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개인번역
1
그 옛날, 여러 시대,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고,
이 마지막 날들에는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들은, 모든 것(만물)의 상속자로 임명되셨고,
하나님은 그이를 통해 시대들을 창조하셨다.
그이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뚜렷한 밝음,
하나님 본질(ὑπόστασις)의 '캐릭터'이며,
잠재력 있는 이야기로 모든 것을 나르신다.
그 비뚤어짐들의 정화를 행하셨고,
높음들 안에 (계신) 장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그이는 천사들보다 더 위대하시니,
그이에게 상속된 이름이 그들(천사들)을 압도할 정도다.
하나님께서 천사들 중 그 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는가?
"나의 아들이 너다.
나는 지금 너를 낳았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되리라"
또한 그 맏아들을 거주지 안으로 이끄셨을 때 그가 말씀하시길,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이에게 경배하라."
그리고 한편으로 천사들을 향해서는 그가 말씀하시길,
"그의 천사들을 숨결들로,
그리고 그의 일꾼들을 불꽃으로 만드신 이."
다른 한편으로 아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이여,
당신의 보좌는 세대에서 세대에 이릅니다.
당신 다스림의 홀은 잘 세워진 홀입니다.
당신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곧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쁘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당신과 나누는 자들 곁에서."
그리고,
"주님이여,
당신은 태초부터 그 땅을 토대로 놓고,
당신 손의 작품(일)들이 바로 하늘들입니다.
그것들이 파괴될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외투처럼 낡아갈 것이고,
그리고 당신은 휘장처럼 그것들을 말아버리실 것이며,
그리고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시며,
당신의 해(年)들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사들 중 그 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는가?
"앉으라! 나의 오른편으로부터.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받침대로 놓을 때까지."
모든 일하는 숨결들은 섬김을 위해 있는 것 아닌가,
그 숨결들은 온전함을 금세 상속받는 것들을 통하여/때문에 보냄받는다.
2
그러니 우리는 더욱 들은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에서 떠내려가지 않도록.(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만일 천사들을 통해 여러분들이 말하게 된 로고스도 걸을만해서
모든 벗어난 걸음과 헛들음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면,
어찌 우리가 이토록 큰 구원에서 머물지 않고 밖으로 달아날 수 있겠는가?
이 구원은 주를 통해 나온 말로 얻게 된 아르케요,
이 말을 들은 이들로부터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확증을 얻었는데,
하나님도 함께 증언하셨다, 표적과 기적으로
그리고 그의 뜻을 따라 다양한게 분여된 거룩한 숨결의 잠재력으로,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 임박한 거주지'를 천사들 아래 두지 않으셨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 어떤 이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증언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들을 기억하십니까?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에게 찾아오십니까?
주께서는 그를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고
그에게 뚜렷한 인정의 관을 씌우셨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습니다.”
만물이 그 아래 두어졌다면, 그 밖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만물이 그 아래 두어짐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신 분을 본다, 예수,
죽음의 겪음을 통해서 뚜렷한 인정으로 관을 쓰셨으니,
그 결과 하나님의 거저로 모든 죽음을 대신하여 맛보셨다.
왜냐하면 그이에게 적절했기(ἔπρεπεν) 때문이다,
(그이는) 만물의 근원이자 만물의 과정이며,
많은 아들들을 뚜렷 속으로 이끄는,
그들의 온전함(구원)의 그 아르케고스인데,
(하나님께서) 그이를 겪음들을 통해서 완전케하심이 (적절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이와 거룩해진 이들 모두가 하나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 이유(αιτια) 때문에 그이는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수치스러워 않으신다,
말씀하시길,
"내가 당신의 그 이름을 나의 형제들에게 알리리라,
내가 에클레시아들 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리라."
그리고 다시/새롭게,
"내가 그에게 설득되어 있으리라."
그리고 다시/새롭게,
"보라, 내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던 아이들이 (있다)."
그래서 그이가 그 아이들을 피와 살몸으로 코이노니아 하셨을 때,
그이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가지셨던 것이다,
이는 그 사망을 통해 그 사망의 강력을 가진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함이다,
(그러한 것이 디아볼로스에 관하여 있다),
그리고 이는 사망의 두려움으로 그 삶의 모든 것을 관통하여 묶인 노예라면
누구나 풀어주기 위함이다,
즉 그이가 천사들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씨를 곁에서 취함이 분명하다.
여기서부터(이 이유로) 그이는 모든 것을 따라 형제들과 같게 되어야 하는 빚을 지셨다,
이는 그가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기 위함이다,
그 하나님을 향하여, 그 씨알의 비뚤어짐들을 속죄/사면하는 것 속으로.
즉 그 안에서 그이는 아픔을 공감하고 시험당하시기에,
시험당하는 이들을 도우실 수 있다.
3
여기서부터, 거룩한 형제들이여,
하늘에의 부르심의 참여자들이여!
생각하라, 그 사도 곧 대제사장인
우리가 한 가지로 말하는 예수를,
그이를 임명하신 분께 신실한 이,
마치 모세도 그이의 온 집 안에서 신실했던 바와 같이.
