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주의 이름 부르는 자, 숨으로 주를 만나리

*이 부분만 따로 설교하게 되어, 분량이 늘어났습니다.


1) 곧이 곧, 그러니 곧이 곧대로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떤 날입니까? 마지막날입니다. 그런데 아직 주의 날이 오지 않았습니다. '주의 날'은 마지막 날의 끝날입니다. 여기서 '주'는 심판하시는 예수이십니다. 하나님의 차원으로 몸을 감추이신 그 분이 다시 나타나시어 마지막 날 마저도 끝이 납니다. 숨을 주시던 이가 마침내 얼굴을 드러내시는 날입니다. 그 얼굴 뵈었을 때, 당신은 기쁨으로 맞이하겠습니까? 두려움과 공포로 떨겠습니까?


  숨은 눈으로 보이지 않아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살게 합니다. 다 숨을 들이키며 사는데, 정작 숨은 우리 일상에 아무런 걸림도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살게하는 숨은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숨 덕'에 사는 줄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있습니다. 내가 숨 덕에 산다는 사실을 알면, 내 호흡 하나 하나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리고 이 숨을 값없이 주시는 분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키다리 아저씨>를 다 아시지요? 이 아저씨는 돈이 없는 한 아이를, 말 없이 뒤에서 후원해주는 아저씨입니다. 이 아저씨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한 아이를 살게 합니다. '내가 널 먹이고 있지'하며 뻐기지 않습니다. 마치 숨과 같습니다. 이 숨과 같은 아저씨 덕택에 아이는 부모가 없어 가난해도, 학교를 가고 책을 사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자신을 후원해주시는 아저씨의 얼굴 보기를 고대할까요? 아니면 두려워할까요?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숨으로 호흡하며, 이 숨 때문에 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얼굴 보기를 무척이나 고대하지 않겠습니까? 고마운 마음이 크면 클수록 더욱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키다리 아저씨의 얼굴 보기가 두렵고, 꺼려지는 것은, 자신이 키다리 아저씨의 덕으로 산다는 것을 모를 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숨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 숨으로 사는 줄도 모르고, 그 숨이 귀한 줄 모르니까, 그 숨 주시는 아버지의 얼굴 보기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타나시면 내 삶에 괜히 성가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데에 정신 팔려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데 정신이 팔리니,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있는지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다른데 팔아버리면 안됩니다. 우리의 정신은 온통 하늘숨에 내주어야 합니다. 그러자고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 부어주신 것 아닙니까? 눈에 안보인다고 없는게 아니라, 눈에 안보이는 것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살게 합니다. 그러니 먼저 성령을 알고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성령 받으면 성령 주시는 아버지를 알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날마다를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은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을 어찌 표현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곧이 곧, 곧이 곧대로" 라 하면 좋겠습니다. '곧'은 '곧다'. '일직선으로 삐뚤어짐 없이 쭉 뻗어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어떤 날이 금새 온다'고 말할 때, '곧 온다'. '속히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곧이 곧"이란 말은, 삐뚤어짐 없는 곧은 그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멀리 있지 않고 곧 옵니다. 그래서 "곧이 곧"입니다. 곧은 세상이, 곧은 그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속히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 어찌 살겠습니까? "곧이 곧대로" 삽니다. 그런데 이 땅에 곧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 땅에는 곧은 것이 없습니다. 온통 삐뚤어진 세상입니다. 땅에는 곧은 것이 없고, 오직 하늘에만 곧은 것이 있습니다. 그 하늘로부터 내려온 곧은 것이 곧 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생각'이다, '주의 마음'이다 합니다. 곧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숨. 이 하나님의 숨결만이 곧습니다. 그 숨 고대로 받아 그 곧대로 살아야 합니다. 남들이 뭐래도 곧은 것 따라 곧게 살아야 합니다. 하늘숨이 삐뚤어짐 없이 곧게 내려와 우리 속을 채우게 해야 합니다.  그 숨을 받아 우리의 속알이 숨쉬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곧이 곧, 곧이 곧대로" 입니다. 곧이 곧되게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 전체가 곧게 되는 날이 곧오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내일인것마냥 살면, 우리의 오늘이 곧을 것입니다. 


