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인 비유(12:1~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 시작하셨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어서,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 짜는 틀도 파고 망대도 지었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세를 주고 외국으로 나갔다. 때가 되자 주인이 종을 보내어 농부들로부터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게 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종을 잡아다가 때리고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은 다른 종을 또 보냈다. 이번에는 농부들이 그 종의 머리를 때리고 그를 능욕했다.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농부들이 그를 죽였다. 주인은 종을 몇 명 더 보냈지만, 농부들은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주인에게는 이제 보낼 사람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면서 생각했다.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그러나 소작 농부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상속인이다! 가서 그를 죽이자. 그러면 유산은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농부들은 아들을 잡아다가 죽이고는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소작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보지 못했느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이제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예수를 체포할 방법을 모색했다. 예수께서 자기들을 겨냥해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가 두려워서 예수를 두고 떠나갔다.
0. 옛노래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는 노래가 있습니까? 그 노래를 부르면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옛노래 말입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것들이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요즘 노래들은 들어도 가사를 알아먹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하니, 제가 나이가 많은 것 같지만, 저 역시 새파랗게 어린 놈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못알아먹겠습니다. 알아 먹지 못하니, 뭔가 추억할 만한 의미를 줄리 없습니다.
우리보다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우리보다 형편이 나았던 것 같습니다. 텔레비젼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고, 그 흔한 컴퓨터 하나 없던 시절, 사람들은 무언가를 기억할만한 것들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고, 그래서 노래는 신성한 것, 귀한 것, 전수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였습니다.
특히 구약성서가 그렇습니다. 구약성서는 전체가 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지금도 토라를 읽습니다. 허나 그냥 읽지 않습니다. 그들은 비트와 리듬에 따라 라임을 살립니다. 그렇게 구전되고 구전되어 진리가 역사를 타고 흘러왔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여러 가지 노래가 있었지만, 오늘 소개해드릴 노래는, <사랑의 노래>라고 불리우는 이사야서 5장의 노래입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 노래가, 고대 이스라엘 차트에서는 항상 순위권을 차지하는 유명한 한 노래였습니다. 그 가사는 이러합니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 말인가?
...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제목이 <사랑의 노래>라 애뜻한 내용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다면 오산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님은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밭에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밭도 일구어 돌도 골라내고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맺힌 열매는 아름다운 포도가 아니라, 말라비틀어진 들포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노골적으로 그 가사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포도밭은 이스라엘입니다. 나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들에게, 당연히 맺혀야할 열매가 나질 않습니다. 그 열매의 이름은 바로 '공평과 정의'입니다.
그리고 이 이사야 5장을 마저 읽어보면,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서도, 공평과 정의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귀족이나 민중이나 할 것없이 포도나무들은 목이 타서 죽을 지경에 이르고, 포도원은 폐허가 되어 모든 것이 비참해집니다.
1. 다시 부르는 노래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 노래를 다시 부르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성전에 들어가, 성전의 심장인 제사제도를 정지시키셨고, 방금은 유대 지도자들이 찾아와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당신이 그러한 일을 벌이냐며 손가락질을 당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노래를 부릅니다. <사랑의 노래>. 역시 그는 재해석의 달인인 만큼, 그냥 부르지 않으십니다. 비틀고, 양념을 쳐서, 식어버린 그 노래에 풍미를 더해 온전하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 시작하셨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어서,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 짜는 틀도 파고 망대도 지었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세를 주고 외국으로 나갔다. 때가 되자 주인이 종을 보내어 농부들로부터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게 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종을 잡아다가 때리고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은 다른 종을 또 보냈다. 이번에는 농부들이 그 종의 머리를 때리고 그를 능욕했다.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농부들이 그를 죽였다. 주인은 종을 몇 명 더 보냈지만, 농부들은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주인에게는 이제 보낼 사람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면서 생각했다.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그러나 소작 농부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상속인이다! 가서 그를 죽이자. 그러면 유산은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농부들은 아들을 잡아다가 죽이고는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소작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보지 못했느냐?
