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88일
1.
어린이 여러분,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들을 복습해봅시다. 먼저 1. 창조된 우주와 인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늘과 땅, 그 가운데 세워진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을 세우시고, '다스림' 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2. 타락한 인간과 망가진 세계'를 보았지요. 비뚤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룰 수 없게끔 병들었습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을 수치스러워하고, 그 수치를 감추기 위해 이것 저것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땅구슬에 벌어진 이 타락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2번에서 3번으로 넘어가기 전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심판입니다.
타락한 사람과 세상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이 심판을 보여주는 것이 '노아' 이야기입니다. 노아 이야기에는 큰 배도 나오고, 여러 동물들도 나옵니다. 마치 트랜스포머와 쥬라기 공원을 합쳐놓은 것같이 흥미진진한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 이야기는 그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핵심은 바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사람을 그저 인정해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만일 경찰이 범죄자들을 보고도, '응, 범죄자들이 저렇게 살 수도 있지 뭐' 라고 한다면, 이 경찰은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경찰이라면,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하과, 그 기준대로 칼같이 움직여서 범죄를 처벌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의로운 경찰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정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인간의 비뚤어짐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노아 시절 그 심판은 다름 아닌 죽음으로 이뤄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물에 수장되어 죽었습니다. 노아 시대의 이 사람들은 왜 죽었습니까? 비뚤어졌기 때문입니다. 비뚤어졌다는 말이 곧 죄입니다. 죄의 증세에 대해서 애기해봅시다. 먼저 하나님을 부끄러워합니다. 하나님을 부끄러워하니 생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합니다. 마치 나무에서 잘린 가지가, 자기 이파리 상태만 신경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생명으로 이 땅을 다스리는 사람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죽게 될 것이고, 이것만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생명을 가꾸고 돌봐야 할 사람들이, 살아보겠다고,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일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 따위 일들을 자랑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 생존할 수 있는지, 내가 생존을 위한 도구들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밟고 살아 남았는지를 자랑합니다. 이것을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것을 부러워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끝은 무엇입니까?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심판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2.
그래서 노아의 때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이 물에 수장당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죽는 것이 심판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심판은 살아도 심판이고 죽어도 심판입니다. 이 심판이라는 말은 우리가 늘 하나님의 판단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죽으면 하나님의 눈 밖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어림 없는 소리입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 하나님께서 그 선악 사이에서 선택한 것들을 물으실 것입니다. 즉 매순간 찾아오는 선악과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죄다 확인하는 날이 올 것이고, 심지어 죽은 다음에도 이 날은 반드시 옵니다.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노아 시절, 그저 죄짓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정신이 팔렸던 모든 이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서 벌인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물어요?' 하겠지만, <성경>은 마지막날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즉 비뚤어진 사람들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그 날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실이 밝혀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12
나는 또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책들을 펴놓고, 또 다른 책 하나를 펴놓았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유죄판결임을 보여줍니다. 아담 이후, 인류 전체가 타락하여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사람이 없습니다. 단 여덞명을 제외하고서 말입니다. 바로 노아의 가족들입니다. 이 여덟명이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이 아직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였습니다. 이 여덟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물심판 이후에도, 이 땅구슬에 발생한 타락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류는 하나님께 돌아가기는 커녕 바벨탑을 짓고, 하나님께 맞서려고 했습니다. 타락의 문제는 죄지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3.
