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단 앞에서
여기는 요단 앞입니다. 이 요단만 건너면 '약속의 땅'에 닿습니다. 그 약속의 땅은 토라 이야기의 결말 '마침내 이뤄진 다스림'의 무대입니다. 복음서는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요단에서, 예수님도 요단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요단을 건너는 여호수아에게 이제 "시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 역시 요단에서 있던 예수와 세례요한의 사건을 소개하며 이제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세례'와 '성령'으로 그 시작이 선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제 곧 이뤄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해서.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루시려는 예수는, 그래서 모세를 기억하셨습니다. 당연합니다. 모세는 그 옛날 요단을 건너는 이스라엘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며,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길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제 예수는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루시려고 하시는데, 이스라엘이신 그이가 그 모세의 말을 잊으실리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께서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도 확인했습니다. 만일 그가 진정한 이스라엘이시라면, 그가 맞서 싸우는 대상이 진짜 인자 이야기의 짐승일 것입니다. 사람들을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실천에 가둬놓은 파라오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맞서 바벨을 세우려고 하는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파멸시키실 가짜 왕일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로마입니까? 아닙니다. 사탄입니다.
1. 사탄 : 덜, 탓, 편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적의 정체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우리의 적은 사람이 아니라 사탄입니다. 요즘은 사탄 이야기를 하면 '사탄이 어디 있어? 다 미신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에서는 뿔 달리고 꼬리달린 괴물을 그려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없다는 사람도 옳지 않고, 우스꽝스럽게 그려놓는다고 그것이 사탄인 것도 아닙니다. 사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그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탄'이라는 말의 뜻부터 알아봅시다. '사탄' 이라는 말은 '고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글자를 하나 하나 분해해보면, 히브리어로 사탄은 세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 풀면 '사+타+ㄴ'입니다. '사'는 싸우고 죽인다는 뜻입니다. '타'는 둘러싼다는 말입니다. 'ㄴ'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탄'이라고 하면, 생명을 둘러싸고서 싸우고 죽인다, 생명을 질식시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탄의 뜻을 들었을 때,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창조된 우주와 인간을 배울 때, '다스림'을 배운 적이 있었지요.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은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즉 다스림은,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어떻습니까? 생명을 둘러싸서 없애버리려는 것이 사탄이 하려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정 반대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탄을, 악을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Anti-Creation. 반창조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생명답게 하시는 창조를 역행하는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탄은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감기 바이러스처럼 사람 몸에 기생해야 자신의 세력을 넓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에게는 아담과 하와가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탄이 이 세상에서 활개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순전히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사탄이 자신을 다스리도록 내버려둔다면 사탄은 이 세상의 왕으로 군림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사람과 싸울 것이 아니라, 사탄과 맞서 그에게 우리의 몸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사탄은 이 땅에서 사람을 이용해서 생명을 소멸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전략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진실을 보여줄 것입니다.
1) '덜'
마가복음 4:15
길가에 말씀이 '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곧 사탄이 와서 그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사람을 말한다.
사탄의 작전은 언제나 늘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바로 말씀을 빼앗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 앞에서 무엇으로 사탄을 이기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말씀은 먹고 사는 문제보다, 내가 인정받는 것보다, 세상의 화려함을 얻는 것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사람으로부터 말씀을 '덜어내서, '더럽게' 만드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덜'을 붙이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사탄은 덜어냅니다. 사탄은 태초의 인간에게 "네가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수도 있고, 안죽을수도 있어" 라고 말하며 말씀을 덜어냈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냥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점 하나도 선 하나도 버려지지 않고 모두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니 덜어내선 안됩니다. 온전한 말씀으로 늘 숨 쉬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서 말씀을 덜어내면 마치 총을 빼앗는 군인처럼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말씀을 빼앗겨 사탄에게 무방비 상태가 된 인간의 증세는 다음과 같습니다.
