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1~16, 개인번역


  그러므로 주 안에 묶인 바로 내가 여러분을 파라칼로합니다,

여러분이 부름받았던 그 부름에 합당하게 걸으라고

  모든 깊은 생각과 부드러움과 함께, 

  긴 호흡과 함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지탱하고, 

  평화의 함께 묶임 안에서 

  숨결의 일치를 유지하는데 서두르며.


몸 안에서와 숨결 안에서,

여러분의 그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여러분 또한 부름 받은 것과 같이.


주를 향하여, 

하나의 믿음, 세례 안에서.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빠를 향하여,

그는 만물 위에, 그리고 만물을 통해서, 그리고 만물 안에서.

그런데 우리들 중 각 한 사람에게 '거저'가 주어졌습,

메시아의 그 선물의 그 측량을 따라.


  오랜만에 에베소서 4장을 읽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 알고 있던 본문에서 낯선 대목들을 만나고, 또 다시 당혹스러워졌습니다. 그 당혹스러움이란 '나는 이것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알고 있던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늘 겪지만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느낌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부르심"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라는 메시아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과 함께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연결시킵니다. 그 삶이란, 생각을 깊게 하고, 부드러운 친절함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긴 호흡으로 인내합니다. 메시아께서 삶으로 구현하셨던 바로그 사랑을 닮으며 서로를 붙잡아 주고, 평화의 한 묶음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메시아의 몸이자 우리의 몸이며, 몸을 순환하는 숨결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 바로 부르심의 목적이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인간"이 되는 삶의 목적은 "주를 향하여", "하나님 아빠를 향하여" 입니다. 


그래서 말씀 하기를, 


  "높음 속으로 걸어 올라간 이가 

  포로를 사로잡고, 

  이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다."


그런데 그 걸어올라감은 무엇인가?

그가 땅에 속한 더 낮은 부분들 속으로 걸어내려가는 것이 아니라면.

걸어내려가신 바로 그이가

모든 하늘들 위로 걸어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이는 이 모든 것을 채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개역성경 기준으로는 68:18입니다(MT 68:19, LXX 67:19).


시편 68:18, 새번역

주님께서는 사로잡은 포로를 거느리시고 높은 곳으로 오르셔서, 

백성에게 예물을 받으셨으며, 

주님을 거역한 자들도 주 하나님이 계신 곳에 예물을 가져 왔습니다.


  시편 68편은 하나님께서 원수를 무찌르는 장면을 묘사하는 시편입니다. 그리고 18절은 하나님을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고, 원수를 포로로 사로 잡으며, 백성과 주님을 거역한 이들로부터 예물을 받는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인용하는 본문은 일단 동사가 "가져왔다"에서 "주었다"로 달라졌습니다. 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러 방법들을 생각했습니다. 그 중에 제게 가장 타당해보이는 것은 이 시편은 유대인의 탈굼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사람들에게 토라를 가져다 준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단서입니다. 토라라는 선물이 높은 곳으로 걸어간 모세로부터 오순절에 주어졌듯, 높은 곳으로 올라가신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 것은 왜 본문의 "가져왔다"가 "주셨다"로 바뀌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승리를 메시아 안에서 확인했기 때문에, 이 승리로부터 나누는 전리품을 성령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이것이 "주셨다"라는 동사로 바뀐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땅에 속한 더 낮은 부분들"이란 표현이 있는데, 19세기에는 이 구절이 "지옥"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속한 더 낮은 부분들"은 지표면을 의미할 수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이 본문을, "그의 걸어올라감"을 예수의 승천으로, 그리고 "땅에 속한 더 낮은 부분들로 걸어내려감"을 예수의 성육신으로 읽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야곱의 사다리를 연상시키고, 곧 예수가 바로 성전이심을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성전이신 예수처럼, 만물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이는 한 편으로 그 사도들을 주셨고, 

다른 한 편으로 예언자들을 주셨고, 

다른 한 편으로 좋은 소식 전하는 자들을 주셨고, 

다른 한 편으로 목자들과 선생들을 주셨고, 

거룩한 이들의 그 갖춤을 위하여

  섬김의 노동 속으로,

  그 메시아의 몸의 집짓기 속으로, 

모든 우리가 당도할 때까지

  그 신실함의 일치와 하나님 아들의 지식 속으로, 

  끝내주는 남자 속으로,

  그 메시아의 넘침의 성숙의 정도 속으로,

이는 우리가 결코 유아들로 있지 않기 위함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로부터 선물을 받은 다양한 사람들이 나열됩니다. 이들은 "거룩한 이들"을 갖추게 하는 일에 섬기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이때 유념해야 하는 것은 '거룩'은 의무가 아니라 지위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로부터 성령으로 임명된 사람은 거룩합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해지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기 때문에 그 지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성도들이 "거룩해질 수 있도록"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거룩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 메시아의 몸의 집짓기"가 곧 성전입니다. 앞에서 "걸어올라감과 걸어내려감"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성전이라면, 그 아래 내용과도 잘 연결됩니다. 


(유아들은) 파도에 흔들리고 

벗어나게 하는 기술에 능수능란한 사람들의 

주사위 안에서 가르치는 모든 바람에 끌려가는데,

그러나 우리는 사랑으로 그이 속으로 모든 것을 자라게 합니다, 

그이는 머리이십니다, 메시아, 그이로부터 

모든 몸이 모든 함께 연결되고 

공급의 모든 연결을 통해 결합되며

하나의 각 부분들의 측정 안에 있는 작동을 따라

몸의 성장을 만듭니다, 사랑 안에 있는 그이의 집지음 속으로.


  거룩한 사람이라는 지위를 얻은 사람에게는 '성장'이 요구됩니다. 메시아라는 분명한 삶의 본을 만나기 전에는, 누구에게나 세상만사는 무작위 속에 들어있었고, 그 무작위 속에서 속이는 사람들을 의지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사람은 사랑 안에서 성장합니다. 불안한 세상 가운데서도 든든하게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이들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한 이들의 몸이 함께 연결되어있고, 그리스도로부터 공급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성장'이 개인의 몫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과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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