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권위가 의심받다(11:27~33)

  다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을 거니시는데 대제사장과 율법학자와 장로들이 다가와서 물었다.

  "무슨 권리로 이런 일들을 하는거요?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다. 그 질문에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냐? 너희의 대답은 무엇이냐?"

  그들은 서로 불평하며 말했다. "우리가 하늘로부터라고 대답하면, 그렇다면 왜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고, 그렇다고 사람이 만들어 냈다고 할 수도 없고." 다들 요한을 예언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무리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대답했다. "우리는 모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면 나도 너희에게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소작인 비유(12:1~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 시작하셨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어서,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 짜는 틀도 파고 망대도 지었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세를 주고 외국으로 나갔다. 때가 되자 주인이 종을 보내어 농부들로부터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게 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종을 잡아다가 때리고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은 다른 종을 또 보냈다. 이번에는 농부들이 그 종의 머리를 때리고 그를 능욕했다.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농부들이 그를 죽였다. 주인은 종을 몇 명 더 보냈지만, 농부들은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주인에게는 이제 보낼 사람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면서 생각했다.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그러나 소작 농부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상속인이다! 가서 그를 죽이자. 그러면 유산은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농부들은 아들을 잡아다가 죽이고는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소작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보지 못했느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이제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예수를 체포할 방법을 모색했다. 예수께서 자기들을 겨냥해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가 두려워서 예수를 두고 떠나갔다.


0.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그들은'.

우리는 지난 주 성전 사건을 확인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제물을 찾는 비인간적인 사람들,(그들은 '로마'라는 제물을 찾아, 불태워 없애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성전을 정지시키셨습니다. 이후 상황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성전 경비대가 출동했을 것이고, 예수께서는 몸을 피하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는 멈춰진 성전제사에 대한 이야기로 웅성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을 만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대번에 따지기 시작합니다. 


  "무슨 권리로 이런 일들을 하는거요?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1. 모른다 말고, 둘 중에 선택하라.

-그의 권위를 받아들이느냐/거절하느냐



  그 말에 예수는 오히려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그 질문에 답하면, 자신도 무슨 권한으로 이러한 일(성전의 제사를 멈춘 일)을 했는지를 말해주겠다 하십니다. 예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인가? 사람으로부터인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소리치는 이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세례의 의미는 다름아닌 '왕의 오실 길을 준비'라는 세례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단강물로 마음을 씻고, 행실을 씻어 출애굽의 왕을 맞이하자는 것이 요한이 주는 세례의 의미였습니다. '하늘에서 왔냐, 사람에게서 왔냐'는 물음은 그것이 참인가 거짓인가의 물음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변합니다. 그래서 거짓입니다. 하늘에서 온 것은 영원합니다. 옳습니다. 그래서 참입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가 참이라 인정했다면, 요한이 예고했던 인물, 예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냥 영접이 아닌, 출애굽의 왕, 인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호산나 종려나무 가지 흔드는 대열에 동참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받아들였다면, 그 분이 왜 성전에서 그렇게 행동하셨는지, 그 분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민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 '무슨 권한으로 그러한 일을 벌였는지'를 묻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런데 만약 여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온 것, 곧 거짓이었다고 말한다면, 무수한 이스라엘의 민중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의 메시지를 모두들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세례요한을 거짓이라 말하는 지도자들은 모든 민중의 지지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의 질문 앞에, 그들은 묵묵부답입니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우리는 모르오."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말씀해주지 않으시겠다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는 침묵하지 않으시고,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그들에게'. 자신을 죽이려고 공모하는 자들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예수는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2. 주인의 아들


  "옛날에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어서,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 짜는 틀도 파고 망대도 지었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세를 주고 외국으로 나갔다. 때가 되자 주인이 종을 보내어 농부들로부터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게 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종을 잡아다가 때리고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은 다른 종을 또 보냈다. 이번에는 농부들이 그 종의 머리를 때리고 그를 능욕했다.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농부들이 그를 죽였다. 주인은 종을 몇 명 더 보냈지만, 농부들은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주인에게는 이제 보낼 사람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면서 생각했다.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그 비유에는 포도원이 등장합니다. 주인은 이 포도원들을 소작인들에게 맡기고서는 외국으로 떠납니다. 그리고는 종을 보내어 포도원에서 생긴 주인의 몫의 소출을 받아오게 합니다. 이것은 소작인들을 부려먹는 악덕 주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자기 몫의 소출'이라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작인들의 몫도 있고, 주인의 몫도 있는 것입니다. 즉, 주인의 소출은 이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의미의 소출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뒤바뀝니다. 소작인들이 주인의 소출을 받으러 온 종들을 무참히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이후로 종을 몇 명 더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습니다. 포도원을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읽어야 합니까? 역사가 보이지 않습니까? 땅이 창조되었습니다. 그 위에 사람이 창조되었습니다. 땅 위의 사람들에게는 그 땅을 잘 돌보고 가꿀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이 자신들의 것이라며 바벨의 벽돌을 나르는 사람들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을 곧바로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선지자들이 보내졌고, 선지자들은 너희가 주인의 마음을 아느냐며 온 몸으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땅의 주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 무참히 땅에 짓밟혔습니다.


