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두 가지 싸움이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느냐. 아니면 분명히 아는 것을 예배하느냐.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예배는 무언가에 대한 추구니까. 자기 눈 앞에 있는 것만 보든, 멀리 있는 것을 보든 사람은 무언가를 추구할 수 밖에 없잖아.
자신이 예배하는 대상을 아느냐, 모르냐가 중요하다. 참으로 알면 몸으로 관계한다. 형이하의 말로하면 성관계다. 性관계는 몸관계요, 몸을 통해 그이의 본성(本性)을 나눔이다. 즉 그 분의 본성을 겪음으로 앎이다. 솦이아(sophia, 숨으로 겪어감)다. 당신은 그이를 아는가? 그이와 몸으로 관계가 있는가? 있다면 당신은 알고 예배하는 것이요, 없다면 당신은 그이의 그림자 속에서 헤맬 뿐이다.
몸으로 관계함은 기쁨을 가져오고, 그 기쁨은 한순간 쾌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참기쁨은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는 다름 아닌 그의 DNA가 이 땅에 나는 것이다. 곧 출산이다. 이 땅에 없던 사람이 새로 생겨남이다. 그러니 그이를 아는 이들은 구체화(求體化)해야 한다. 생각이 몸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본문에서 '예배'는 '프로스.퀴네테스'. 라는 단어를 쓴다. 프로스는 대상이고, '퀴온'은 '개'다. 즉 예배는 '어느 대상을 향해 개가 되는 것'이다. 개가 된다는 말을 욕으도 듣지 말아라. 아니다. 개가 되어도 좋다. 그이를 따를 수만 있다면, 밥상 부스러기를 받아 먹는 개 라도 좋다. 개는 언제나 忠이다. 한 줄로 맘이 뚫려서(忠), 오직 주인만 바라본다. 이런데도 이 구절의 '예배'를 '예전(禮典)'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가? 예배는 예전에 가둘 수 없다. 예배 내내 개를 앉혀놓을 수 있는가? 주인이 거짓말쟁이들로 가득한 예배당 밖으로 나가는데, 개는 가만히 앉아서 예전에 참여하겠는가?
그러니 생각을 고쳐먹자. 예배는 忠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무엇에 대한 충인지를 묻자. 예배하지 않는 이는 없다. 당신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무엇으로 삶의 무의미를 뚫어내고자 하는가? 문화에 대한 고상함? 자신의 식견? 몸에 대한 자랑? 뚫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은 끝내 미제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충성할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다. 미래의 끝에 계시는, 그 없이 계신 이에 대한 충성. 이러한 충성만이 맘과 몸을 한 줄로 뚫어낸다. 그렇게 그의 아들과 몸으로 연결된 나. 그래서 나를 통해 태어나는 그이의 아들들. 그럼 그이는 나의 신랑, 나는 없이 계신 이의 아이 낳아드리는 며느리다.
그런데 그이의 신부라면서 너는 왜 출산을 하지 않느냐?
왜 그의 생각을 사람 되게 하려고 산고의 고통을 겪지 않느냐?
왜 아이를 낳기를 싫어하냐? 그것 안하고 무엇 하려 하느냐?
자로의 말처럼 忠은 信이으로, 信은 習으로 가야 한다. '날마다 깃든다(習)'는 말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무엇이 깃드는가? 기존에 신령이라 번역된 말은 '프네우마'다. '성령'이요, '숨'이다. 곧 없이 계신 이의 생각이요, 힘이다. 이것으로 마음을 한 줄로 뚫어, 그 속에 참말을 넣고, 날마다 제 속에 숨을 불어넣어 말이 사람되게 한다. 닭알을 품은 어미닭과 같다.
참은 무엇인가? 참은 '가득참'이다. 거죽, 거짓의 반댓말이다. 그럼 무엇이 가득차냐, 쓰잘데기 없는거 아니라, 숨으로 가득채운다. 허파를 크게 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숨을 가득 들이마신다. 그럼 참이다. 참인 사람은 절망할 수 없다. 숨이 온천지에 가득함을 제 속에서부터 알게 되었는데, 절망할 수 있나. 숨이 우리 속에 가득 차면, 罪와 義와 判에 대해서 참 알게 되리라. 罪義判이 보여주는 미래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되리라. 그러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 하는 말은, "숨을 가득 채워 충성한다"로 고쳐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숨'과 '참'으로 '충'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신다. 이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 참 제자요, 사람을 낚는 어부다.
이 사람은 이 땅에 없던 이를 죽음의 바다에서 건져내는 이다. 이렇게 충할 때는 언제인가? 지금이다. 그 때가 지금이다. 그래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