2) 주의 이름은, 주의 이룸


  요엘과 베드로는 같은 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지막 날을 살고 있는 우리가, 주의 날 오기까지 이렇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보존될 것이다.


  이 말은 그냥 이름만 불러재끼면 다 된다는 말 아닙니다. 이름은 '말'입니다. 그런데 말로 끝나면 되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오히려 '말만 잘한다', '말은 청산유수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이 그저 '말'뿐이라면, 백날 불러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을 자꾸자꾸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여 주여 해봐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이름만 불러봐야, 말만 해봐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들어가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어찌 해야 합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합니다. 이 말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름은 이룸'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그저 "철수야", "영희야" 부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일제치하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초들입니다. 제국주의의 군홧발 아래서, 여러분이 조선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건 단순히 말만하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새로운 주권의 선언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짓 왕의 압제와 폭정 속에서, 진짜 왕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말로만 되겠습니까? 그 이름에 대한 신뢰, 그 이름을 믿고 따름, 그 이름이 이 땅에서 선언되고야 말리라 소망하지 않고서야, 짓눌린 상황 속에서 어찌 그 이름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름은 이룸입니다. 현실을 뛰어넘어 그 왕이 이루실 일을 믿고, 바라고 살아갈 때에, 비로소 그 왕의 이름을 참되게 부릅니다. 이 말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이 땅에 곧은 세상 곧 가져오실테니, 우리도 곧게 살자는 것입니다. 이러면 아버지의 이름을 정말 부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부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어디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려우니까 진짜입니다. 어려우니까 돌파하고 극복할 거리가 있습니다. 이 어려움에 부딪칠 때 주의 이름을 정말로 부를 수 있습니다. 어그러진 세상에서 곧게 서고자 해보세요. 그럼 힘이 들 것입니다. 더불어 눈에 뵈던 것이 하나도 위로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걸리고 치이고 절망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숨결이 비로소 느껴지고, 사람 속을 시원하게 하는 건 성령 밖에 아니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곧게 서고자 하는 사람을 도우시는 그 숨결이 분명하게 깨달아질 것입니다. 이전에 내가 눈으로 보았던 착각들이 깨지고, 그 깨진 틈 사이로도 하나님의 숨결이 쉴새없이 들어오고 나감을 알게 됩니다. 이 숨결 아는 이가 숨결 주신 이의 이름을 부릅니다. 자기 삶으로 분명히 아니까 부릅니다. 그리고 그 부름에 왕은 응답하십니다. 민초의 부름에 응답하는 왕으로, 그 분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이름은 이룸입니다. 왕께서 이루신 그 일에 내가 들어가고자 할 때, 우리는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숨결을 느끼는 자가 부르는 주의 이름은, 주님을 부르는 소환주문입니다. 주님이 그 소리를 외면하실리 없습니다.


  따라서 주의 이룸에 참여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왕의 이름을 선언하는 것은, 그 분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결코 말로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는 고속도로가 아니기 때문에 목소리 크기로 하는거 아닙니다.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3) 그 다스림 안에서 사는 자, 보존될 것이다. 죽음을 넘어.


  말에는 숨이 있고, 숨에는 그 숨을 내쉬는 인격이 있습니다. 그 인격에 닿자고 말하는 것이지, 인격과 상관없는 말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친구 집 밖에서 친구 이름을 한참 불렀는데, 그 친구가 막상 나오니까, "너 왜 나왔어? 난 그냥 이름만 불러본거야" 하는 이런 얼빠진 경우가 어디있습니까? 따라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주를 만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 마지막 때와 주의 날 사이에 우리를 어찌 만나주십니까? 숨으로 만나주십니다. 그 숨을 만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예수를 따라 살아봐야한다 했습니다.


  다시 순서를 역순으로 정리해봅시다. 먼저 예수를 따라 살아봅니다. 작은 것이라도 좋습니다. 분명히 옳은 일이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그 일에 부딪쳐보는 것입니다. 예수의 삶은 줄곧 부딪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곧이 곧대로 진리가 진리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옳은 일이 있다면, 그 일에 부딪쳐보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를 따른다고 할 때, 이것을 가리켜 '믿음'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믿음은 따름입니다. 성서는 결코 말로만, 머리로만, 느낌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을 따라 옳은 일을 위해 부딪쳐야 합니다. 


