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성도교회 세 번째 설교


주기도문 I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0. 공동체의 의미


  우리는 A.D.1세기로 돌아가, 예수 공동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한다. A.D.1세기는 격동의 시대. 이스라엘은 포로가 되어 민족들은 탄압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 와중에 열 지파가 지구 위에서 사라지고, 남은 것은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뿐. 그러나 그들마저도 로마에게 짓밟히던 상황.


  그러는 와중에 현실에 대처하는 여러 사람들.

열심당, 질럿, 복수와 힘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사람들,

사두개인, 로마의 그늘 아래서 평화와 안녕을 부르짖던 종교인들,

바리새인, 자기 만족적 종교생활에 빠져있던 사람들,

에세네파, 세상과 단절하고 자신들만의 예배 공동체를 만들었던 사람들,

세례 요한파, 세례를 받고 회개하여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

  그리고 예수파가 있었다.


  그리고 각 공동체에는 기도문이 있었다. 공동체가 가진 기도문들은, 그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이며, 현실 속에서 그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주는 공동체 헌장이었다.


누가복음 11:1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런 맥락에서 제자의 말은 이런 의미다. "요한 공동체에도 기도문이 있듯이, 예수 공동체의 기도문을 가르쳐주세요. 이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세요"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해주신다. 예수 공동체의 기도. 그것이 주기도문이다. 우리 역시 주기도문을 볼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이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이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 A.D.1세기.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고대 문헌으로 돌아가서 말이다.


1. "하늘에 계신"-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그 기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아이들에게 천국을 그려보라하면, 하늘위에 궁전을 그린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받아줄 것만같은 수염많은 인자한 할아버지를 그린다. “하늘에 계신”이 이러한 의미인가? 얼마전 어떤 외국인이 성층권 점프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전에, 우주에 다녀온 어느 우주 비행사가 지구로 귀환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늘에 하나님이 안계신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초딩도, 우주비행사도, 이 말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


  우리는 '하늘'이라는 말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하늘'이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먼저 하늘은 그냥 우리가 보는 하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우주'라는 단어가 없다. 그래서 우주도 '하늘'이라는 단어로 사용한다. 바울의 '삼층 하늘', '하늘 위의 하늘' 이런 말들이 그러한 경우다. 그리고 하늘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 하나님의 차원"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의 하늘에 계신은, 하나님의 영역에 계신 하나님이란 의미다.

  그럼 반대로 인간의 영역은 무엇인가? 땅이다.


시편 115:16 

하늘은 주님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다.


  즉,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


  모든 문명들이, 이 하늘과 땅을 말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늘과 땅의 관계다. 즉,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을 가리켜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믿음들이 있고, 그 믿음들은 다 이 하늘과 땅의 관계에 대한 믿음이다. 말을 이렇게 해서 그렇지, 듣다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과 너무도 밀접한 이야기들이니까.


  먼저는, 하늘과 땅이 같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즉,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리켜 '범신론' 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경우는, 인도다. 영화는 아바타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신의 일부분이야" 하나님의 세계는 곧 인간의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이 신이 된다. 나무도, 돌도, 고양이 똥도 신의 일부다. 인도에는 카스트제도가 있다. 인간을 태어나면서부터 4종류로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차별과 착취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바꿀 생각을 안한다. 왜냐하면, 카스트 제도 역시 신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악과 부조리를 만났을 경우, 이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믿음에 부합하는 태도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샬라"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스토아 학파 역시, 하늘과 땅이 같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또 하늘과 땅이 결코 만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역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에피쿠로스가 그러하다. 흔히들 에피쿠로스 하면, 쾌락추구라고 알고 있지만, 그 쾌락은, 신은 나를 도와줄 수 없으니, 내가 알아서 가장 바르고 검소하게 살아서 삶을 기쁨을 누리리라는 의미에서의 쾌락이었다. 이 사상이 나중에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현대에 찾아온다. 땅과 상관없는 하나님, "이신론"이라고 부른다. 현대에는 자신이 이신론자인줄 모르지만, 무수한 이신론자들이 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땅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이쪽에 속한다.

  아니면, 완전 극단의 반대의 경우로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즉, 하늘과 땅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어보고자, 상식에서 벗어난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다. 역시나 하늘과 땅은 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범신론도 아니고, 이신론도 아닌, 오늘 성서가 말하는 하늘과 땅의 관계는 어떠한가? 저기 하늘을 보라. 하늘과 땅이 어떠한 관계인지, 하나님의 창조를 보고 생각해보라. 하늘이 곧 땅인가? 아니면 하늘과 땅은 만날 수가 없는가?

  하늘은 언제나 땅과 함께 있다. 그러나 하늘은 땅과 결코 같지 않다. 언제나 붙어 있지만, 분명 다르다. 즉, 하나님의 영역은(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나)인간의 영역과 분명히 분리가 되면서도, 언제나 인간의 영역과 공존하고 있다. 이것이 성서가 보여주는 하늘과 땅이다.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다.


2. "우리 아버지" -출애굽의 아버지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은 함께 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같이 있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역이 인간의 영역으로 돌입한다. 하늘이 땅과 만나는 이야기, 하나님의 차원이 인간의 차원으로 돌입하는 이야기. 이것이 성서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아버지" 라는 구절을 마주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우리 아버지" 라는 말을 쓸 때, 이것은 그저 자상한 아버지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유대인들은 분명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역사가 보여주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이 아버지라는 말은 유대인이 겪었던, 예전 어느 사건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어떤 사건일까?


출애굽기 4:22,23 

너는 바로에게 말하여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내가 너에게 나의 아들을 놓아 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하였건만, 너는 그를 놓아 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게 하겠다.'"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선언하시고,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신 사건이다. 땅에 있는 이집트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돌입하셨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였다. 즉, 출애굽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이다. 하늘이 땅으로 찾아와,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선언하고, 구원해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곧, 이것은 유대인의 정신이 되었다. 이 정신을 예수도 가지고 있었다. 바울도 가지고 있었다. A.D. 1세기의 모든 유대인들이, 이 출애굽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쓰는 아버지는, 출애굽의 아버지다.


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럼 정리해보자. 예수 공동체의 정체성과 방향을 보여주는 기도문의 시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영역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나 그 분은 그저 우리의 세계로 환원할 수 있는 분도 아니요, 이 땅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무능력한 분도 아니다. 오히려, 하늘에 계신 그 분은 이 땅으로 돌입하셔서 자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시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주기도문의 첫줄이 품고 있는 의미다. 역사다. 내용이다.


  그렇다면 묻자.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가 줄기차게, 뜻없이 외우던 이 구절은 우리를 누구라 말하고 있는가? 바로 우리가, 하늘과 땅이 만난 그 사건의 수혜자들이다. 하나님의 영역에 계신 그 분께서, 이 땅으로 돌입하셨고, 그 결과로, 우리는 출애굽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예수 공동체의 일원은 이것을 믿는다.이 땅으로 돌입한 하늘의 하나님 때문에 당신은 그 분의 자녀가 되었고, 그 분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예수 공동체의 시작이다. 이것 없이는 시작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왜 하나님은 당신의 영역에서 이 땅으로 돌입하셨는가? 지금 우리가 나열한 그림들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나에게 정말 출애굽이 벌어졌는가? 이 말은 또다른 날 벌어진 또다른 사건, 그러나 출애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아직, 우리의 수수께끼는 다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참하고, 고난받는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평가와 판단을 받으셨다. 그 사건을 통해서, 진리는 전모를 밝히 드러낸다. 우리는 그 과정을 살피는 중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읽기 본문>

누가복음 11장

시편 115편

출애굽기 1~15장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