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다. 흔히 예수님의 기도라하면 '주기도문'이 잘 알려져 있지만, 주기도문은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에게 주신 공동체 선언문이고, 이와 달리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기도다. 요한은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을 들었고, 요한복음 한 복판에 이 기도문을 배치시켰다. 그리고 이 기도문을 따라 요한공동체는 기도하고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이 과정속에서 기도문이 공동체의 성격에 맞게 다소 수정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맨 마지막줄의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같은 부분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을리는 없을테니까. 아마도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그렇다고 그러한 수정을 통해 의미의 왜곡이 있어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분명 이렇게 기도하셨다. 보이는 글자와, 보이지 않는 의미를 붙잡으면 그 분의 인격이 선명하다. 한 입에서 나온 말과 숨이 분명하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신다. '아버지'는 '我받이'다. 내가 받들어 모셔야할 분이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그 분이 보이는 모든 것의 존재의 근원, 토대가 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 때문에 모든 것이 있다. 그래서 그 분을 창조주라 부른다. 그런데 세상은 그 아버지를 모른다. 온통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된 사람들은,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근거를 잊고, 삶에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받들어 모시고자 한다. 서로 자신을 받들어 모시라 하는 세상은 힘겹다. 인격은 물질로 대체되고 질서는 무질서로 전복된다. '물질'과 '무질서'의 부질없는 질고의 세상. 아버지를 버린 세상. 이 속에서 모든 이가 괴로워한다. 존재근거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사람들.
사람과 사람이 상처를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대개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보이는 것 때문이다. 돈 때문에, 더 갖기 위해서 삶이 망가지지 않는가? 또한 자신의 '몸뚱이' 때문이다. 자신의 몸뚱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숱하게 희생시키지 않는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격에 상처를 주고 너와 내가 망가지지 않는가? 내 물질과 내 몸뚱이 받들고자 하니까 영생을 살 수 없지 않은가? 이런 세상 속, 아들의 아버지 드러내기. 아들의 아버지 드러내기는 아버지의 아들 드러내기와 같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뚜렷하게 하는 관계.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다른게 아니다. '살몸'에 대한 모든 권한을 주심이다. 그 권한이라 함은 눈에 보이는 살몸을 다스리는 보이지 않는 인격이다. 물질과 몸뚱이에 끌려다니지 않는, 오히려 물질과 몸뚱이를 부리고 다스리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인격이다. 이 사람이 아버지를 드러낸다. 곧 아들이다. 이 아들을 보라. 살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물질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다. 다만 살몸의 욕망과 물질에 대한 추구는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다. 사람의 인격은 이것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은 性이라 하면, 남성, 여성의 그 성이 떠오르지만, 본래 性은 남성과 여성에 관련된 것을 가리키기 전에, '인간성', '인간됨'을 뜻하는 글자다. 本然之性. 근원으로부터 연유한 인간성이다. 곧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로부터 온 인격. 살몸을 따라다니는게 아니라, 능히 뜻이룸에 살몸을 쓸 수 있는 인격이 본래 인간성이다. 언행일치, 지행합일의 인격이 본래 인간다움이다. 허나 오늘날의 살몸의 욕구는 우리에게 너무도 민감하고 크게 느껴진다. 그만큼 이 시대는 살몸의 욕구가 사람들의 본연지성을 죄다 덮어버린 시대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살몸에 대한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이가 몸을 몸답게, 물질을 물질답게 인격으로 다스리신다. 눈에 보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순종하여, 만물이 그 아들을 통해 순하게 운용된다. 아들은 本然之性의 사람이다.
또한 아들은 자신의 살몸에 대한 권한만을 받은 것이 아니다. '모든 살몸'에 대한 권한이다. 다른 이의 살몸도 다스리신다. 제 위치를 잃고 요동하는 살몸 때문에 인격이 망가진 숯한 사람들을 찾아가셨다. 곧 병자들이요, 귀신들린 자들이다. 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그는 온전한 인격. 너와 나의 살몸을 살몸답게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만약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인격이 된다면, 살몸과 물질에 더이상 저당잡혀 살지 않을것이다. 이 말 앞에 내 인격이 얼마나 약하고 초라한지 나는 안다. 몸을 이긴다는 건, 내 속에 탐진치를 누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언행일치, 지행합일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나는 아들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아들을 바라본다. 뱀에 물린 이가, 다시 살아나 살고자 아들을 바라보나이다, 아버지를 받들어 모시나이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시간이 돌입했다고 말씀하신다. "때가 왔습니다" 무슨 때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드러낼 때다. 존재의 근거를 찾을 떄다.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 보이는 것이 정돈되는 떄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어찌 드러나시는가? 아들을 통해서 드러나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눈에 보이는 그의 아들을 통해 드러난다. 세상이 제 뜻을 잃어버린 단어들이라면, 아들은 근원으로부터 제 뜻과 곧게 연결된 단어요, 표상이다. 세상이 링크가 꺠진 url이라서, 뭔가 있는듯하여 눌러봐도 언제나 웹페이지를 찾을 수 없다고 뜰 뿐이지만, 아들은 분명한 링크를 가지고 있어서, 누르면 아버지에게 닿는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지금'은 '때'인지라,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낼 때고, 아들은 다름아닌 당신과 나라는 사실이다. 아들을 따른다는 우리가 아들이다.
사람이 그 아들을 통해 존재 근거를 다시 발견하고, 모셔야 할 분을 바로 깨달으면, 삶의 삶다움과 질서가 회복된다! 그런데 그 아들이 곧 우리다. 몸을 이겨 보이지 않는 인격의 승리를 드러낼, 다시 살아난 삶을 살아야 할 이가 바로 우리들이다. 곧 우리는 몸과 물질을 다스리는 인격의 사람이요, 탐진치를 눌러 뜻을 이루는 사람이다. 몸의 느낌과 맛을 따라 살지 않고, 무색무취의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따르는 사람이다. 이러한 삶은 토대와 근원을 몰랐을 때의 삶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고, 이것을 꺠닫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시절이기에 이렇게 부른다. '영생'. 곧 오는 시대다. 오는 시대를 사는 것은 한 분 참 근원이신 아버지를 아는 것이요, 그를 깨달음은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깨닫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살몸을 다스릴 권한을 얻어 나와 너를 갱신시키는 삶이다. 인격혁명으로 살몸과 물질을 제 위치에 가져다 놓는 삶이다. 그렇게 근원이신 아버지을 드러내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