왜냐하면 모세보다도 더 넘치는 영광의 그이가
합당하셨기 때문이다, 다음을 따라서 말이다,
그 집에 속하는 더 넘치는 영예는,
그것을 틀 잡으신 이가 갖는다는.
왜냐하면 모든 집은 누군가에 의해서 틀 잡히는데,
모든 것을 틀 잡으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한편으로 모세는 그분의 온 집 안에서 신실했지만
(미래에) 말 될 것들의 증거를 위한 시종으로서 였고,
다른 한편으로 메시아는, 그분의 온 집의 아들로서(였다).
(우리가 그 집이다, 만일 우리가 파레시아와 희망의 찬양을
끝의 굳건함에 이르도록 붙들고 있다면 반드시).
그러므로, 그 거룩한 숨결이 말씀하시듯.
"오늘, 만일 그의 그 소리를 당신들이 들었다면,
당신들의 가온을 완고히 하지 말라,
그 광야에서의 그 시험의 그 날을 따르는 그 적대감/쓰라림 안에서,
거기서 너희의 아비들은 입증 안에서 시험했고
나의 일들을 40년동안 보았다/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바로 그 족속에게 슬퍼하며 말했다,
'늘 그들은 가온으로 속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나의 길들을 깨닫지 못한다.'
내가 나의 그 화 안에서 맹세했듯이.
'만일 그들이 나의 그 안식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면,'"
형제들이여, 보아라/삼가라,
사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서 있음(αποσταται)' 안에 있는,
'열악한 신실치 않음'이 당신들의 어떤 가온 안에 있지 않도록,
오히려 너희들은 각 날을 따라 서로를 공감하라, 오늘이라 불리는 날까지,
이는 당신들 중 어떤 이가 비뚤어짐의 속임으로 완고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메시아와 함께 참여한 이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로 만일 '그 안정적인 토대의 시작'을 끝들까지 우리가 붙들고 있다면 말이다,
(다음과 같이) 말씀되는 것 안에서,
'오늘 만일 그 소리를 당신들이 들었다면,
당신들의 가온들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마치 적대감/쓰라림 안에 있듯이."
즉 누가 듣고도 적대감들을 갖는가?
그러나 모세를 통하여 이집트로부터 밖으로 나온 모든 이들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그분은 어떤 이들에게 40년간 격노하셨는가?
그 광야에서 시체들로 전락한 비뚤어진 이들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그분은 어떤 이들에게 그분의 그 안식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맹세하셨는가,
허락되지 않은 이들을 제외한다면?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신실하지 않음을 통해서는 들어갈 수 없었음을.
4
그러니 우리 두려움을 갖자,
그이의 안식 속으로 들어가는 알림이 남아있을 때,
우리들로부터 누구도 이미 뒤쳐졌다/늦었다/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즉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과 같이 좋은 소식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들음의 로고스는 그들을 유익하게 하지 못했는데,
그 결과 그 로고스는 '그 들음들에 신실함'과 함께 섞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신실한 이들은 그 안식 속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이가 말하셨던 바와 같이,
'나의 화 안에서 내가 맹세했듯이,
만일 그들이 나의 안식 속으로 들어올 것이라면,
그리고 실로 코스모스의 설립으로부터 그 일들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이가 어딘가에 그 일곱 번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그 일곱 번째 날에
그의 모든 그 일들로부터 안식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재차,
'만일 그들이 나의 안식 속으로 들어올 것이라면.'
그러니 안식 속으로 들어가는 어떤 것들이 남아 있을 때,
먼저 복음받은 이들이 설득되지 않음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그이는 어떤 날, 바로 오늘을 규정하신다,
다윗 안에서 아주 긴 크로노스 이후 말씀하시며, 예언하셨던 바와 같다.
'오늘, 만일 당신들이 그의 소리를 들었다면,
너희들의 가온을 완고히 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을 안식하게 했다면,
그는 그 날 이후 다른 날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식지킴이 하나님의 그 씨알에게 남겨져 있다.
왜냐하면 그이의 안식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과 그이 자신은
그의 일들에서부터 안식하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에게 속한 것에서부터 그리하셨듯이.
그러니 우리 바로 그 안식 속으로 들어가기에 민첩하자,
이는 그것 안에서 그 설득되지 않음의 예로 떨어지지 않으려 함이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로고스는 활력이며
모든 양날 대검보다 더 날카롭고,
프쉬케와 프뉴마의 분할면을, 관절들과 골수들의 분할면을 꿰뚫는 것이다,
사유들의 식별과 가온의 의도들 까지도.
그리고 그의 면전에 드러나지 않은 창조세계는 없다,
그런데 모든 것은 벌거벗고 있고, 그의 두 눈에 목이 붙들려 있는데,
그 분을 향해 로고스가 여러분에게 (있다).
그러니 하늘들을 뚫고 가신 위대한 대제사장,
하나님의 그 아들 예수를 가진 우리는,
그이를 고백으로 붙들자.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들을 함께 겪을 수 없는 대제사장을 가진 게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따라, 같게 됨을 따라 시험 받으셨던 분을 가졌기 때문이다,
비뚤어짐은 없이.