  그럼 그 부딪침 속에서 우리의 새로운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그 감각은 바로 하나님의 숨을 느끼게 하는 감각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어도, 생각으로 다 이해할 수도 없어도, 오늘 내 속을 들락날락 하시며 힘 주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게 됩니다. 옳은 일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이 숨줄로 우리와 하나님과 연결되어,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고, 우리가 참말을 하며, 볼 것을 보도록 헌신하며,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곧 성령을 호흡하며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점점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 받은 자는 더욱 숨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숨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숨 주시는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숨 받기 위해 이름 부르면, 그 이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숨을 부어주셔서, 자신이 분명히 살아계심을 증거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렇게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숨 받아서 숨으로 말을 이루며 사는 삶을 계속 이어갑니다. 역사를 이어갑니다. 그 때 그 사람의 말은, 숨에 말 붙이니 말숨이요, 미래를 내다보는 말이 되고, 먹음에 너와 내가 없으니, 모든 사람과 화평을 추구하는 자가 되며, 죽음에 먹히는 인생의 끝자락에서도 그 죽음을 이기는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보존될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구든지 보존될 것입니다. 여기 '보존'이라는 말이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을 넘어 인격에 닿은 사람, 하나님께 곧이 숨줄로 연결된 이 사람은, 끝이 없도록 그 인격이 보존된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숨을 따라서 그 인격이 하나님을 닮아 갑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고, 원하시는 것을 보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으며, 하나님과 같은 소망으로 달려갑니다. 이러한 인격이 구원된 인격이요, 죽음을 넘어 영원히 보존될 인격입니다. 곧 예수의 인격입니다. 인격이 점점 자라납니다. 영원합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보존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대적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이 있어 썩습니다. 썩기에 보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숨줄로 연결되면 보존됩니다. 썩지 않는 몸을 얻습니다. 죽음을 그렇게 이깁니다. 아들 딸도, 청년도, 늙은이도, 종들도, 이 죽음을 극복하게 됩니다. 곧이 곧대로 살고자 하니, 이 곧음이 죽음도 꿰뚫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이라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그 분의 얼굴 보기


  그러니 이 마지막 날에, 주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하는거 아니라, 예수를 따라 옳은 일에 부딪침입니다. 부딪치고, 또 부딪치고 자꾸 부딪치고자 하면, 하나님의 숨결이 정말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때 그 숨결 구하면, 하나님이 숨을 주시고, 그 옳은 일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말을 넘어 인격과 인격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를 만날 것입니다. 예수와 같은 싸움 할 때, 예수께서 구하신 같은 숨결을 받아, 예수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임을 아는 일입니다.


  그 분은 숨. 그 분의 얼굴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분의 숨소리가 들리고,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 보이지 않는 숨결을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바다 위를 걸어봅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곧 바다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 듣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진리를 말하는 일, 내 꿈이 아닌 하나님의 꿈을 따르는 일이 바다입니다. 이 망망대해같은 바다 위에서 보이지 않는 숨줄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 그 끝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서 그 때가 '주의 날'입니다. 그 날까지의 현실은 바다입니다. 옳은 일을 하고자 하면, 나를 집어 삼킬 것만 같은 바다입니다. 그러나 그 바다 위를 걸으면, 이 바다의 끝. 주의 날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분의 얼굴을 봅니다. 그런데 바다를 걷는 건 숨 따라서 걷지 않으면 걸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라, 숨 받아서, 곧은 한걸음 한걸음 살아갑시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르러 그 분의 얼굴을 봅시다. 그 분은 먼 바다에서부터 숨을 끊임없이 보내주시는 키다리 아저씨이십니다. 우리를 죽음에 썩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반응형

'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의 기쁨은 이룸  (0) 2014.09.21
11504日 오전 1:30에 쓴 글입니다.  (0) 2014.09.14
사도행전 2:14~47  (0) 2014.08.29
시편 23편  (0) 2014.08.27
숨아들, 그리스도  (4) 2014.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