사람들은 이 포도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사야서 5장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제목은 <사랑의 노래>이지만, 비참한 결말로 끝나는 그 노래 말입니다. 포도원이 있습니다. 이 포도원은 주인이 분명합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서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종을 보내어 밭에서 얻은 이윤의 일부를 받아오게 했습니다. 만약 소작인들이 성실히 일했다면, 분명 좋은 포도가 맺혔을 것이고, 이 땅의 주인은 그 이윤에 대한 자신의 댓가를 받는 것이 정당합니다. 이것은 소작인들을 괴롭히는 악덕 기업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땅의 소유권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땅의 주인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포도원을 맡은 자들의 마음에, 이 포도원을 자신들의 것 삼고자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종이고, 청지기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에 주어진 것들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 이것이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종들이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때리고 가진 것을 빼앗고 돌려보냅니다. 그 다음에는 머리를 때리고 능욕합니다. 폭력의 강도는 점점 심해지고, 처음에 마음 먹었던 작은 것이었으나, 이것은 점점 자연스러운 것이 됩니다. 이제는 당신들이 차지한 포도원은 주인의 땅이라 말하는 종들을 죽입니다. 죽입니다.
마음에 먹었던 하나의 욕심이 자라서 폭력이 되고 살인이 되는 동안, 이 소작인들은 선한 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선한 양심을 잃어버린 자들이 하는 것은, 진실에 귀를 막는 일입니다. 막는 것으로 모자라 진실을 침묵시키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들렸는지는 전혀 모호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그 의미가 분명해서 간담이 서늘할 지경입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입니다. 소작인들은 그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공평과 정의를 추구했다면, 모든 나라가 와서 이스라엘로부터 그 비결을 배우려고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종이요, 이 나라를 맡은 청지기임을 자각했다면 공평과 정의에 최선을 다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인을 버렸습니다. 아직도 이스라엘은 예배하고 있지 않냐고요? 아직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 않냐고요? 그들은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말하는 선지자들을 때리고 죽이지 않았습니까?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던져지고, 이사야는 톱으로 썰려 죽임당했습니다.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화가 아닙니다. 역사입니다. 포도원의 거짓 주인, 소작들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을 피흘리게 했던 역사가, 이스라엘의 역사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 어두움의 역사는 멈출줄 모릅니다. 아직 죽이지 못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들입니다.
2. 짙어지는 어둠, 아들마저도 삼킴
주인에게는 이제 보낼 사람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면서 생각했다.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그러나 소작 농부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상속인이다! 가서 그를 죽이자. 그러면 유산은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농부들은 아들을 잡아다가 죽이고는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소작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보지 못했느냐?
공평이 무엇입니까? 정의가 무엇입니까?
노동한 댓가를 정당하게 얻는 것이 공평입니다.
아무도 억울한 사람들이 없는 것이 정의입니다.
공평과 정의가 무너진, 아무도 그것을 위해 소리치지 않는, 억울해하는 사람들의 울음소리만 가득한 포도원에 이제 아들이 왔습니다. 주인은 생각했습니다. '내 아들은 죽이지 않겠지. 말을 듣겠지. 이제 포도원이 자신들의 소유가 아님을 인정하고, 다시 포도원을 가꾸는데 최선을 다하겠지.' 끝까지 용서의 자세로 일관하는 주인이지만, 소작인들은 가던 길을 유턴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아들은 상속자이기 때문에, 이 유일한 상속자를 죽이면 모든 문제가 끝나리라 생각합니다. 완전히 이 포도원이 자신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 착각합니다. 포도원을 다시 뺏길지도 모른다는 마음 속 일말의 불안감마저 살인으로 씻어내려고 합니다.
그렇게 잡아다가 죽였습니다. 아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역사가 아닙니까? 세상이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며, 자기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라며, 역사를 어떻게든 멋대로 살아보려는 사람들 앞에, 진정으로 하나님 아들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유대인이든, 로마인이든 할 것 없이, 지도자든, 민중이건 할 것 없이, 모두 그를 죽이자 소리치지 않았습니까?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말려 죽이자고 모두가 담합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라 착각했던 소작인들이 말입니다.
