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말씀이 이해되고 해석이 되는 것은 너무나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해석된 말씀을 살아가는 기쁨 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내가 살아야 할 내 인생의 진짜 길을 찾게 된 것이기에,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은, 때로는 어렵고, 고생스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세 번째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워도 그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입니다. "힘들어도 옳은 길을 함께 간다!" 이러한 신념을 함께 갖게 된 사람들과 정말 그렇게 함께 달려가는 것은 정말 기쁜 일입니다.
이러한 삼중의 기쁨. 깨달음의 기쁨, 그리고 살아냄의 기쁨, 그리고 함께 살아내는 기쁨. 이러한 삶이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이 좋다는 것,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거대한 벽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벽 너머로 그 기쁨을 엿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벽을 넘어서 기쁨의 삶으로 가보려고 하지만, 이 벽은 무척이나 높습니다. 이 벽을 뚫어보려고 머리로 들이 받아보지만, 오히려 벽이 아니라 머리가 깨질 지경입니다. 이 벽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깨닫고, 살아내고, 그렇게 함께 갈 수 없도록 가로 막는 거대한 벽. 그 벽의 이름은 '생계와 생존' 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용 써도 이 벽을 뚫어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저 삼 중 기쁨 중, 첫 번째 기쁨 정도에 만족합니다. '아, 나는 깨달았으니 됐어. 그런데 뭔가 아쉬운 걸?' 다음에는 또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이번에도 깨달아서 좋아. 그런데 뭔가 아쉬운 걸?' 잠시는 기쁘지만, 그 기쁨은 이내 곧 사라지고 더 큰 갈증을 불러 일으킵니다. 두 번째, 세 번째로 연결되지 못하는 그 기쁨은 결국 기쁨이 아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온 몸을 찢어,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마라톤의 출발 총성을 울리신 분입니다. 그 마라톤의 참가자들은 이전에는 모두 자기 자신이 일등이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기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분의 출발 총성 소리를 듣자마자 새로운 경주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경주는 벽을 돌아가지도, 벽을 피해가지도 않습니다. 그 벽으로 돌진합니다. 그 달리기의 선두에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새로운 몸을 입고 계신 한 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가장 선두에서 먼저 그 벽을 뚫어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그 분을 따라 생존과 생계를 극복한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고자 벽으로 돌진합니다. 그 전에는 벽에 갇혀서 지리멸렬했던 인류의 레이스가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깨달은 사람들이 함께 벽으로 돌진합니다. 사람들이 그 거대한 벽에 몸을 부딪칠 때마다 쿵쿵 소리를 내며 그 벽은 먼지를 떨어냅니다. 벽은 아직도 단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이 벽을 뚫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이 자기 자신들만의 싸움이 아닌, 하나님의 싸움이라는 것을.
오늘의 본문은 마가복음 9장 38~50절
죄에 대한 경고(9:38~50)
요한이 말했다. "선생님, 누가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봤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를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능력을 항하고 나서 쉽게 나를 욕할 사람은 없다.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 편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물 한 잔만 주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너희는 메시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아라. 누구든지 이들 중 하나라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커다란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희 손이 너희를 넘어지게 하거든 잘라 버려라. 불구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다 가지고 결코 꺼지지 않는 게헨나의 불로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
너희 발이 너희를 넘어지게 하거든 잘라 버려라. 불구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다 가지고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너희 눈이 너희를 넘어지게 하거든 빼어 버려라. 한 쪽 눈으로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으로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소금 뿌리듯 불 뿌림을 당할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어떻게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너희에게도 소금이 필요하다.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1. 스모 선수, 요한
그리고는 요한이 말합니다.
