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2012년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글자를 통한 소통의 시작이다.


왼뺨대기 첫 번째 설교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I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0. 말과 숨


  오늘 우리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만났습니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2012년 9월 7일, 저는 오늘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이 저에게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왼뺨대기라는 낯선 이름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에게 이 공간이 허락되었을 때, 

  아파트에 광고지를 붙이고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우리가 눈물로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을 때, 

  수줍은 고백으로 우리의 중심에 예수가 있음을 인정했을 때,


  모든 순간, 저에게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어떤 오늘입니까? 오늘은 공동체라는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 날입니다.  


  말씀은 말과 숨입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할 때, 우리의 말과 함께 우리의 숨결이 뱉어지듯, 말씀은 하나님의 말과 숨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과 숨결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진리요, 그 분의 숨결은 힘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그 분의 말로 지음받고 숨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말과 숨, 말씀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창조한 말의 숨결, 공동체에 그 말숨이 불어넣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흙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던 것처럼, 이 공동체가 하나님의 숨결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빚어지는 것입니다.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물을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난 날 정의에 눈 가린 채 얼마나 비겁했든지, 얼마나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에 몸을 담그고 있던지 상관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숨결을 들이 마시는 것입니다. 의심과 오해를 거둬내고 들이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삽니다. 그러면 삽니다. 하나님의 숨결로 호흡하는 자 진정한 삶을 얻습니다.


  불의에 맞서 왼뺨을 돌려 대는 우리가 처음 대면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을 없애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없애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1. 주기도문의 배경


  주기도문의 본문을 보기 앞서, 우리는 이 주기도문이 나온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거니실 당시는 로마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엄청난 토지를 점령하고 있던 로마는 시져, 카이사르가 다스리는 국가입니다. 로마는 평화를 추구하는 나라였습니다. 로마는 평화의 나라, 카이사르는 평화의 왕이라 칭했을 정도니까요. 로마는 자신에게 대적하는 이민족들은 가차없이 쳐들어가 쑥대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로마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평화가 얻어졌습니다. 즉, 로마에게 까불면 작살 나는 것입니다. 로마에게 집중된 강력한 힘 아래, 대부분의 민족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로마가 원하는대로 자신들을 고쳐나갔습니다. 로마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카이사르를 숭앙하며, 로마의 평화를 찬양했습니다. 거리에는 카이사르의 신상을 세우고, 평화의 왕 카이사르가 새겨진 동전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를 가리켜 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 불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평화입니까? 지금 듣기에는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들이 하나 둘씩 터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문제들이 생길까요?


  생각해봅시다. 로마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군사력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군사력은 무엇으로 만들어내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세금. 로마는 점령 지역으로부터 세금을 걷습니다. 그러나 세금을 걷을 때, 힘들어지는 계층은 어떤 계층입니까? 하위 계층입니다. 하위 계층에게서 실제적인 빈곤과 억압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위 계층 사람들이 힘들고 어렵고 삶이 곤궁해도, 로마에게 세금 내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반발을 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종교와 선전입니다. 즉, 자발적인 복종을 위해 일상적인 세뇌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를 숭배하도록 계속 가르치고, 로마의 승리를 돕는다는 그들의 신을 계속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로마가 주인공인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이야기의 엑스트라가 됩니다. 로마의 승리에 환호하고, 로마를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합니다. 거짓된 이야기에 중독된 채 말입니다.


  그런 와중에 반발하던 하나의 민족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치열하게 반발하던 거의 유일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 숭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종교를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돌과 나무를 깍아 만드는 우상들은 참 신이 될 수 없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인정하라는 그들의 요구는 금송아지에게 절을 하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세상을 지배하는 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을 구해주시러 반드시 오실 것이다!" 마치 그 옛날 출애굽때 처럼,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압제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이 믿음도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기반으로 여러 가지 공동체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  먼저는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로마에 맞서 하나님의 승리를 실현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즉, 의적들입니다. 이 의적을 이끄는 대장은, 자신이 메시아라 주장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찾아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적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서 모두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자신이 메시아라고 말하는 의적 대장은 나오는 족족 토벌되어 줄줄이, 로마의 관습에 따라 십자형의 나무에 매달아 죽임당했습니다. 