그러니 우리 파레시아와 함께 그 메시아의 왕좌 앞으로 나아가자,
이는 우리가 자비를 취하기 위함이고 좋은 시간 속으로의 도움이 되는 은혜를 알고자 함이다.
5
왜냐하면 사람들로부터 있는 모든 제사장은
사람들 대신 취해져서 하나님을 향한 일들에 관하여 놓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뚤어짐들을 대신하는 선물들과 희생들을 그가 앞에 가져가기 위함인데,
깨닫지 못한 이들과 어그러진 이들을 그가 부드럽게 대할 수 있음은,
그 자신도 연약함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약함을 통해 그는 빚이 있다,
이것은 씨알에 관하여 그렇고,
자신에 관하여도 비뚤어짐들에 대해 앞에 가져가야 할.
그리고 누구도 그 자신에게 영예를 취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 호명되는데, 마치 아론과 같다.
그렇게 메시아께서도 그 자신을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드러내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이를 향해 말하는 이가,
‘네가 내 아들이다,
바로 내가 이 날에 너를 낳았다.’
이처럼 다른 데에서 말씀하기를,
‘너는 그 시대 속으로의 제사장이다,
멜키세덱의 질서(ταξις)를 따르는.’
그이가 자신의 살몸의 날들 속에서, 결핍들과 청원들을
죽음으로부터 그이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이를 향해
강한 울부짖음과 눈물들로 앞에 가져다 놓았는데,
그 경외함으로부터 들으심을 입었다,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잘들음을 겪음으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이룬 이는 그이에게 잘 듣는 모든 이들에게
오는시대의 온전함의 원인이 되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멜키세덱의 질서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공적으로 선언되었다.
그(멜기세덱)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씀이 많지만,
말씀하는 것을 해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듣는 것들에 느리기 때문이다.
즉 크로노스를 통하여 선생들이 될 빚이 있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들의 아르케에 대한 어떤 기초들을
내가 너희들에게 다시 가르쳐야할 필요를 너희들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단한 양분이 아니라, 우유의 필요를 가진 너희들이 되었다.
왜냐하면 우유에 참여하는 모든 이는 의의 말씀을 겪지 못한 이, 곧 유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단한 양분은 이루는 이들에 속하고,
그들은 헥시스를 통하여 훈련된 이해들을 가진 사람들이다
온전함과 열악함을 구분하기 위해.
6
그러므로 메시아의 아르케의 말씀을 떠나서 끝적인 것에로 우리 자신들을 나르자,
시체상태의 일들로부터의 생각바꿈의 기초를 다시 아래던지는 우리이지 않도록
그 생각바꿈은
하나님에게의 충(신)실함의,
침례들의 가르침의,
손들을 위에 얹음의,
시체 상태들의 다시 일어남의,
그리고 오는시대의 심판의 생각바꿈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심판)을 행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돌아보신다면.
왜냐하면 한 번 밝혀진 이들,
즉 하늘의 선물을 맛 본 이들,
즉 거룩한 숨결에 함께 갖게/참여하게/엮이게 된 이들,
온전한 하나님의 이야기의 능력을 맛 본 이들,
즉 오는시대의 도래한 이들,
그리고 이들이 타락하면,
다시 생각바꿈으로 위로부터 깨끗해질 수 없는데,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매달고
스스로가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땅이 그 위에 오는 비를 자주 마시고,
그들 자신에게 잘 나온 채소를 내고
(그들 자신을 통해 땅이 갈리는데),
그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잘한 말을 함께 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시들과 엉겅퀴들을 내는 땅은 입증되지 못하고 금세 저주에 속하는데,
그 저주는 그 끝이 불사름 속으로.
그런데 당신들에 관하여 우리는 설득/확신되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더 좋은 것들 곧 온전함에 붙어있는 것들에 관하여,
우리가 위와 같이 말한다 할지라도.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분은 그 일과 사랑을 잊지 않으시는데,
그 사랑 안에서 당신들이 그이의 그 이름 속으로 드러났다,
거룩한 이들을 섬겼고 섬기는 당신들이.
그런데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당신들 각각이 바로 그 열심을 끝들까지
소망으로 넘치는 확신(πλεροφορια)을 향해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여러분들이 느린 이들이 되지 않으려 함이며,
반대로 신실함과 긴 호흡을 통해서 알림들을 상속받는
모방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알리셨을 때,
더 큰 누군가를 따라 맹세하지 못했고,
그 자신을 따라 맹세하셨기 때문이다, 말씀하시길,
"만일 실로 내가 너를 잘 말하며 잘 말할 것이고
실로 너를 넘치게 하며 넘치게 한다면."
그리고 그는 그토록 긴 호흡으로 견디며 그 알림에 부딪쳤다.
왜냐하면 더 큰 것을 따라 사람들이 맹세하며,
그들에게 있는 맞서는 말들의 모든 안정에 이르는 경계는 바로 맹세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더욱 과도하게 하나님은 상속자들에게 그 알림을 드러내시길 원하셨기에,
그의 원함의 변치 않음을 맹세로 중재하셨다,
이는 변치 않는 두 가지 문제들을 통해,
(이 문제들 안에서 하나님은 거짓말할 수 없는데)
앞에 놓인 소망을 틀어 쥐려고 달아나는 우리가
강한 파라클레시스를 갖게 하기 위함이다.
