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7~12, 개인번역

 

[1]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참을 말하마.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오히려 좋아.

만일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곁에서 돕는 이가 너희에게 오지 않기 때문이야.

그러니 내가 나아가리라.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마.

 

[2]

그가 와서 코스모스를 꾸짖을 거야.

비뚤어짐에 대해서, 의로움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말이야.

먼저 비뚤어짐에 대함은, 

그들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리고 의로움에 대함은, 

아버지 아래로 내가 이끌린다는 말이야. 

(너희가 결코 나를 보지 못할게다)

그리고 심판에 대함은, 

이 세상 다스리는 이가 벌써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란다.

 

[3]

아직도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지만, 

너희가 받을 수 없어.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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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숨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본문이다.
[1]  '진리'라는 말을 '참'으로 풀었다. 희랍어로는 '알레떼이아'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레떼'강을 건넜다"는 의미다. '레떼강'은 망각의 강이다. 여길 넘어가면 사후세계로 넘어가는데, 이생에서의 삶의 기억은 모조리 지워진다. 비신화를 통해 이 속에서 의미를 찾아보자. 살몸을 입고 살아가는 인생은 유한하다. 무언가 좋은 뜻을 가지고 일을 벌여놔도, 그 훌륭한 사람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과거에 대한 낭만을 가지고 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낭만, 공자로 치면 요순시대에 대한 낭만, 어른들 회상하시길, "그 땐 살만했지" 라고 말하는 그 과거의 낭만. 그러나 그 과거의 낭만은 현실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과거를 미화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 낭만은 애시당초 죽음의 벽을 넘어 현실까지 전달될 수 없는걸까? 하여간, 그렇게 이러나 저러나 인간 앞에는 죽음이라는 큰 벽이 가로막혀 있고, 이것은 세대로부터 세대로 무언가를 전수하고 전달하는데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다. 그런데 '참'이라 함은 죽음을 넘어섬이다. 죽음을 넘어서, 망각을 넘어서, 태초와 맞닿아 있는 진실이, 기억이 전달되었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그 참을 말씀하신다. 그 참은 충격적이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오히려 좋아." 예수 없는게 더 좋다니! 이유를 들어보자. 예수께서 떠나가야, '곁에서 돕는 이'가 오시기 때문이라 하셨다. 이 '곁에서 돕는 이'라는 말이 개역성경에서는 '보혜사(保惠師

)'다. '지키고 베푸시는 스승'이란 뜻이다. 그랬더니 '신천지'라는 이단에서는 자신들의 교주 이만희를 가리켜 보혜사라 한다. 개역한글만 넘어가면 들어맞지도 않은 단어 풀이로, 많은 이들이 속았다. 굳이 원어를 모르더라도, 문맥만 봐도 저런 해석이 나올 수 없다. 원어로는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을 쓴다. '파라'는 '곁에서'고, '클레토스'는 '부르다'라는 뜻이다. 즉 곁에서 격려하고 위로하는 이를 가리켜 보혜사라 하고, 이 보혜사는 어느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성령(숨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니 내가 나아가리라.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마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다니엘서 7장의 <인자 이야기>를 배경으로 두고 있다.

 '옛적 부터 계신 이'가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했던 짐승들을 심판하신다. 그리고 인자는 그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아가'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이양받는다. 따라서 인자 이야기는 왕위 대관식이다. 

 

다니엘 7:13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사람들을 괴롭게 하며, 이 땅의 주인행세 하던 짐승들의 무리는 토벌되고, 참 아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승계받는다. 이 인자 이야기는 '승천'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가심은, 그 자신이 인자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는 하늘에서 온누리의 왕되심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으셨다. 바로 그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땅으로 하나님의 숨결을 보내주신다. 즉 십자가가 끝이 아니고, 뒤에 부활이 있다. 부활이 끝이 아니고 뒤에 승천이 있다. 승천이 끝이 아니고, 뒤에 보혜사이신 숨님 보내주심이 있다. 숨님 보내주심이 끝이 아니고, 우리의 삶이 있으며, 우리의 삶이 끝이 아니고, 인간과 세계가 모두 부활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2]

  예수께서 살몸으로 우리 곁에 계시는 것보다, 이 곁에서 돕는, 성령님이 우리 옆에 있는 것이 더 좋다 하셨다. 이 말은 예수가 우리 옆에 계신 것보다 이만희가 옆에 있는게 더 좋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과 같이 밥먹고, 말씀 배우며 영원히 살면 좋겠는데, 그 분이 기어코 40일이 지나고선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가신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바로 숨님으로 호흡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와 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다. 예수께서 그 거룩한 숨결로 호흡하셨듯, 모든 이들이 같은 숨결로 호흡하고,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생각과 힘을 얻어 살기 위함이다. 그렇게 예수께서 혼자 하셨던 그 일을, 이제 모두가 한다. 숨을 쉬며 모두가 그리스도로서 산다. 그러니 "더 좋다". 그렇게 이스라엘이라는 경계와 A.D 1세기의 경계를 넘어,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그 숨을 들이 마실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인자의 사명이다. 인자로 인해 모두가 인자가 된다. 이것이 십자가를 매고서 골고다를 오르신 이유다. 모두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다.