이제 우리를 돌아봅시다. 우리는 이 이야기와 무관한 사람들입니까?
혹시나, 억울한 것이 있습니까? 눈물 흐르는 것이 있습니까? 당신은 정의와 공평에 목말라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눈물 흘리게 만들고 있습니까? 당신은 정의와 공평을 말라비틀어지게 하고 있습니까?
이쪽이든 저쪽이든, 우리에게는 공평과 정의의 열매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주인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인의 뜻에 따라 성실히 노동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말입니까? 공평과 정의를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구석구석, 우리가 속한 크고 작은 관계와 사회 속에서, 우리는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인생을 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공평과 정의와 상관없이 살고 있다면, 화가 있을 것입니다. 망하게 될 것입니다. 공평과 정의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멸하게 될 것입니다.
눈에 불을 켭시다. 어디입니까? 정의가 필요한 곳, 공평을 소리쳐야 하는 곳 어디입니까? 찾았다면 무릎을 꿇고 기도합시다. 다시 무릎을 펴고 일어나 눈물로 호소하고 손과 발에 흙을 묻힙시다. 그렇게 해서 다시 아름다운 포도 열매를 맺게 할 수만 있다면, 인생을 겁시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무시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 말을 안들어주시겠습니까?
인류는 정의가 싫고, 공평이 싫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기 싫어서 이미 아들을 한 번 죽이지 않았습니까? 다시 아들을 죽이는 삶을 살아서는 되겠습니까?
3.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리라
예수께서는 포도원의 비참한 멸망으로 끝나는 이 <사랑의 노래> 뒤에 새로운 후렴을 만드십니다. 아들을 죽인 자들에게 들려주시는 그 곡에, 예수께서는 언어유희를 사용하십니다. 아들은 히브리어로 벤입니다. 그런데 벤이라는 소리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돌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소작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보지 못했느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이제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예수를 체포할 방법을 모색했다. 예수께서 자기들을 겨냥해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가 두려워서 예수를 두고 떠나갔다.
돌이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돌이 차디찬 냉대를 받고, 그의 메시지는 아무도 듣지 않은채, 오히려 사람들은 바벨을 만드려고 벽돌만을 찾을 뿐, 그 하나님의 돌,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죽여서 성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비참했던 이 노래에 충격적인 반전이 더해집니다. 그렇게 버림받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그 돌은 머릿돌이 되는 것입니다. 머릿돌은 어떤 돌입니까? 그 머릿돌로부터 다른 돌들이 쌓이고 쌓여서 새로운 건물을 짓게 됩니다. 그 새로운 건물의 중추, 핵심, 등뼈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머릿돌입니다.
이 새로운 후렴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뺴서 말려죽였던 하나님 아들의 주검을, 사람들은 마을 밖 돌무덤에 던져놨습니다. 그 시신에게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죽임당한 시신으로부터 새로운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그 죽었던 몸이 새로운 건축물, 새로운 포도원의 중심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로부터 다른 돌들이 연결되고 연결되어, 지금 새로운 건축물을 지어가는 중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각이 있는 자는 오늘 이 말씀을 알아 먹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에 사람들이 그득해지는 일도 아니고, 예수 믿었더니 잘먹고 잘살았다는 미담을 만드는 일도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할 일, 하나님의 포도원에 살고 있는, 우리가 맺어야 할 분명한 열매를 보여줍니다. 기억합시다. 공평과 정의. 오늘 세상이 이것에 목말라갑니다. 누군가 목숨을 걸고 이 일을 해야 합니다. 누가 자신의 목숨보다, 이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단 말입니까? 오직 한 부류의 사람들 뿐입니다. 죽었던 몸이 살아났음을 믿는 사람들! 그들만이 죽임당한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점철된 마음을 가지고, 공평과 정의를 자신의 삶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지만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건축물을 쌓아 올려가는, 유니크하지만 하나되는, 돌맹이 하나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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