프쉬케의 닻과 같은 그 소망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그 소망은) 확고하고 안정적이며 그 막(휘장)의 안쪽으로 들어감이니,
거기를 우리를 대신해서 선두주자로 예수께서 들어가셨다,
멜키세덱의 그 질서를 따라 대제사장이 그 시대에 이르도록 되시며.
7
왜냐하면 바로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인데,
그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그는 왕들의 살육으로부터 몸을 뒤로 돌린
아브라함을 만났는데 그를 잘 말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모든 것으로부터 1/10도 나누었다,
그는 번역하면 일단 의의 왕이고,
그 다음으로 살렘의 왕, 곧 평화의 왕인데,
아비없이, 어미없이, 족보없이,
날들의 시작도 삶의 끝도 갖지 않고,
그 하나님의 그 아들과 닮음으로 되어,
그는 제사장으로서 밑도 끝도 없이 남는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보라,
그에게 아브라함도 꼭대기 쌓인 것들 중 1/10을 주었다, 족장인데도.
그리고 한편으로 레위의 아들들로부터 있던 이들로부터 제사장직을 취한 이들도
그 (율)법을 따라 그 씨알에게 전달하는 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형제들에 관해서도 있다,
비록 아브라함의 그 허리로부터 나온 이들이라 할지라도.'
그런데 그(멜기세덱)는 그들로부터 세대로 계산되지도 않는데,
아브라함은 1/10을 지불했고, 그 알림/약속들을 가진 그(아브라함)를 잘 말했다.
그런데 모든 맞서는 말없이, 못한 자가 나은 자로부터 잘말함받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편으로는 1/10들을 죽는 사람들이 취하고,
거기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있다고 증언된 이가 (취한다).
그리고 한 마디 하자면, 아브라함을 통해서 1/10들을 취한 레위도 지불(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그 아버지의 허리에 레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말이다).
그러므로 만일 한편으로 그 레위적 제사장직을 통해 이룸/완수가 있었다면,
(왜냐하면 그 씨알이 그 제사장직 곁에서 법제화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멜기세덱의 그 질서를 따라 제사장을 세울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아론의 그 질서를 따라 이야기될 필요가 아닌.
즉 운명(아낭케)으로부터 그 제사장직이 달리 세워졌기 때문에
율법의 달리 세움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들이 그이 위에서 이야기되는데,
그이는 다른 지파에 속하여 함께가지셨고,
그 지파로부터 누구도 그 제단에 드렸던 바가 없다.
즉 모두 앞에 명백하다, 유다로부터 우리의 주께서 솟아나셨던 것이,
이 지파 속에는 제사장에 관하여 모세가 말했던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더욱 분명하다,
만일 멜기세덱의 닮음을 따라 다른 제사장이 일어났다면,
그이는 살몸의 명의 율법을 따라서가 아니라,
파괴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을 따라 되었다는 사실이.
왜냐하면 다음의 사실이 증언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 오는시대 속의 제사장임을,
멜기세덱의 그 질서를 따르는."
왜냐하면 이전에 이끌린 명의 무효가
그 명이 갖는 연약함과 무익함을 통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더 좋은 소망이 덧붙여 들어왔다,
그 소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가까이 있다(ἐγγίζομεν).
그리고 이러함은 맹세 없이 되지 않는데,
즉 한편으로 맹세없이 그들은 제사장이 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이를 향해 말씀하신 것을 통한 맹세와 함께,
주께서 맹세하셨고, 그리고 관심변경됨 없이,
당신은 그 오는시대 속의 제사장이시다.
그러함을 따라 더 나은 계약의 보증이 되셨다, 예수께서.
그리고 한편으로 넘치는 이들이 제사장이 되어 있는 것은,
죽음에 의해 곁에 머뭄이 막힘을 통해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이는 그 머뭄을 통해서 그 오는시대 속으로,
이양되지 않는 제사장직을 갖는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그이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그 각각/모두의 텔로스 속으로 온전케하실 수 있다,
그들을 대신/위해/넘어 모든 때에 그 만남/대면 속으로 사시기에.
왜냐하면 그러한 분이 당신들에게 대제사장으로 적절하셨기 때문이다,
깨끗하시며, 열등하지 않으시며, 더럽지 않으시며,
하마르톨로스들로부터 나뉘시는, 그리고 하늘들보다 더 높이 되신 이,
그이는 날들을 따라 아낭케를 갖지 않으신다,
마치 대제사장들이 이전에 개인적인 비뚤어짐들을 대신해 희생들을 올려드리고,
그러고나서 그 씨알의 죄들을 대신해 올려드리듯이.
왜냐하면 이것을 그이는 한꺼번에 하셨기 때문이다, 그 자신을 올려드리며.
즉 율법은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지만,
반면 그 율법과 함께 있는 맹세의 말씀은 아들을 이미 완성된 오는시대 속으로 세운다.