 

  그럼 그 숨으로 호흡하는 이들은 무슨 일을 함께 하는가? 세상을 꾸짖는다! 예수께서 공생애기간 내내 하셨던 일을 이제 함께 한다. 숨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증언해주시는 바에 따라, 세상을 꾸짖고 바로 잡는다. 숨님께서 꾸짖으시는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먼저는 '삐뚤어짐'이다. 삐뚤어짐은 '죄(罪)'라는 단어를 나 나름대로 풀어본 말이다. 희랍어로 '죄'는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뜻이다. 한자로는 위와 같이 쓴다. 이 한자 모양도 참으로 신기하다. 아래로는 '둘'이 있다. 마치 삶과 죽음 외에는 새로운 길은 없는 것 마냥, 나와 너 외에 다른 이는 없는 것 마냥, '이다', '아니다'만 있다. 이 '둘'이 세상의 모든 균열을 만든다. 사람은 '하나'를 모른다. 그럼에도 스스로 선악의 판단자가 되어 선악과를 스스럼없이 따먹는다. 옳고 그름을 판단 하시는 한 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삶은 둘로 찢기고 분열한다. 너와 내가 싸우고 반목하여 상처들을 만든다. 

그래서 이 둘로 찢고 상처내는 일에 열심내는 것을 억제하도록, 그 위에 무언가 놓였다. 非위에 놓인 '그물망머리'다. 죄가 극단으로 치닫지 못하도록 인간사 둘러친 결계로, 곧 법(法)이다. 율법이다.(에덴을 지키고 서 있는 불검도 법일 것이다. 흔히 '법없이도 살 사람'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그처럼 법을 넘어선 인의(仁義)로 사는 것이 에덴으로 들어가는 길이리라. 외부의 구속없이도 참을 실천할 수 있는 인격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격이리라)


  모든 사람이 삐뚤어져 하나에 이르지 못하고, 둘 밖에 모른다. '나는 책임 없으니, 니가 책임져라'라고 말하는 이는, 용서하시는 한 분을 모른다. 그러니 하나를 말하는 사람 예수, 둘을 싸매고 셋으로 돌아가는 예수를 몰라본다. 오히려 그이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운다. 하나님(天)과 함께 모두(人)가 숨(靈)쉬는 세상(世)을 말한 그이인데, 도리어 그이가 죽임을 당한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그를, 법의 이름으로 살해한다.(반대로 그이의 죽음으로, 법이 죄 없는 사람의 생명도 앗아갈 수 있음이 드러났다.) 

그이의 이름이 예전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다. 그이의 이름은 정말 흔한 이름, 이 지구에 나서 그이의 이름을 못들어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니 따르지도 않는다. 그이의 죽음을 그토록 방관하던 그 시절처럼, 오늘도 그이와 같이 사는 이가 없는 것은, 둘 때문에 하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가 죄가 있다. 그를 따르지 않으니 모두가 죄인이다. 둘 밖에 안보이니 죄인이다.


  숨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두번째는, 의(義)다. 상상을 해보자. 죄(罪)는 '둘'이라고 앞에서 말했는데, 저기 '非' 사이를 지나간다고 생각해보자. 서로 '이다', '아니다' 편을 나누어 싸우는 저 '아닐 비'의 사이 말이다. 양편의 싸움은 마치 성난 파도와 같은데, 저 파도를 가르고 지나간다. 그 길은 제3의 길이다. 하나에 이르는 제3의 길. 마치 출애굽과 같다.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 갈라진 바닷길이다. '나 아(我)'는 창을 들고 싸우려는 모습의 글자다. 아직도 싸우려하고, 남이 나를 죽일 것 같아서 무기를 들 수 밖에 없는 나인데, 그러한 내가 어린양(羊)을 알게 되었다. 그 어린양을 머리에 이고 그 길을 따라간다. 그 어린양의 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길이다. 줄곧 제3의 길이다. 세리도 친구요, 여자도 친구요, 어린아이를 들어 축복해주시던 그에게는 원수가 없었다. 나와 너로 나누어 싸우는 사람들 사이를 '원수를 사랑하라'는 울림으로 지나간다. 싸우는 양편을 화해시키는 새로운 길. 그이는 모든 둘을 뚫고 그 길로 간다. 이스라엘과 로마의 분열 한가운데에서도 그이는 한결같았다. 양쪽 사이로 걸으신다. 그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사이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모든 가운데의 가운데의 가운데에서 화해를 위해 죽으셨다. 
  그런데 그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죽었던 그를 하나님은 일으키시어, 하늘로 이끄셨다. 이 역시 <인자 이야기>를 배경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없이 계신 이는, 이 예수의 삶을 옳다고 인정하셨다. 즉 義는 하나님의 인정이며, 하나님께 인정받은 이는 예수이고, 그 예수가 우리의 義가 된다.