2) '탓'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과 끊어집니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세상에 문제가 오직 '너와 나'의 일만 됩니다. 본래 사람의 관계는 '너와 나와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삼각형을 이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긴 사람은 '너와 나'밖에 모릅니다. 셋이 아니라 둘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둘은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가 문제가 생기면 엄마와 아이만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전문가 선생님을 모십니다. 부부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부부클리닉을 갑니다. 친구와 싸우면 선생님이 중재를 해줍니다. 이렇듯 문제는 나와 너, 그리고 제 3의 무엇이 이었어야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에 말씀이 '올'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말씀은 이 세상의 모든 나와 너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과 연결된 '올(실)'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빼앗긴 사람은 말씀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빼앗깁니다. 그러다가 무언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가해자와 피해자 둘이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이 때 생기는 것이 '탓'입니다. 문제 앞에서 서로 자기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양 쪽이 있습니다. 양 쪽은 마치 솔로몬 재판에서의 두 여인처럼 서로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할 뿐, 아무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선악과 이후, 나는 선이지만 다른 사람은 악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옳지만 저 사람은 틀렸다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원수 갚는 일은 나에게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하나님을 몰아내니 서로 탓하기만 할 뿐 문제는 더 복잡하게 꼬여버릴 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서로 탓만했던 일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탓하게 될 때, 그것은 생명을 소멸하는 일이요, 사람은 고발자라는 사탄의 이름을 따라 사탄을 닮아갑니다.
요한복음 6:7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열두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사탄이니라.”
가롯유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왜 이 사람을 사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가 고발하려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가롯유다는 예수가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이신 그 분을 거절하니 가롯유다는 하나님과 끊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시작되는 것은 탓입니다. 예수를 유대 지도자들에게 고발하고자 합니다. 고발하는 사람, 즉 사탄을 닮아갑니다.
3) '편'
이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알래스카의 두 마리의 무스가 서로 싸우다가 뿔이 꼬여 강물에서 죽어버렸고, 이제 덩그러니 그 뼈만이 남았습니다. 이 무스들도 원래부터 싸우다 죽을 사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암컷 때문인지, 먹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 때문에 이 강 한 복판에서 싸우게 되었고, 그 결말은 이렇게 서로 송장이 되어 망해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덜어낸 인간이, 서로를 탓하다가 그 다음 생기는 일은 서로 편을 나누어 싸우는 일 뿐입니다. 그 끝은 멸망입니다.
갈라디아서 5:15
만일 서로 물고 뜯으면 멸망할까 조심하라
말씀을 덜어내고 서로를 탓하는 세상 속에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탓하고 싸우지 말고 그들을 먼저 도우라 하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귀신들린 사람, 병든 사람이 나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또 '귀신이 어디있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귀신들었다는 말은 정신에 병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욥기>에서 보듯이 사탄은 사람의 정신과 몸을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인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힘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러기는 커녕,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편을 나누어 싸우려고 하고, 귀신들리고 병든 사람들은 탓하기 바빴습니다.
누가복음 13:16
그런데 이 여자는 아브라함의 딸로서 십팔 년 동안, 사탄에 매여 있었다.
안식일에 이 사람의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무려 18년 동안을 반창조의 영향력 속에서 괴로워 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사람을 도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그 여자를 고쳐주었더니, 안식일이기 때문에 고쳐주면 안된다고 예수를 책잡으려고 합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해야 할 해결책이, 오히려 사탄의 노예가 되어 생명을 소멸시키는 일이 앞장 서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병들고 귀신들린 동족들을 나몰라라 하고, 밖으로는 로마를 죽일 생각만 하고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딸로서!"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여자도 너희와 함께 해야 하는 사람 아니냐, 너희의 가족 아니냐,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돌봐줘야 할 사람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편 나누기에 빠지면, 정작 내 지척에 있는, 내가 이름도 알고 있고 얼굴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이 보이질 않습니다.