8
그런데 이 말된 것들에게 특이점은,
우리가 그러한 제사장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이는 하늘들 안의 위대한 왕좌의 오른쪽에 앉으셨다,
그 거룩한 이들과 참 장막의 섬기시는 이이며,
그 장막을 주께서 펴셨다, 사람이 아니라.)
왜냐하면 모든 제사장은
선물과 제사들을 앞에 가져가는 것 속으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그이가 앞으로 가져가시는 무언가를 가지셔야 한다는 필연성(아낭케)이 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만일 그이가 땅에 있었다면, 제사장이 아니었을 것인데,
그 선물들을 앞으로 가져가는 것들은 토라를 따라 있기 때문이다.
곁하늘들의 예와 그림자로서 섬기는 누구든지,
장막을 막 이루려는 모세가 지시를 받았던 것처럼, 그분이 말씀하신다.
"보라, 너는 모든 것을
이 산에서 너에게 제시된 틀에 따라 만들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계약의 중개자가 더 좋은 만큼,
이제는 다른 섬김이 발생했다(τυγχανω),
(그리고 그 계약은) 더 좋은 알림들 위에서 법으로 공표되었던 것이다.
즉 만일 처음의 그것이 나무할 것 없었다면,
장소는 두 번째를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그들을 나무라며 말씀하시길,
"보라, 날들이 온다, 주가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집 위에서와 유다 집 위에서
내가 새 계약을 이룰 것이다,
너희들의 아비들에게 행했던 그 계약을 따라서가 아니라,
(그 이집트로부터 그들을 밖으로 이끌기 위해,
그 날에 나의 그 손으로 그들을 곁에서 붙들었던).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나의 그 계약 안에 머물지 않았고,
바로 나는 그들에게 관심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가 말한다."
"바로 그 날들 뒤에 이스라엘 집에 내가 배치할 바로 그 계약에 관하여,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나의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주면서,
그들의 가온 위에 그것들을 새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신을 위하여 있을 것이고,
그들은 나에게 씨알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은 자신의 시민에게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은 자신의 형제에게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너 주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며 말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속한 나를 작은 자에서부터 큰 자까지."
"내가 그들의 불의들에게 자비롭게 있을 것이고,
그들의 비뚤어짐들을 결코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말씀하심 속에서
그분은 그 처음 것을 옛것되게 하셨다.
그런데 그 옛것되어 철지난 것은 사라짐 옆에.
9
그러므로 한편으로 그 첫 번째 (계약)도
고용된 일(禮, λατρεία)에 속한 원칙들(δικαίωμα)과
코스모스적인 그 거룩한 것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장막도 틀잡혔기(κατεσκευάσθη) 때문인데,
그 안에는 등대와 탁자와 거룩하다 이야기되는 그 빵들의 놓음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 두 번째 휘장과 함께
"거룩들 중 거룩"이라 이야기 되는 장막이 있는데,
그것은 금으로 된 향로와
금으로 모든 면이 싸인 그 계약의 궤를 가졌으며,
그 안에는 만나를 가진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이 돋은 지팡이와
그 계약의 돌판들이 있는데,
그 궤위에는 그 속죄소를 드리우는 영광의 케루빔이 있다.
그것들에 관하여 지금 부분을 따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그것들이 틀잡혔을 때,
한편으로 그 첫 번째 장막 안으로 모든 것을 통하여(διαπαντός)
제사장들이 들어간다 고용된 일들(λατρεία)을 완수하며,
다른 한편으로 두 번째 것 안으로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 홀로,
피와 분리되지 않은 채,
(그 피는 그가 그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그 씨알에 속한 모르고 지은 죄들을 위하여 앞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것을 그 거룩한 숨님이 분명히 하셨으니,
아직 그 거룩들에 속한 그 길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첫 번째 장막이 스타시스(στάσις)를 가진 동안에는,
(그 첫 번째 장막은 안에 세워졌던 그 카이로스 속으로 들어가는 비유이다,
그 비유를 따라 선물들과 희생들이 앞으로 드려지는데,
양심을 따라 그 고용된 것들(λατρεύοντα)을 이룰 수 없다,)
오직 먹는 것들과 마시는 것들과 정결의 다른 것들 곁에서,
살몸적 원칙들이 '곧음을 통하는(διόρθωσις)' 카이로스까지 곁에 놓였던 것들이다.
메시아는 그 크고 더 온전한 장막(손으로 짓지 않은)을 통해서
금세 도래하는 좋은 것들에 속하는 대제사장으로서 곁에 계시게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이 창조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염소들과 제물들의 피를 통해서도 아니고,
오히려 그 개인의 피를 통해서
한 번에 그 거룩한 것들 속으로 들어가셨다,
오는시대의 '속죄'를 인식하셨기에.