2)  그리고 바리새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들은 오늘날 유대 랍비의 효시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주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3)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로마를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믿고 있었던 부활 사상도 이들은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라는 것은 대단히 혁명적인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던 부활은. "옳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부활을 믿는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정의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해주실 것이라 믿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로마에 반발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4)  그리고 세례 요한의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이 세례 요한의 공동체는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러 오실 때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회개의 징표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유대 공동체들은 각각의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기도문은 개인에게 주신 기도문이 결코 아니었겠죠. 그 기도문은 공동체의 정신과,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켜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요한의 공동체가 기다리고 있었던, 예수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공동체 중 한 명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복음 11:1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 말이 어떤 말입니까? "예수님, 여러 공동체들이 있고, 그 공동체들은 그 공동체의 정신과 방향을 보여주는 기도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기도문이 있어야겠습니다. 이 공동체는 무엇이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가르쳐주세요."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연구 과제. 당시의 상황과 오늘>


2. “하늘에 계신”


  "전도사님 저는 신을 믿지 않아요."


  요즘 이런 말을 요새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되물을 수 있습니다. "그래, 어떤 신을 믿지 않는데?" 그럼 여러 말을 합니다. 하늘에 앉아서 사람들이 재미있게 노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서 훼방놓는 그런 신 별로고,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지도 않는 그런 신을 믿을 수도 없고...등등. 그럼 저도 대답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저도 저런 신은 믿지 않습니다. 


  신에 대한 숱한 오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신에 대한 오해입니다. 신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2장 24절처럼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예수 공동체의 정체성과 방향을 보여주는 주기도문은 하나님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그간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려 합니다. 먼저, "하늘에 계신" 입니다.


  "하늘에 계신" 이 말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여러분은 그간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왔습니까?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인냥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우주비행사가 처음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이 안계신것이 확실하다"고 말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저 푸른 하늘 어딘가에 사실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유년부 아이들에게 천국을 그려보자고(사실 이런 걸 시키는 선생님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면, 다들 구름 위에 있는 궁전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 궁전에는 하나님이 살고 계시겠죠. 이러한 생각은 약 중2정도가 되면 이러한 믿음들이 산산조각납니다. 하늘에 있긴 뭐가 있나, 이런 생각이 들고, 점점 기독교에서 말하는 말들이 그저 허구를 형상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는 점점 믿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버리죠.


  그러나 하늘이라는 말은 결코 그런 1차원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 '하늘'이란 말은 정말 깊고, 복잡한 차원의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 '하늘'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말하고 싶을 때 가져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피할만큼 하나님의 신성함에 대해서 주의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표현할 때, 하나님의 이름대신 '하늘'이라는 말을 대신하여 썼습니다.

  그렇다고, 하늘=하나님은 아닙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만물 앞에 드러날 그 '하나님의 차원'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인간이 살고 있는 차원, 인간의 세계는 무엇이라 말할까요? '땅'이라고 말합니다. 하늘과 땅, 하나님의 세계과 인간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차원과 인간의 차원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요? 다음 두 가지의 반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차원=인간의 차원"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가리켜 '범신론'이라고 부릅니다. 즉,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곧 이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곧 모든 곳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이 세계 자체를 거룩하고 신성하게 생각합니다. 이 범신론이 낯설게 보이겠지만, 이미 우리는 다양한 범신론의 경우들을 알고 있습니다. 자연을 숭배하는 것이 이 범신론의 전통입니다. 얼마 전에 대봉했던 아바타 역시 범신론의 세계관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윤리 시간에 배우는 스토아 학파도 범신론입니다. 그런데 범신론은 상당히 무리한 요구를 동반합니다. 모든 것에 신성이 있다고 믿으려면, 말벌과 모기와 암더어리와 쓰나미와 허리케인을 포함한 모든 것에 신성이 있다고 믿으려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범신론에서 조금 뒷걸음질 친 '범재신론'이라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신이 아닐수도있지만 어쨋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인도가 이 범신론, 범재신론 전통이 강합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명상하죠. 왜 명상할까요? 땅이 곧 하늘이기 때문에, 인간의 차원에서 신의 차원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상을 하면서, 이 우주의 기운을 느끼는 것이죠. 이것이 곧 신을 만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하늘과 땅을 동일시 하는 전통은 충격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악의 문제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세상에는 악의 문제가 존재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이들은 그것도 신의 뜻이라고 말합니다.(인샬라) 만약 누군가가 암에 걸렸다면, 그것도 이 세계의 순리 안에 있는 것이므로, 그저 받아들이라 말합니다. 또한 누군가가 낮은 신분으로 태어났어도 그것을 극복할 수도 없고, 극복해서도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신의 원리이기 때문에 바꿔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카스트 제도가 대표적입니다. 악은 그저 받아들여야 할 신의 모습일 뿐, 인간은 거기에서 아무 것도 할 수도, 해서도 안됩니다. 강력한 운명 결정론이 여기서 발생합니다. 당신을 구하러 올 존재는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세계와 신은 그대로이니 당신이 그 사실에 익숙해지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신의 뜻이 싫다면,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살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차원과 인간의 차원이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하늘과 땅은 만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 가리켜 '이신론'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의 차원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더라도 인간의 차원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현실 문제에 신을 배제하는 경우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그렇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해 인생을 즐길 뿐입니다. 여기서 인생을 즐긴다는 것은 조용하고 신중하고 적절하게 중용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르쿠스 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의 물질만이 중요하지 신적인 차원은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하던, 하나님은 여기에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오늘날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하늘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은 채 자기 일에 몰두해서 사는 현대의 에피쿠로스와 마르크스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손으로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서 다른 손에 커피 한 잔을 든채 텔레비젼을 보거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현실의 일만을 생각하고 바라봅니다.

