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글들을 모아 새로 구성해봅니다. 전체 이야기 8에 해당합니다.
0. 지금까지의 맥락
1. 우리를 더 큰 주먹으로 만들어 주세요.
예수께서 소년이었을 적, 이스라엘 땅에서는 큰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다'라고 하는 사람이, 로마에 대항해서 혁명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유다는 로마에 세금을 내지 말자고 주장했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와 로마를 처단하실 것이라 소리쳤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에게 동조했습니다. 그래서 혁명을 일으켰으나, 로마의 주먹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군사들을 보내 이 유다 일당들을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모든 일당들이 붙잡혔고, 주범이었던 유다는 당시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군 지도자에게 부과하는 형벌에 따라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국보다 더 큰 주먹이 되고 싶었지만, 로마는 정말 강력했습니다.
대체 유다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무엇을 믿었기에 제국 로마에 대항해서 목숨걸고 싸우려고 했을까요?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다시 인자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인자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을 다시 확인해봅시다.
옛적부터 계신 자 - 하나님
짐승 - 자신들을 지배하는 로마
인자 - 혁명 지도자
즉, 유다는 이스라엘이 로마를 대항해서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벌이셨듯이, 자신들도 제국의 재앙이 되어 폭력으로 제국을 이겨보려고 했습니다. 악한 압제자인 로마를 하나님의 승리로 짓밟을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승리는 무엇일까요? 미움과 폭력입니다. 남을 짓밟아서 얻는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도 똑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남을 짓밟아서 얻는 승리를 추구했습니다. 로마는 엄청난 범위의 영토를 유지하면서, 모든 점령지에게 관대한 종교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하나의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 숭배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조건 하에, 다른 민족들의 믿음을 인정해주었습니다. 로마가 점령하는 곳마다 황제의 신상이 세워졌고,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으로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이미지들은 황제의 지배를 선전하는 광고들이었고, 로마 신화는 그를 신으로 추앙하는 드라마였습니다. 주변에 널린 광고와 드라마 속에서, 로마 황제는 세상의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다면, 로마는 아주 철저하게 그들을 짓밟아서 자신들의 승리를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우리의 유다는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는 처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사람은 유다만이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88년에는 얀네우스에 의해 800명의 바리새인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시절에는 티투스 왕에 의해 500명의 바리새인이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수백개의 십자가가 즐비해있고, 그 십자가마다 사람이 매달려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십자가는 힘이 센 자가, 힘이 없는 사람에게 '우리한테 까불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라고 말만해도 밥먹다가 토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힘센 주먹이, 자신에게 까부는 주먹을 십자가에 매답니다. 작은 주먹은 더 큰 주먹이 되고 싶어하지만, 결국 십자가에 매달릴 뿐입니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 하나도 주먹이 되고 싶지 않은 쪽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역사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퍼즐 조각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유다의 운동을 이상하게도 '하나님 나라'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인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실 승리를 가리켜서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즉 출애굽을 위해 하나님이 악을 파멸시키시는 승리를 가리켜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2. 가짜 메시아와 비참한 결말
그렇게 무수한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리면서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포기할줄 몰랐습니다. 유다를 비롯해서 무수한 랍비들이 혁명 속에서 비참하게 죽었는데도, 하나님의 나라를 부르짖으며, 로마와 싸워야 한다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안에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기원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로마 황제 티투스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깃발을 가지고서 성전을 능욕하더니, 아예 그 성전을 모두 박살내 버렸습니다. 그 아름답던 돌들이 모두 떨어져서 산산조각 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와의 전투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전쟁은 A.D 72년 까지 이어졌는데, 끝까지 저항하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모여서 결전을 벌였던 지역은 마사다라는 지역이었는데, 그 지역이 1963년 대대적으로 발굴 되었습니다. 무수한 시체들이 나왔습니다. 당시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라는 사람은 그 최후의 전투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놓았습니다.
'로마 군대가 마사다 성벽을 부수기 시작한 날 밤, 유대인 지도자 벤 야일은 960여 명의 동지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했다. 비굴한 항복이냐, 로마인의 칼에 의한 죽음이냐. 벤 야일은 제3의 선택을 제시했다. 자유인으로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들은 모든 소유물을 한데 모아 불살랐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가족 중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끊게 했다.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열 사람을 뽑아 나머지 남자들을 죽이게 했다. 뽑히지 못한 남자들은 이미 죽은 부인과 아이들을 끌어안고 목을 내밀었다. 열 사람만 남게되자 그들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마지막 사람은 다른 아홉 명을 죽인 뒤 칼에 엎드려 자결했다.'