즉 만일 일반적이었던 것들에 뿌려진 염소들과 소들의 피와 어린 암소의 재가
살몸의 깨끗을 향하여 거룩하게 한다면,
(오는시대의 숨결을 통해 그 자신을 님께 흠없이 앞에 드리신) 그 메시아의 피는
너희들의 그 양심을 시체상태의 일들에서부터
사시는 님께의 고용된 일 속으로 얼마나 더 깨끗게 하겠는가?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그이는 새로운 계약의 매개이시다,
그 방식은, 첫 번째 계약 위에서 위반한 이들에게 속하는 구제를 위한 죽음이 있었고,
그때 그 오는시대의 상속에 속하는 부름받았던 이들이 그 알림을 취한 것이다.
즉 계약에 있어서,
그 계약한 자의 죽음이 등록되어야(φέρεσθαι) 하는 필요성이 있다.
즉 계약은 시체상태인 이들에게 확고한데,
이때 계약한 자(ὁ διαθέμενος)가 살아있다면 효력이 전혀 없다.
이러한 이유로 그 첫 번째 (계약)은 피 없이는 결코 새롭게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세에 의해 모든 그 씨알에게 토라를 따라 말된 모든 계명은,
제물들 염소들의 피를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와 함께 취하여
책과 모든 그 씨알에게 뿌렸기 때문이다, 말씀하길,
"이것이 님께서 너희를 향해 명하셨던 계약의 피이다."
그리고 그 장막과 심지어 모든 고용된 일(禮)에 속하는 도구들도 피로 동일하게 뿌렸다.
그리고 대체로 피 안에서 모든 것은 깨끗해진다, 그 토라를 따라,
그리고 피 흘림 없이는 보내버림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바로 이 하늘들 안에 속하는 '표현들(ὑπόδειγμα)'은
깨끗게 될 필연성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곁하늘들 자체들은 더 좋은 제사들 곁에서 깨끗게 될 필연성이 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손으로 지은 거룩한 것들 속으로 들어가신게 아니라,
(그것들은 참된 것들의 '반대 찍힘들'이다)
오히려 바로 그 하늘 자체 속으로,
지금 우리를 위해 님의 면전에 드러나시기 위해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번 그 자신을 앞에 가져가시기 위함이 아니다,
마치 대제사장이 그 거룩한 것들 속으로
해마다 이질적인 피 안에서 들어가는 것 마냥 (말이다),
이때 그 자신은 창조세계 설립에서부터 여러 번 겪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단번에 시대들의 끝에
비뚤어짐의 폐지 속으로 그이의 희생을 통해 나타나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단번에 죽는 것(ἅπαξ ἀποθανεῖν)이 놓인 것을 따라,
이것과 '함께' 심판이 있다.
이처럼 메시아도, 여러 비뚤어짐들을 위로/다시 가져가기 위해
단번에 앞으로 드려지셨는데,
두 번째로부터, 비뚤어짐 없이,
온전함 속으로 그이를 받아들인 이들에게 목격되실 것이다.
10
왜냐하면 노모스는 금세 도래할 좋은 것들의 그림자를 갖지만,
그 문제(쟁점)들의 에이콘 그 자체는 아니며,
해를 따라서 그 디에네케스 속으로 봉헌되는 희생제물 자체로는
앞으로 나아오는 이들이 과정을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단번에 깨끗해진 고용인(예배자)들이 어떤 비뚤어짐에 속한 양심도 갖지 않는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봉헌되던 것들은 중단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들 안에서 비뚤어짐들의 상기가 해를 따라 있다,
(즉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가 비뚤어짐들을 잘라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코스모스 속으로 들어오셨던 이가 말씀하셨다,
"'당신은 희생과 봉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은 나에게 몸을 짜주셨습니다.
당신은 비뚤어짐들에 관한 번제들도 좋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때 내가 말하길,
'보시옵소서! 제가 왔습니다,
(책의 머리에 나에 관해 쓰여 있었습니다),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여! 당신의 싶음을.'
더 위에 말씀하시기를,
"희생들과 봉헌들과 비뚤어짐들에 관한 번제들도
그분은 바라지 않으셨고, 좋게 생각하지도 않으셨다."
(이것들은 노모스를 따라 봉헌되는 것들이다)
그때 말씀하셨다,
"보시옵소서! 제가 왔습니다,
당신의 싶음을 행하기 위해서."
그이는 그 첫 번째 것을 위로 들어버리신다,
이는 그 두 번째 것을 세우기 위함이다.
이 두 번째 싶음 안에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
메시아 예수의 그 몸을 단번에 봉헌하심을 통하여.
그리고 한 편으로 모든 제사장은 서있다,
예배의 날과 그가 여러 번 봉헌하는 제사들 그 자체를 따라,
(그런데 그 날과 제사들은 결코 비뚤어짐들을 끊을 수 없다).
다른 한 편 그이는 비뚤어짐들을 대신하는 하나의 희생을
그 디에케네스 속으로 봉헌하셨고 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
남은 것은 그이의 대적자들이 그이의 두 발의 받침대로 놓일 때까지.
그 영접으로부터 열망하시는 분(εκδεχομενος)이다,
왜냐하면 한 번의 봉헌으로 그이가 거룩해진 이들(의 과정)을
그 디에케네스 속으로 끝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룩한 숨결도 우리에게 증언하신다.