 

 

  그래서 요약하면 '죄'는 '둘'이요, '의'는 '셋'이다. 


  숨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심판'이다. 희랍어로는 '크리노스'라는 단어를 쓴다. '심판'이라 번역되기도 하고, '판단'이라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번에도 한자를 파자하면서 의미를 풀어보려한다. 判. 칼로 반을 나눈다는 말이다. 선악과 사건을 다시 생각해보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는, '네가 선악의 판단자가 아님을 알라'는 말이다. 누가 세상 일을 칼로 정확히 잘라서 판단할 수 있는가? 누가 옳고 그름에 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가? 한 분 뿐이시다. 예수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 판단자를 이렇게 부른다. 아빠!
  즉 하늘 아빠만이 옳고 그름을 칼 같이 자르실 수 있다. 그 분만이 옳으시다! 없어야 하는 것을 없게 하시고,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시니, 그 분은 참으로 창조주시다! 그럼 무엇이 없어져야 하겠는가? 악(惡)이다. 그 분이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셨으니, 인간과 세계는 있어야 하리라, 그 속에서 악은 사라지리니, 그 분 안에서 인간과 세계가 온전해지리라! 온천하에 없어야 할 것은 없어지고, 있어야 할 것은 있어질 것인데, 사람은 어찌 될 것인가? 사람은, 인격은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다! 심지어 당신의 원수 마저도!
  이 심판의 진실이 보여주는 충격은, 바로 심판 장면에 있다. 생각해보라. 옳고 그름을 반으로 자르시는 그의 칼이 누구에게 떨어졌는가? 사람에게 떨어졌는가?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에 떨어졌는가? 아니다. 옛적 부터 계신 이의 아들에게 떨어졌다. 그의 아들이 도축당하는 양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꼭 있어야 할 그 분이, 세상 죄를 지시고 없어지셨다. 이 사건 때문에 없어야 할 악이 치명상을 입었다. 창세기 3:15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 목숨으로, 혹은 글자(法)로 사람을 묶어두던 악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버렸다! 법으로, 국가로, 제국으로,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하고 있었던 그 어두움의 실체가, 십자가 아래서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예수는 논개와 같이, 그 어둠과 함께 죽으셨다. 있어야 할 분이, 없어야 할 것들과 함께 죽으셨다.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권위들이 실은 옳은 사람 마저도 죽일 수 있는 것임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민중, 지도자, 조국, 제국,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사람에게 참된 삶을 줄 수 없었다. 

 

  그럼 무엇이 사람을 참되게 하는가? 숨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이 둘로 가득한 세상속에서 하나(님)를 따라 제3의 길을 판단하게 만든다. 마치 서로 자기 애라고 주장하던 두 여인앞에서 솔로몬이 내린 판단과 같다. 솔로몬의 판단은 둘중에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판단이 아니었다. 제3의 판단, 숨의 판단이었다. 그 결과, 아이도 어미도 기쁘게 숨쉴 수 있었다. 예수는 목숨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셨다. 즉 따라가셨다. 그리고 자신이 믿은 바대로 목숨보다 더 큰 숨으로 살아나셨고, 지도자들보다 높은 곳에서 하늘숨을 부어주신다. 

 

  바로 당신에게. 바로 우리에게 오늘 이 숨이 열려있다. 우리도 예수를 따르면, 새로운 숨이 우리의 정신의 허파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이는 하나님의 새창조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이 거룩한 숨으로 도장을 받아, 이제 새로이 평가 받는 존재로서 사는 것이다. 더불어, 숨쉬는 이는 옳다. 숨 주심은 하나님의 옳다는 인정이다. 그래서 숨으로 도장받는다 말이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옳다 하신 이러한 사람을 말의 체계로 쌓은 법이 평가할 수 없다. 둘의 세상은 이러한 사람을 감당할 수 없다.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한 분의 평가 속에 이 사람은 살아가기에 이 사람은 법 없이도 산다. 법을 넘어 하나님께 닿는다. 그렇게 이 사람도 제 삶에서부터 없을 것을 없애고, 있을 것을 있게 한다. 하나님의 새창조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모든 말을 요약하면, 罪義判이요, 숨님께서 이것을 깨치게 하신다. 당신을 죄있다 정죄하고, 의와 상관없다 말하며, 당신을 심판하고자 하는 깨침이 아니다. '둘'에서 벗어나 '셋'으로 살아, 하나님과 '하나' 되자는, 호흡으로 쓴 초대장이다. 
[3]  예수는 말씀을 아끼셨다. 이 이야기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십자가-부활-숨 보내심-새롭게 사는 사람들-인간과 세계의 구원' 의 큰 그림. 그래서 한 번에 알 수 없고, 차차 시간과 과정과 겪음이 필요하다. 마치 누군가를 사랑하는 과정과 같다. 

 

1155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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