역의 전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무려 30년간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체결된 조약이 베스트팔렌 조약입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개신교는 종교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종교 문제로 싸우면 큰일난다는 의식과 함께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정치와 종교는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삶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삶의 중심입니다. 근본을 잘못 찾은 종교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 제대로 종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된 근본을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자는 말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합시다. 이것은 17세기 이후의 사고방식이지, 예수께서 팔레스타인 땅 위를 걸으셨던 A.D. 1세기를 포함한 대부분의 역사에서 정치와 종교를 떨어뜨려놓고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2.
두번째 그릇된 해석은, 이 예수님의 발언을 "로마를 뒤집어 엎자"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예수께서 가져오라 하신 동전, 당시 이스라엘이 사용하던 동전은 로마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동전은 그들을 지배하는 자들을 선전하는, 오늘날 TV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동전을 딱 보면, 앞면에는 황제의 옆 얼굴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신의 아들 아우구스투수 아우구스투스" . 이것으로 밥 사먹고, 이것으로 옷 사입고, 이것으로 세금 냅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 일까요? 십계명 때문입니다.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시되어있는데, 이 동전은 그 자체로 우상이거든요. 여기에는 신의 아들이 아닌 자의 모습이 신의 아들이라 새겨져 있거든요.
이것은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가 새겨져 있지 않은 동전을 그들 자체적으로 만들어서 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식민지 백성에 불과했고,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에 세금을 내야 할 때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끔찍한 동전을 황제에게 바침으로서, 황제가 자신들의 왕이며, 그 왕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전에도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 12살 즈음에, 이스라엘에는 망치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로마에 세금 거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운동 이름이 '하나님 나라'였었죠. 그가 왜 십자가에 못박힐 수도 있는 위험 속에서, 그러한 세금 거부 운동을 했는지 아시겠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황제에게는 혁명을 돌려주어라"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즉, 끔찍한 우상숭배를 자행하는 그에 대항하여 일어나자는 의미로 말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이것을 황제에게 혁명을 돌려주라! 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3.
그럼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뭐 하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저 말이 맞습니까? 예수께서는 도대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저 얘기를 하셨던 것일까요?
부분이 만나서 전체가 되고, 전체에 없어도 되는 부분은 부분이 아니라는 말을 해드린 기억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그간 우리가 살펴왔던 마가복음의 여정들을 돌아보는 것이, 마가복음 전체에서 이 구절이 차지하는 의미를 찾는데 무언가 단서를 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을 총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봤습니다. 처음 부분은 오병이어 이전, 그리고 그 이후는 오병이어 이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요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들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나서 있었던 일들을 가만 생각해봅시다. 먼저는 세계에서 고도가 가장 낮은 도시 여리고에서 바디메오를 만났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와 함께 언덕을 오르듯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그 분은 사람들이 깔아놓은 옷을 밟고, 호산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셨습니다. 그러고나서 가장 먼저 하셨던 일이 바로 성전에 들어가 제사제도를 중지시켰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사만 믿고서 열방의 빛으로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격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 성전 사건 앞 뒤로 무화과 나무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열매를 맺지 못해 말라버린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곧 이스라엘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은 우리가 지난 주 실펴보았던 아들이 포도원 소작인들에게 죽임 당하는 이야기, 버려진 모퉁이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말씀하셨고, 주인의 포도원을 강탈하려는 강도들은 열매는 커녕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 다음 오늘 이야기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여러분 무엇이 보이십니까? 지금 해드린 이야기는 모두 한 이야기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열매를 드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전체 흐름 속에서 이것을 기억하고,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그들은 성전을 통해서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하지 않습니다.성전은 어떠한 곳입니까?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입니다. 그 곳에서 진리의 말씀과 치유의 능력과 용서의 선언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성전 바깥으로 내몰린채, 그 안에서는 어떻게 하면 로마를 몰아낼까, 작당이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을 통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없이 말라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망나니 소작인들입니다. 그들은 공평과 정의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자신들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생존에만 관심이 있으니,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때리거나 죽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을 통해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평과 정의의 열매라 우린 지난 주 귀가 따갑게 듣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바로 이어서 오늘 본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 평소에는 앙숙으로 지내던 이 두 일당들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이제는 손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찾아와 입발린 소리부터 늘어놓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진실한 분이시고, 누구도 편애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이 겉으로 내보이는 모습은 신경 쓰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진실하게 가르치십니다.
웃는 얼굴로 사람을 안심시키고는 이제 등 뒤에서 칼을 꽃을 심산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타당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세금을 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이것이 엄청 강력한 질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봅시다. 만약 예수께서 세금을 내야한다고 말하면 어찌 됩니까? 로마의 황제 숭배를 인정한, 민족 반역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 어찌 됩니까? 20년전 로마에 세금 내지 말자고 말했던 그와 똑같이 말하는 자가 나타났다고, 예수를 로마에 신고할 것 아닙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질문.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는 대답하셨다. "왜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동전을 나한테 가져와 보라. 한번 보자."
그들이 예수께 동전을 하나 가져왔다.
그야말로 탁월한 대처. 동전을 가져오라 말씀하십니다. 이 동전이 아까 제가 설명드린 그 동전입니다. 이 동전이 누구에게서 나왔습니까? 예수를 죽음의 진흙탕에 빠뜨리려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왔습니다! 그 동전은 어떤 동전이었습니까? 우상숭배의 동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진흙탕에 빠뜨리려고 했으나, 이미 그 진흙탕에 들어가 헤엄치고 있는 자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순간 그는 자기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면서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을 것입니다. 정작 예수께 뒤집어 씌우려는 죄목이 사실 자신의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물으셨다. "이 그림은 누구의 것이냐? 그 위에 쓴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그들이 대답했다. "황제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예수는 저 같지 않으십니다. "거봐, 니 잘못이잖아, 니 잘못. 너나 잘하지, 누구한테와서 시비야." 이런거 안하십니다. 이 동전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향한 우상숭배임을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그 사람도 인정합니다. 그러고나서 대망의, 오늘의 그 문제의 구절.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이 우상숭배의 끔찍한 동전은 이 동전을 만든 황제를 가져다 주면 됩니다. 즉, 예수께서는 세금 내는 것에 대해서 극명하게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문장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 모든 이야기들이 연결되어 있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합니다. 달리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충분한 단서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하나님의 것.
무화과 나무 열매-성전-포도원과 소작인 비유-공평과 정의 열매-그리고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것.
이 모든 그림들이 연결되고, 하나님께서 지금 언약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 백성 다운 삶. 아닙니까? 그것은 신앙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입니다. 이 둘로 판단할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분의 것을 맡아 가꾸는 소작인들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주인의 것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데, 우리의 주인은 정치의 주인이기도 하십니다. 주인의 것은 주인에게. 우리의 모든 삶이 주인의 것이라면, 마땅히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의 주인이 우리의 육체로 공평과 정의를 이 땅에 구현하길 원하신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러한 삶을 원하시는데, 그래서, 당신이 진짜 성전되기를 원하시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당신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텐데 말입니다.
4.
예수께서 체게바라처럼, 혹은 마르크스처럼, 로마라는 체제를 멋있게 전복시키자 말하지 않으셔서 실망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먼저는 언약백성의 백성다운 삶.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공평과 정의의, 열매 맺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이 우상숭배의 더러운 체제를 그냥 가만히 두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뒤집으실지는, 이 다음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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