즉 이 말씀하셨던 것과 함께,
"내가 그들을 향해 바로 이 날들과 함께 맺을 계약이 바로 이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줄 나의 노모스들을
그들의 가온 위에, 그리고 그들의 그 생각 위에,
내가 쓸 것이다, 바로 그것들을,
그리고 그들의 비뚤어짐들과 그들의 법없음들을
결코 내가 더 이상 기억(하)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것들의 놓임(보내버림)이 있고,
더 이상 비뚤어짐에 관한 봉헌은 없다.
11
그런데 신실함은 소망된 것들의 토대이며, 쟁점들의 보이지 않았던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 신실함 안에서 어른들이 증언되었기 때문이다.
신실함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님의 이야기(ῥῆμα)로 이 시간들이 기워졌다(κατηρτίσθαι)는 것을,
그래서 보이는 것은 드러난 것들로부터 되지 않았다.
신실함으로 아벨은 가인 곁에서 더 넘치는 희생을 님께 봉헌했고,
그 희생을 통해서 의인으로 증언되었다, 그의 선물들 곁에서 그 님은 증언하셨다,
그리고 그 희생을 통해 그는 죽었지만 여전히 말한다.
신실함으로 에녹은 사망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
그리고 그는 님께서 그를 옮겨놓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발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옮겨놓으시기 전에
'하나님께 잘 들어맞았다(εὐαρεστέω)'고 증언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실함 없이는 좋게 들어맞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님 앞으로 드려지는 사람은
다음의 사실에 신실해야하기 때문이다,
'님은 계시며
그 님은 님을 찾음으로부터 있는 이들에게
보상해주심이 되셨다는 것'
신실함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하여 다루게 되었고,
신중하게 행동하여 그의 집의 온전함을 위해 방주를 갖추었다,
그 방주를 통하여 그는 이 코스모스를 정죄했고(κατακρίνω),
그리고 신실함을 따른 그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신실함으로 아브라함은 부름받았고
금세 상속지를 위해 취할 곳 속으로 나가라는데 잘 들었다,
그리고 그는 어디로 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나갔다.
신실함으로 그가 다른 곳에 속한 것처럼 그 알림의 땅 속으로 곁에서 거주했다,
그 땅의 그 알림의 공동 상속자들에 속하는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 안에서 따라 살았다.
왜냐하면 그가 그 기초들(θεμελιος)을 가진 도시를 바랐기(εξεδεχετο) 때문이다,
(님은 그 도시의 기예자이며 창조자이다.)
신실함으로 사라 그녀도 씨의 설립 속으로 잠재력을 일생의 카이로스 곁에서도 취했고,
이때 그녀는 '알려진 이가 신실하시다'고 해석했다.
그러므로 시체상태됨에 속했던 것들이 실로 하나에서부터 태어났다,
마치 많음에 있어서 그 하늘의 그 별들과 같이,
또 그 바다의 입 곁에 있는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신실함을 따라 그들 모두는 죽었다, 그 알림들을 (몫으로) 받지 못하고,
오히려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서 인사하며, 고백했다,
그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들과 외국인들임을.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말하는 이들은
그들이 아버지의 땅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한 편으로 그들이 걸어 나온 그 땅으로부터 아버지의 땅을 상기했다면,
돌아갈 때를 가졌을 것이다.
이제 다른 한 편으로 그들이 더 좋은 것에 손 뻗고 있는데,
이것은 곁하늘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님은 그들이 ‘그들의 님’이라 부르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도시’를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신실함으로 아브라함은 시험받았을 때 그 이삭을 봉헌했다,
그리고 그 알림들을 받고 열망했던 이는 그 외아들을 봉헌했다,
그를 향해서 말되었다, '이삭 안에서 그는 너에게 씨라 불릴 것이다.'
그는 시체 상태인 이들로부터 일으키실 수 있는 님이라고 산정했다.
바로 거기서부터 그를 비유 안에서 (몫으로) 받은 것이다.
신실함으로 임박한 것들에 관하여 이삭은 그 야곱과 그 에서를 잘 말했다.
신실함으로 야곱은 죽을 때 요셉 아들들 각각을 잘 말했다,
그리고 그의 지팡이 끄트머리 위에서 경배했다.
신실함으로 요셉이 죽을 때 이스라엘 아들들의 그 출애굽에 관하여 상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뼈들에 관하여 분부했다.
신실함으로 모세는 태어났을 때 삼 개월 동안 그의 아비들에 의해 감추어졌고,
그래서 그들이 그 아이의 세련됨을 보았다, 그리고 왕의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실함으로 모세는 크게 되어 파라오 땅의 아들이라 이야기되기를 거절하고,
더욱 님의 씨알과 함께 열악한 취급 당하기를 선택했다, 비뚤어짐의 누림을 일시적으로 갖는 것보다,
그가 그 이집트의 쌓인 것들보다 그 메시아의 비난을 큰 부유함이라 해석하며,
왜냐하면 그 보상받음 속으로 시선을 고정했기 때문이었다.
신실함으로 그는 이집트를 뒤로남겼다, 그 왕의 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일관적으로 대했다(καρτερέω).