요한이 말했다. "선생님, 누가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봤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요한이라면, 이 자리에 와서 저번 주 설교를 들어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설교 내용의 핵심은, 지금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스모가 아니라 마라톤이라는 것입니다. 스모는 어떠한 경기입니까? 자기 자신을 불려야 유리한 경기입니다. 스모 챔피언을 요코즈나라고 부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요코즈나는 아케보노라는 사람 한 사람 있는데, 이 사람은 이종 격투기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최홍만이랑 붙은 적도 있죠. 이 사람 키가 2미터 3에, 몸무게가 220키로 입니다. 저처럼 작은 사람은 아마 이 사람 보기에 레고처럼 보일 것 같습니다. 무수한 스모 선수들 중 요코즈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몸을 불려놔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가 밀고 들어와도 든든하게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모두 스모선수입니다. 재테크로 돈이 많아지길 바라고, 집이 커지길 바라고, 자동차는 남들에게 꿀리면 안됩니다. 내 성적 불리기에 여념이 없어서 때로는 부모님께 시험성적을 뻥 칠 지언정, 나를 크게 보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죽습니다. 이 사회는 여러분에게 요코즈나가 되라하고, 그 아래서 사람들은 계속 자신을 불리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처럼 불안과 위기를 느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큰 자가 되려하지 말고, 즉, 스모선수처럼 살지 말고, 마라톤 선수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첫 째, 일등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 마라톤은 어떠한 마라톤입니까? 꼴찌가 되는 마라톤입니다. 종이 되는 마라톤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한은 방금 이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사람들을 불러모아 거대한 세력을 만들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요한은 요한복음을 쓴 요한인데, 이러한 요한의 몰이해는 참으로 위로가 됩니다. 요한도 이렇게 예수님을 이해못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똑같거든요. 요한의 말은, "예수님, 우리가 살찌워서 이 사회의 든든한 요코즈나가 되어야 하는데, 저기 또 다른 살점들이 굴러다닙니다. 저거 다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든지, 아니면 예수님 이름으로 나대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2. 그 마라톤의 결승점 :
그 이름의 진가가 드러날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를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고 나서 쉽게 나를 욕할 사람은 없다.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 편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물 한 잔만 주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너희는 메시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요한과 예수님의 관점은 완전히 다릅니다. 스모선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거 지금 마라톤이라는 것입니다. 그 마라톤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섬김의 달리기"입니다. 지금 곳곳에서 예수님의 무리와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요한이 보기에, 이들은 예수 패거리의 힘을 더할 지방 덩어리들입니다. 이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더 몸무게를 늘릴 수 있습니다. 더 강력하게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제자의 무리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이 보기에 이들은 적입니다. 이들은 우리를 위협하는 또 다른 스모선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은, 그들이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내 편이 아니면, 내 적입니다. 지난 주에 배웠던 것이 기억나십니까? 정치적 관점.
사람을 내 편 아니면 내 적으로 보는 요한과 달리, 예수의 관점은 새롭습니다. 정치적 관점의 수렁에 빠지지 않는 신선한 시선입니다. 예수 일행과 함께 움직이지 않으나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지금 같은 경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라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께서 보시기에, 자신의 이름으로 귀신 쫓는 이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섬기는 달리기를 이미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악과 싸우는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작은 섬김을 한 사람이라도, 그는 이미 달리기를 시작한 것이기에 적대시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의 마라톤의 결승점은 어디일까요? 그 결승점은 바로 ‘이름’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섬깁니다. 물론 그 섬김은 어렵습니다. 자진해서 꼴찌가 되려하고, 자진해서 종이 되려는 섬김은 언덕길을 오르는 마라톤 선수처럼 쉽지 않은 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섬김의 결승점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 증명될 어느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섬깁니다. 그리고 그 섬김의 끝에는, 예수의 이름이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날 그 날이 있습니다. 그 날이 우리의 결승점입니다. 그렇다면 그 날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날입니까? 그 날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악, 구출, 땅입니다. 먼저는 악이 완전히 멸절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 날까지 섬겨왔던 이들이 구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의 주인이 백일하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 날, 모든 혀들이 자백하게 될 것이고, 모든 무릎이 꿇어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름 앞에. 그리고 그 이름을 붙잡고 섬김으로 달려왔던 이들에게는 월계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 월계관은 바로 우리의 썩을 몸이 받게 될 썩지 않을 새로운 몸입니다.