  그럼에도 종들이 살해당하자, 주인은 결심합니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주인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도원을요? 아니요, 포도원을 자신의 것이라 우기고 있는 그 불쌍한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최후의 용서의 기회를 주려는 것입니다. 주인은 아직 포기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주인이 보내는 이 아들은 권한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 대한, 포도원에 대한 권한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주인되어서 개판으로 돌아가는 이 땅 위에 아들은 권한이 있습니다. 아들은 이 포도원의 주인과 같습니다. 마치 인자 이야기의 인자처럼 말입니다. 악이 지배하는 이 땅 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대리자. 바로 아들입니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권한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소작인들이 몰랐을까요? 분명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의 선택은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3. 죽임 당하는 아들


  그러나 소작 농부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상속인이다! 가서 그를 죽이자. 그러면 유산은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농부들은 아들을 잡아다가 죽이고는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


  지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려는 짓입니다. 그들은 아들을 잡아다가 로마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사냥개같은 이 로마는 이 아들을 물고 뜯어서 만신창이로 만들 것이고, 이스라엘 밖 골고다 언덕에 매달아 죽여 놓을 것입니다. 

  아들은 권한이 있으나, 무참히 살해당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요, 그 비참한 미래의 주범들은, 지금 예수에게 와서 권한이 있냐 없냐 묻는 자들입니다. 그 결과는,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소작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결국, 이 땅의 주인을 자처한 사람들은 땅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시고, 이 땅을 사람에게 주시려고 하시는데, 오히려 그 하나님을 미워한 사람들은 하나님도 얻지 못하고, 이 땅조차 얻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 입니까?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이들이 했던 질문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세례요한은 하늘에서 온 것인가, 땅에서 온 것인가. 그렇다면 정작,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은 하늘에서 온 것입니까? 땅에서 온 것입니까? 참의 사람들입니까? 거짓의 사람들입니까? 또 '모른다'할 것입니까? 참과 거짓 사이에서 모른다가 어디에 있습니까? 떳떳하면 참이요, 찔리면 거짓입니다. 이 땅의 주인인 예수 앞에 모른다는 없습니다. 자신이 이 땅이 주인이라 자처하는 이는 찔릴 것이요, 예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자신을 내어드리는 사람은 예수를 기쁨으로 맞아 들일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죽였습니까? 사탄입니까? 유대인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죽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라 착각하지 않습니까? 내 집, 내 차, 내 학교, 내 직장, 내 사업, 내 자식, 내 인생. 우리는 뻔뻔하게도 우리가 가진 것들 앞에 '내'자를 붙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찌 우리 것입니까?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들은 맡겨진 것이고, 맡겨진 것들은 주인의 소유입니다. 주인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주인과 상관없이, 우리가 이것을 지켜내려는 순간, 우리는 예수를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순간, 우리는 예수를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무엇을 지켜내려는 것입니까? 예측할 수 없는 회오리 바람같은 그 분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고 지키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분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안정된 직장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넉넉한 수입과, 단한한 가정을 누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얻게 된 풍요로움에 감사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독립 운동중입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는 로마를 몰아내는 거룩한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로마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일을 날마다 성전에서 논하고 있는, 위대한 민주투사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안에 힘겹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노숙인들, 병자들, 과부들, 고아들이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언제나 있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입니다. 로마를 몰아내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지켜내는 일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안에 힘겹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노숙인들, 병자들, 과부들, 고아들이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언제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날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누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성전을 깨끗이 하고, 새로운 출애굽을 가져올 메시아다 인자다 시끄럽습니다. 어?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성전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잃어버릴 것이고, 이것은 단란한 가정에 위협이 될 것이고, 자신들이 하고 있는 혁명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버린 노숙인들, 병자들, 과부들, 고아들이 그를 따르고 있고, 거대한 힘이 되어 자신들에게 몰려옵니다. 이제 그들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려놓고, 예수를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그를 죽여 이 민중의 태풍을 잠재울 것인가.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선택하시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하늘에서 온 사람은 예수를 죽이지 않고 영접합니다. 그를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4. 그의 죽음 위에 세워지는 새 성전


  예수께서는 이 비유 이야기 속에서 알 수 없는 구절 하나를 넣으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보지 못했느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이제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예수를 체포할 방법을 모색했다. 예수께서 자기들을 겨냥해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가 두려워서 예수를 두고 떠나갔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이제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건축자들은 누구입니까? 성전을 구성하고 있는,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돌을 버렸습니다.(돌은 '아들'이란 말과 발음이 같습니다) 그런데 그 버린 돌이 새로운 집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계획이랍니다. 아, 성전이 무너지고, 기존에 성전을 지배하던 자들이 버린 아들이, 새로운 성전을 짓게 될 것이라는 말이군요.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는 좀 더 뒤의 본문들을 살펴봐야 겠지만, 여기 있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대번에 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곧바로 행동에 들어가거든요. 예수를 어떻게든 체포할 방법을 모색합니다. 이 비유 안에서, 자신들이 맡은 배역이 무엇인지, 너무도 분명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들이 버렸던 민중이, 그 예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 같이 때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는 적절한 때가 되면 달려들어, 아들을 물어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은 아들을 통해서 새로운 집이 지어질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어떤 집이 지어질까요? 마가복음은 이것에 대한 답변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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