2. 이스라엘에 자리 깔고 앉은 사탄
이 '덜', '탓', '편'이 사탄의 교묘한 방법입니다. 사람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과 싸울 것이 아니라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 '덜', '탓', '편' 이라는 방법을 가지고 사람들끼리 싸우게 만듭니다. 자신에게 돌아갈 화살을 서로에게 향하게 합니다.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라, 사람들은 서로 싸우면서도 정작 진짜 적이 누군지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제국을 짐승이라 여기며, 그들에게 원수를 갚겠노라고 이를 갈고 있을 때, 모든 사람을 집어 삼킨 이 사탄의 세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을 짓누르는 주먹의 주인공은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림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제국이 사탄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국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착각했습니다. 제국이 아니라, 그 제국을 뒤에서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더 거대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덜어내고, 남을 탓하게 하며, 세계를 분열시키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말그대로 반창조, 하나님의 창조를 거스르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출애굽의 악한 압제자란, 로마가 아니라 바로 이 사탄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왕국은 이집트만이 아니었습니다. 타락으로부터 시작된 역사 전체에 사탄의 영향력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으로 부름받았던 이스라엘 마저도 사탄 아래서 노예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배웠던 '힘쎈 인자 이야기', '폭력의 하나님 나라', '생존을 위한 성전', '분열의 토라', 그리고 '우리의 왕국, 우리들의 하나님'은 모두 이스라엘이 사탄의 노예가 되어버렸음을 보여주는 것들이었습니다. 어둠에 맞서 어둠으로 싸우려는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사탄이 일으킨 타락을 해결하도록 부름받았던 이스라엘이, 오히려 사탄의 가장 충직한 노예가 되어, 사탄은 참혹하게도 언약 백성에게 그 또아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3.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께서 요단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스라엘로 인정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사탄을 이기는 이스라엘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이제 그 사탄의 왕좌가 있는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미세먼지가 낀 것마냥 뿌연 사탄의 공기로 가득한 그 이스라엘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17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에 대해서 이미 배웠습니다. 이 말은 마카비 형제들이 했던 말이고, 로마에 세금을 내지 말자던 유다가 했던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란 뜻으로, 곧 출애굽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즉 왕이 오셔서 악한 압제자가 파멸되고, 포로 생활이 끝나 자유를 얻으며, 아름다운 땅을 얻게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을 이스라엘은 제국이 파멸되고, 이스라엘 나라가 독립을 얻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폭력적인 전쟁도 불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적은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사탄이었습니다. 이 생각을 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무슨 의미인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신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전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이 가짜 왕 사탄이 파멸되고, 마침내 사람들은 자유를 얻으며, 그들이 마침내 약속의 땅을 얻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파라오가 지배하고 있는 이집트 위에 하나님의 재앙이 떨어지듯, 이제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이곳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바로 선택된 지도자 예수를 통해 그 일이 이뤄집니다. 하나님이 요단을 건너는 여호수아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겠다고 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은 세례를 받고 요단을 건넌 예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그가 가는 모든 곳에서 보여주십니다. 그 다스림이 빗줄기처럼 떨어져 뿌옇고 답답한 공기로 가득했던 세상을 바로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렇게 선언하신 이후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병자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좋은 사람이라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출애굽이었습니다. 제국으로부터의 출애굽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는 사상 초유의 사탄을 이기는 이스라엘이셨습니다. 그는 줄곧 사탄의 영향력으로부터 사람들을 출애굽시키고 계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이 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이 말씀이 어찌 들리십니까? 예수께서 결박했다고 말씀하시는 '강한 자'는 누구일까요? 그 강한 자를 결박해버린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이 이스라엘이신 예수요, 강한 자가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사탄입니다. 그가 광야에서의 시험에서부터 이기는 이스라엘 예수에게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쩔절매는 사탄 앞에서 그가 붙잡고 있던 인질들을 구출해내십니다. 사탄이 이렇게 전세계 모든 사람들을 인질로 붙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이용하지 못하면 힘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생'한다고 하지요. 사탄은 사람에게 기생해야만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막강한 사탄이지만, 만일 많은 사람이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힘을 발휘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마치 감기 바이러스처럼 말입니다. 아무도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면 감기 바이러스는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모자릅니다. 이스라엘 예수는 사탄이라는 바이러스의 박멸, 파라오의 왕국 자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저 인질 구출에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들인 사람들, 병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것은 마치 모세가 열 가지 재앙을 파라오 앞에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는 사탄이 가장 활개치고 있는 이스라엘로 들어오셔서, 사탄의 영향력이 무너지는 사건들을 하나 하나 만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열 가지 재앙 속에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슈무엘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도 사탄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진정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사탄에게 이용당해서, 생명을 생명답게 여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덜과 탓과 편에 빠져 생명을 생명답게 하시는 그 분의 다스림 밖에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싸울 적이 누군지가 분명합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사탄입니다. 말씀을 덜어내고, 탓하고, 편 나누려는 마음은 우리의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마음입니다. 이 새로운 여호수아의 전투는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전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숨을 쉬느냐, 어떤 정신으로 사느냐의 전투가 먼저입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권력자들과 힘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입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우리는 그 다음 이야기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이 사탄은 어찌 될까요? 이제 열 번째 재앙이 떨어질 것입니다. 사탄이 치명상을 입어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되는 사건을 우리는 다음 주에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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