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전농림수산부 장관이었던 김성훈씨의 강연에 다녀왔습니다. GMO, 유전자가 변형된 식품을 절대 먹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내용의 강의를 하면서 강조했던 문구가 있었는데, 그 문구를 보고 저도 생각한 바가 있어 이것에 관해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런 말이었습니다.
I am what I eat.
'내가 먹은 것이 나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먹는지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었습니다. 특히나 아이들 같은 경우, 성장 촉진제가 들어있는 것을 먹으면 2차 성징이 빨리오고, 인위적으로 합성된 물질들은 성격을 공격적으로 만들수도 있습니다. 유전자 변형 식품들을 쥐에게 2년간 먹여본 결과, 면역력과 복원력이 떨어지고, 여성의 경우 유방에 종양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이 중요하다. 유전자 변형 식품들은 먹으면 안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생활이라 말하면, 이 시대의 사람들은 삶에 있어서 선택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은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 이 '영적' 라는 말은 '숨쉬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영적'이라 말할 때, '영'은 'spirit'이란 단어를 씁니다. '정신'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기본 뜻은 '숨'이란 뜻입니다. 즉 '정신적인 숨'을 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인 이상, '정신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으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신적인 숨, 영적인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하물며 종교를 안갖겠다는 분들도 영화든 책이든 자꾸 보고자 하고, 하물며 예능을 봐서라도 정신으로 숨쉬려고 합니다. 그저 먹여주기만 하고, 재워주기만 하면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없는게 인간입니다. 우리의 입으로 먹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불어 우리의 정신으로 섭취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영적인 삶에서도 아무 것이나 먹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뭘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먹은 것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53~56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먹어!'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먹어야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유전자 변형 식품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게 아닙니다. 바로 '면역력'과 '복원력'입니다. 자연 속에서 길러진 것들은 하물며 잡초라도 면역력과 복원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먹으면 우리도 건강해집니다. 그런데 유전자 변형 식품은 인위적으로 생존에 유리하게 만든 것이라, 이게 없습니다. 그래서 먹으면 안됩니다. 나이 들어서 인슐린이 안나오고, 백혈구 수가 적정 범위를 벗어나고, 적혈구가 순환을 잘 못하게 됩니다. 즉 피가 제대로 못 돈다는 말입니다. 피가 제대로 못돌면 몸이 정화가 안됩니다. 더러운게 혈관에 쌓여가고, 결국 이게 동맥경화나 뇌졸중같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집니다. 젊은 날에는 이런 문제와 상관없이 살다가, 인생 말년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이 생기니까, 성인병이란 말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니 '예수를 먹는다'는 말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조물주의 완전한 유기농 인간이십니다. 사람 때를 타지 않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사람은 이 면역력과 복원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면역력과 복원력을 안가지려고 합니다. 이 면역력과 복원력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들을 오히려 피하려고만 하니, 길러질리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하나님의 유기농 인간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피를 흘릴지라도 죄에 맞서 싸웁니다. 십자가는 다른 것 아닙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죄 안져! 죽음으로 협박해도 진짜 나는 죄와 상관없는 나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운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내 몸이 해를 입더라도 죄를 안짓겠다는 것이 정신의 면역력입니다. 몸에서는 피가 흐를지언정, 이렇게 사는 것이 정신의 적혈구가 잘 순환하는 것입니다. 정신의 면역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를 무너뜨리려고 그토록 갖은 노력이란 노력은 다 해봤습니다. 그 면역력을 무너뜨려서 굴복시켜보려고, 회유도 해보고, 국가도 선동 하고, 로마라는 세계 대 제국을 이용해 보기도 했습니다. 끝내는 물리적 폭력을 사용해서 죽여서라도 굴복시키려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이 유기농 인간의 면역력을 인위적으로 끝장내보고자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면역력은 이 모든 죄악에서부터 자신을 지켰습니다. 몸의 적혈구가 밖으로 다 쏟아져 나올지언정, 정신의 적혈구는 순환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유기농 인간, 예수가 가진 복원력은, (제가 이 말을 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죽음마저도 극복하는 궁극의 복원력이었습니다. 부활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그저 일상의 우리 말로 하자면, '죽어도 안죽는다'입니다. 유기농 인간은 '죽어도 안죽으니까,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죄 안짓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평상시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의 평상시의 삶을 알지 않습니까? 그이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기르신 유기농입니다. 가장 탁월한 면역력, 가장 탁월한 복원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핸드 메이드' 하면 오늘날은 좋게 생각하지만, 적어도 사람의 정신에 있어서 핸드 메이드는 좋은게 아닙니다. 손으로 지은 성전은 하나님의 참 성전이 아니듯 말입니다. 참 유기농은 갓 메이드입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피워내는 생명력이 바로 '갓 메이드'입니다. 예수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따라, 하나님이 기르신 하나님의 유기농 인간, '갓 메이드 펄슨'이 되어야 않겟습니까?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 면역력과 복원력이 없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저 피부에 잡티가 없고, 나이를 먹어도 애들 얼굴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돈이 많고, 얼굴이 잘 생겨서, 대체 고난이라고는 겪어보지 못한듯 보이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유전자 변형 식품같은 사람들만 티뷔에 즐비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자꾸 보고 내면화하면 할수록, 우리는 고난과 상관없는 삶을 꿈꿀 뿐입니다. 면역력과 복원력을 기르는 일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진짜 필요로 하는 사람은 고난을 이기는 사람이지, 온통 똑같이 생긴 성형미인들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지만, 그런 사람들을 추종해봐야 고난을 이기는 참된 사람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 번드르르한 것만 따라가니, 참으로 망조입니다. 유전자 변형된 것만 좋아하니, 다 면역력과 복원력을 잃어갑니다. 애도 그렇고, 어른도 그렇습니다.
정신이 이상한데 팔려있습니다. 우리 정신은 그런데 팔리면 안됩니다. 정신줄은 정신적 숨줄이요, 이 숨줄은 하나님의 숨줄, 곧 성령줄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쏟아서 붙잡아야 할 것은, 고난없는 번드르르함이 아닙니다. 유전자를 변형시켜서 얻는 생존의 강함이 아닙니다.
예수를 먹읍시다. I am what I eat. 예수를 먹으면 내가 그리스도가 됩니다. 예수를 먹으라는 말은, 우리도 그러한 면역력을 가지고, 그러한 복원력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어떤 죄악의 파도가 몰려와도 나를 지켜내고, 죽음의 절망이 찾아와도 그 죽음으로부터 일어나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렇게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먹으면, 우리 속에 그 힘이 생깁니다. '고난 속에서 감사한다'는 그 믿음의 고백이 참으로 위대합니다. 고난 속에서 그는 예수와 같은 면역력으로, 예수와 같이 복원될 것을 바라며,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참 인간다운 것을 지켜나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이러한 사람입니다. 예수와 같?은 사람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먹고, 그 예수를 먹고 힘내어 고난을 이겨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봅니다. 성경 밖에서도 그러한 믿음의 선배들은 알곡처럼 자라나, 하나님의 유기농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그리고 바울, 폴리캅, 어거스틴, 아퀴나스, 언더우드, 아펜젤러, 주기철, 손양원... 다 예수를 먹고, 면역력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죽음으로부터의 복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서두에 영적인 삶이란, 정신적 숨을 쉬는 삶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정신줄이란, 바로 죄악과 맞서는 십자가와, 절망에서 다시 일어나는 부활을 붙들고 사는 삶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이 정신줄을 가리켜 '성령'이라 부릅니다. 성령 붙잡고, 하나님의 유기농 사람으로, 하늘 사람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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