물로 온 인류를 쓸어버려도 해결되지 않는, 이 타락의 문제. 이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이, 이 우주와 인간에게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살고 있던 곳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라 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입니다. 그렇게 집떠나서 새로운 땅으로 가는 그에게 후손들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한 명, 두 명이 아니라 아주 많이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복이 있으면 그 반대도 있습니다. 저주입니다. 그리고 이 복과 저주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흘러갈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정점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1)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가라
2) 많은 후손이 생길 것이다
3) 그들이 복을 받고, 모든 민족에게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하신 것도 모자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내용에 대해서 피를 걸어 약속하셨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전에 살펴본적이 있는데, 짐승들을 반으로 쪼갠 사이를 불의 형상으로 걸어가신 내용이 기억이 날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에게 하시 약속에 대한, 피의 맹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내용에 대해, 자신의 전부를 거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 타락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자 하십니다. 이 '아브라함의 언약'대로 말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대로 하실 것이라,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었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 '의'라는 말이 어려워서 학자들마다 지금도 논쟁중입니다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 '의'라는 말은 '너는 내 가족이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너는 내 가족'이라고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너는 내 가족'이라는 인정입니다. 왜 아브라함을 가족으로 받아주셨습니까? 그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믿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즉 내가 땅을 떠나서 새로운 땅으로 가면, 하나님이 후손들을 많이 주고, 또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들을 통해서 타락의 문제를 뒤집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걸 믿으면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제가 예전에 '임군'에게 '믿음은 따름'이라고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믿음을 머리로만 하는 것이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봅시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믿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우리가 비뚤어져 살고 있던 삶의 자리를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죄악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따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대로, 본인에게 익숙한 삶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이 가라고 지시하신 땅으로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4.
그래서 이후 어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정말 이뤄졌을까요? 아브라함 입장에서 억울한 것은, 아브라함이 살아 있을 때 그의 자식은 고작 여덟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의 후손이 민족이 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은 믿고 걸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고나서, <성경>은 아브라함의 증손주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래봐야 고작 열세명입니다. 그리고 이 열세명이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폭발적인 인구증가가 벌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몇 안되는 후손들이 민족이 될만큼 사람들이 아기를 많이 낳습니다. 이렇게 이집트에서 생긴 아브라함의 후손들, 이 사람들을 가리켜 '이스라엘'이라 부릅니다. '이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두 번째 내용이 마침내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규모는 민족인데, 이들이 하는 일이라곤, 이집트에서 흙벽돌 굽는 일, 파라오를 위한 곡식 창고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이렇듯 <성경> 이야기는 세상의 타락을 해결하리라고 기대를 걸어야 할 이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채찍질에 못이겨서,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타락을 뒤집는 하나님의 카드였다니요! 오늘날 우리나라로 치자면, 노숙인들에 비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 노숙인들을 보며, '아, 저 사람들이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을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어불성설입니다. 마찬가지로, 희망을 전혀 가질 수 없는, 참으로 비참한 신세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며, '아, 저 사람들을 통해서 타락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거야.'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 자신도, 자신들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도 잊어버리고, 심지어 이집트의 총리였던 요셉도 잊어버려서, 그저 파라오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게 운명이라 체념하며 살던 사람들이었으니 말입니다.
한 마디로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입니다.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가, '너희들은 오늘부터 내 노예니까 일해라' 이렇게 말한다면, '아니, 에전에 14년간 기근이 벌어졌을 때, 우리 조상 요셉이 이집트를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국빈으로 대우는 못해줄망정, 노예삼고, 우리 아가들을 막 죽이고,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런 항의라도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죄다 까먹은 겁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요셉이 누구인지. 자신들의 '시작'을 잊어버리니, 과정도 없고, 결말도 없습니다. 그냥 사는 겁니다. 이렇게 살면 노예밖에 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죄다 까먹어도, 하나님은 이들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노예들을 '출애굽'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왜 이 노예들을 출애굽시키신단 말입니까?' 다음 구절에서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출애굽기 2:23, 24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약속을 기억하시기에, 그들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이 노예들을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그의 가족으로 인정된 그 때의 약속이, 이제 이뤄지는 것입니다. 출애굽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역사가 이어져 내려옵니다. 사람은 까먹어도, 약속은 그대로고, 이뤄지는 중입니다. 100년도 못사는 사람의 눈 너머로, 하나님은 열심을 내어, 그 약속을 이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옛날 출애굽 시절에 그러했다면, 오늘날은 어떠하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안에, 더불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습니다. 심판은 비뚤어진 자에 대한 처벌이고, 약속은 그 비뚤어짐을 고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심판입니까? 약속입니까?
그 약속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1)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가라
2) 많은 후손이 생길 것이다
3) 그들이 복을 받고, 모든 민족에게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될 것이다.
2)번은 이뤄진 것 같습니다. 나머지 약속들이 어찌 이뤄지는지, 우리는 다음 주에 '4. 악으로부터 출애굽' 을 함께 살펴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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