이런 지경이 되었는데도, 이스라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오늘 우리가 배울 사람은 바르 코크바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별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아키바라는 유명한 랍비가 있었는데, 그가 이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럼 바르 코크바는 이제 무엇을 했을까요? 당시 사람들이 그 와중에도 고대하던 것은 제국으로부터의 출애굽이었습니다. 바르 코크바가 인자라 선언되었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으쌰으쌰해서 이 바르 코크바를 따라, 악한 압제자인 로마와 다시금 전쟁하려고 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정말 자신들이 바라던 출애굽에 성공했을까요?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로마는 전력을 다해서 다시금 끔찍한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 바르 코크바는 살해당하고,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라엘은, 1916년이 되어서야, 벨포어 선언에 의해서 흩어졌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땅 사이로 강제로 비집고 들어간 것입니다. 70년부터 1916년까지 전쟁에서 살아남은 얼마 안되는 유대인들은 평생을 떠돌이로 돌아다니며 실향민으로서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3. 희생당하는 인자?
그럼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짓누르는 제국이 악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움과 폭력이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출애굽이 이뤄지기는 커녕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그들이 이루려고 했던 출애굽 그림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땅을 다시 얻고자 전쟁을 벌였는데, 오히려 그 땅에서 남아 있던 사람들 마저도 죽임당하거나 쫒겨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들의 답답함이 이해되긴 합니다. 자신들이 살던 땅은 남의 땅이 되어버렸고, 출애굽의 위대한 백성은 다시금 노예가 되었으며, 로마 황제에게 갇혀버렸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답답한 상황을 뚫어내고 싶었습니다. 즉 다시 하나님이 오셔서, 출애굽하고, 포로 생활로부터 자유를 얻으며, 땅을 찾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자신들의 땅에서 제국을 몰아내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하나님이라도는 꿈에도 모른채 말입니다.
물론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서 예배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던 하나님은, 하나님의 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끔찍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출애굽을 이룬다 하면서도, 그 출애굽 그림에서 한 가지 퍼즐 조각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사야서 53장입니다. 희생당하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리라.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고운 모양도 없이,
훌륭한 풍채도 없이,
우리가 보기에 좋아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 없이,
그렇게 자라리라.
그는
사람들로부터 무시되고, 버림 받고,
슬픔의 사람이 되어 눈물을 흘리고,
그러나
우리는
얼굴을 감추고, 그를 경멸하고,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너무도 선명하게,
그는 가진 것이다.
우리의 고통을.
우리의 슬픔을.
그리고
우리는 여긴 것이다.
그가 얻어 맞고 있다고,
그를 하나님께서 치신다고,
그가 틀렸다고.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온전한 인간이 되시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짊어지게 하셨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체포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누가 그의 자녀들에게 선언하겠는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추방당한 것에 대해,
하나님 백성의 허물이 그로 인해 사라진 것에 대해.
그는 어떤 폭력도 행하지 않았고,
그는 어떤 거짓도 말하지 않았기에,
그는 악인들과 함께 죽었고,
죽은 후에는 풍요로운 자들과 함께 있었다.
창조주께서 그를 고통 중에 놓으시고,
창조주께서 그를 상함 중에 놓으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죄에 대한 제물로 바치면,
그는 그의 씨앗들을 보게 되리라.
그는 그의 날들을 더하리라.
창조주의 기쁨이 그의 손에서 넘치리라.
(그가 말씀하시길,)
"그는 고난으로 얻은 빛을 보고 만족하리라.
나의 약속에 충실한 바로 그 종이
그의 진리로 많은 사람을
그 약속에 충실하게 하리라
그가 그들의 죄악을 친히 짊어지는 것을 통해서 그렇게 하리라.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나는 그에게 위대한 유산을 상속할 것이다.
그는 강한자들과 함께 그 전리품을 나눌 것이다.
그가 그의 영혼을 죽음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허물 가득한 범죄자 중 하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의 죄를 짊어졌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의 연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종의 노래의 '그'는 분명 인자를 가리키는 말인 것 같은데, 그토록 고대하던 인자가 고문당하고 죽임당한다는 사실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한 인자를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사야서 53장은 언제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숙제로 남았습니다. 이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나중에 에디오피아에서 온 사신도 성경을 읽다가, 이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세상은 이 이사야서 53장의 비밀을 잘 모른채, 그저 제국보다 더 큰 주먹이 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서, 폭력으로 땅을 되찾는 출애굽에만 열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유다와 바르 코크바 사이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진짜 왕이 오셨는데,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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