고전 9:24,25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리해봅시다. 자신의 몸을 불리는 스모 선수로 살면 안됩니다. 지금 어서 달리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 달리기는 예수의 이름으로 섬기는 달리기요, 그 달리기의 결승점에는 부활의 상이 있습니다.
3. 경기 규칙
예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아라. 누구든지 이들 중 하나라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커다란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희 손이 너희를 넘어지게 하거든 잘라 버려라. 불구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다 가지고 결코 꺼지지 않는 게헨나의 불로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
너희 발이 너희를 넘어지게 하거든 잘라 버려라. 불구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다 가지고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그리고 그 예수의 마라톤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서로에 대한 규칙이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규칙인데, 너무나 자주 무시되는 규칙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다리를 걸면 안된다는 규칙입니다. 이 말은 즉, 예수의 이름으로 섬기겠다고 하는 사람을 막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같이 섬겨주지는 못할망정 그 사람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안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엄정한 규칙입니다. 만약, 나의 손이 예수의 이름으로 섬기겠다는 사람을 넘어지게 한다면, 차라리 그 손을 잘라버리는 것이 나을 만큼, 내 눈이 옆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면 차라리 그 눈을 뽑아버리는 것이 나을 만큼, 이 규칙은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누군가 예수 이름으로 작은 것이라도 섬기려고 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절대 막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이 엄정한 규칙을 기억하십시오. 섬기려는 사람은 우리와 함께 달리는 중입니다. 독려해야지 말릴 일이 아닙니다.
4. 게헨나, 모두가 달리지 않을 때
너희 눈이 너희를 넘어지게 하거든 빼어 버려라. 한 쪽 눈으로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으로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구석에는 게헨나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 곳은 매캐한 연기와 악취로 코를 쥐게 만드는 쓰레기장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섬기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이 위대한 달리기에서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섬기는 사람 하나 없는 세상은 게헨나와 같습니다. 그 곳에서는 인격이 욕망에 불타 말라비틀어져 있고, 비인간성의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방의 빛으로 부름을 입었고, 그 빛은 로마에게도 비추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로마를 섬기기는 커녕 그들을 없애고자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로마와 이스라엘. 아무도 섬기려는 사람 없는 두 진영은 결국 격돌했고, A.D. 70년, 이스라엘은 게헨나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집과 거리는 불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임 당했으며,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갈 5:15, 새번역)
이것은 비단 국가만의 관계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섬김 없는 것은 곧 멸망의 전주곡입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에는 소금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소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소금은 예수의 이름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고난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소금의 삶은, 나는 고난을 겪을지언정 예수의 이름은 높아지는 삶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썩지 않는 방패가 되고, 그 분은 나의 섬김을 통해 악을 섬멸하는 검이 되십니다. 하나님과 나의 합동작전. 바로 섬김에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김치에 뿌려놓은 소금과 같습니다. 김치에 떨어진 소금은 곧 녹아서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름으로 섬기는 것은, 우리가 낮아지고 없어질 것을 요구합니다. 더불어, 소금은 녹으나 그 짠 맛은 김치를 보존하듯, 예수의 이름으로 섬기는 것은 관계 안에 있는 악을 흡수하고 소멸하고, 사람을 보존합니다.
모든 사람이 소금 뿌리듯 불 뿌림을 당할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어떻게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너희에게도 소금이 필요하다.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이 공동체에 소금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서로 섬기는 레이스를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 뛰는 것, 내 안에, 혹은 내 밖에 있는 그 섬김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 타인의 섬김을 결단코 막아서지 않는 것. 이것을 본문에서는 한 줄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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