  아니면, 하늘과 땅이 너무 멀리 떨어져있기에, 극단적으로 영적인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늘과 땅의 간극을 메워야 하기 때문에 이들은 무언가를 극단적으로 추구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공동체의 견해는 범신론도 아니고, 이신론도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으신 하늘과 땅을  바라봅시다. 어디가 경계선입니까? 경계가 어디인지 딱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 둘은 분명 다릅니다. 언제나 같이 있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연구 과제. 그 동안 내가 믿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3. “우리 아버지여”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땅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하늘과 땅은 같은 영역을 차지하지 않으며, 거대한 심연으로 나뉘어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가지 방법으로 중첩됩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세계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복잡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두부 자르듯 딱잘라서 말하기 어렵듯, 하늘과 땅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늘과 땅은 분명 연결되어 있으나 떨어져 있습니다. 연속성이 있으나,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복잡다단하지만 분명, 관계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거의 독립적이면서도 신비스럽게 서로 중첩되는 영역"이라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분은 세계에 갇히지도 않으시고, 그렇다고 세계를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성서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즉, 하나님의 차원과 인간의 차원이 만나는 여러가지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이 세계 자체도 아니시고(오히려 이 세계를 창조하신 예술가이시며), 이 세계와 멀리 떨어져 팔짱끼고 방관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오히려 역동적으로 인간의 차원과 관계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 분은 끝없이 이 땅에 역동적으로 돌입해오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은 만납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됩니다.  


  성서는 그렇게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예를 수도 없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하나의 경우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앞으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다른 이야기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땅에 한 민족이 있었습니다. 이 민족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자손이었습니다. 이 민족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집트라는 이웃 민족에게 고역과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영역은 서로를 지배하고 이용하고 억압함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그 민족은 그 악의 문제 속에서 탄식하고 하나님을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민족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악에 짓눌려 있던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이 그 민족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났습니다. 땅에 살던 그 민족은 이제 인간에게 다스림을 받아 괴로웠던 시절들을 뒤로하고, 하늘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다스리던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파멸되고,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새로운 땅을 향해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즉, 악으로부터 구출되어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민족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4:22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그렇습니다. 그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역에서 악의 문제에 괴로움에 허덕이는 이스라엘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들을 억누르던 이집트의 왕 파라오를 파멸시키고, 그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삼으사,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연구 과제. 출애굽 이야기>


4.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리고 주기도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따라서 이 '아버지'라는 말은 그저 "하나님이 우리 아빠야" 정도의 친근함의 표현을 넘어섭니다. 구약성경을 알고, 이 주기도문을 읽는 사람들은 이 아버지라는 말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괴로움을 들으셨다는 사실과, 둘은 그러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이 땅에 임하셨다는 사실과, 자신을 마침내 악으로부터 구출해주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이 '아버지' 라는 말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버지라는 말이, 예수 공동체의 기도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예수 공동체가 어떠한 특별한 사건을, 이 출애굽과 연관 짓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공중의 권세를 잡은 세상 왕이 충격적인 파멸을 당했으며, 그것으로 우리가 악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땅으로 여행을 시작했음을 믿고 있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그렇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으신 사건이 곧 뉴 엑소더스. 새로운 출애굽입니다. 예수 공동체의 정체성과 방향은 바로 여기에서 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차원 계신 그 분께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구출해주셨다는 믿음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 분은 세상 그 차체가 아니시십니다. 오히려 이 땅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의 차원에서 우리를 방관하는 무능력한 신이 아닙니다. 그 분으로 인해 하늘과 땅이 만납니다. 그리고 그 분의 활동으로 인해, 우리가 악으로부터 구출을 받아, 진리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우리입니다. 


<연구 과제. 출애굽과 십자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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