신실함으로 그 유월절과 그 피의 뿌림을 행했다,
이는 멸하는 이가 그들의 그 처음 난 것들을 건드리지 않기 위함이다.
신실함으로 그는 홍해를 마른 땅을 관통하듯, 관통하여 걸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 마른 땅의 시험을 취했고 삼켜졌다.
신실함으로 여리고의 그 성벽들이 무너졌다, 그것들이 일곱째 날에 포위되었을 때.
신실함으로 음녀 라합은 설득되지 않았던 이들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았다,
그녀가 평화와 함께 정탐꾼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을 내가 더 말하겠는가?
왜냐하면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과 사무엘과
그 예언자들에 관한 크로노스가 풀어내려는 나를 실패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실함을 통하여 그들은 왕권들과 맞서 투쟁하며, 의를 만들었고,
알림들을 마주쳤으며, 사자들의 입을 막았다, 불의 잠재력을 꺼버렸고, 대검의 입을 피했다,
연약함에서부터 강하게 되었고, 전쟁 안에서 강한 이들이 되었다,
그들은 다른 곳에 속한 진영들을 고개 숙이게 했다.
여자들은 그녀들에게 속한 시체상태인 이들을 다시 일어남으로부터 취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도구로 두드려졌는데, 그들은 그 풀려남을 열망했다,
이는 그들이 더 좋은 다시 일어남을 만나기 위함이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비난들과 채찍질들의 시험을 취했다,
또 다른 이들은 묶임들과 갇힘들의 시험을 취했다.
그들은 돌팔매를 당하고, 시험을 당하며, 톱으로 썰렸으며,
대검의 살육 안에서 죽었고, 양들, 염소 가죽들 안에서 주변을 다녔고,
궁핍했고, 억눌렸으며, 열악한 취급 당했는데,
이들이 코스모스가 합당하지 않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야들과 산들과 동굴들과 땅의 구멍들에서 헤맸다.
그리고 이들 모두 그 신실함을 통해 증언된 이들인데
그 알림을 (몫으로) 받지 않았다,
님께서 우리에 관하여 더 좋은 무언가를 보시기 때문인데,
이는 우리 없이는 그들이 완수되지 않기 위함이다.
12
그러므로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도,
우리 곁에 깔린 증인들의 구름을 가지고 있는 한,
모든 쌓아놓은 것과 곁에 서기 쉬운 비뚤어짐를 떼어두고,
견딤을 통해서 달려가자, 우리 앞에 깔린 싸움들을 향하여,
시선을 그 신실함의 아르케고스이며 완수자인 그 예수 속으로 고정한 채로,
(그이는 앞에 깔린 기쁨들에 십자가를 견디셨다, 수치를 간과하시며,
그 하나님 왕좌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즉 그 맞서는 말(αντιλογον)만을 위하는 비뚤어진 이들에 의해
그이는 바로 이렇게 견디셨음(ύπομενη)을 너희들은 다시 산정하라,
이는 너희들이 지치지 않게 하려 함이다,
너희들의 프쉬케들을 풀어버려서(εκλυω).
너희들이 맞서 싸울 때에 아직 피까지는 그 비뚤어짐을 향해 맞놓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들은 그가 아들들같은 너희들에게 나누신 그 파라클레시스를 잊었다,
'나의 아들아,
주의 훈육을 작게 여기지 말고,
확실한 증거에 의해 논박당할 때
그에 의해서 풀려버리지 말아라,
왜냐하면 주는 그를 사랑으로 훈육하시며,
그는 그가 받아들인 모든 아들을 채찍질하시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훈육 속으로 견뎌라.
왜냐하면 너희 아들들에게 님이 봉헌되시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가 훈계하지 않는 아들이 누구이겠는가?
그런데 만일 너희들이 훈계 없이 있다면,
(모두가 그 훈계의 참여가 되었다)
버려진 자식이지 참 아들들은 아니다.
그리고 실로 우리는 우리의 살몸의 아버지들을 훈계자들로서 갖으면서 부끄러워 않는다.
(그런데) 숨결들의 아버지에게는 우리가 아래 놓이고 살 것이 얼마나 더 하겠는가?
왜냐하면 한 편의 사람들은 작은 날들을 향하여 의견을 따라 그들에게 훈육해왔지만,
다른 한 편으로 님은 자신의 거룩을 함께 가져가는 것을 위한 그 이익 위에서
(훈육하시기 때문이다).
실로 한 편으로 '함께 있음'을 향하는 모든 훈육은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으로 생각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 뒤에는 의에 속한 평화적 열매가
훈육을 통해 훈련된 이들에게 배분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곁에 세워두었던 손들과
곁에 풀려버렸던 무릎들을 위로 곧게 하라,
그리고 너희들은 너희의 두 발로 곧은 길들을 만들어라,
이는 다리 저는 이가 (길을) 벗어나지 않고, 더욱 낫게 되기 위함이다.
너희들은 모든 것들과 함께 평화를 추구하라, 그 거룩한 것을,
그것 없이는 누구도 그 주님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돌아보라,
누군가가 하나님의 그 거저에서부터 뒤쳐지지 않도록,
누군가가 위로 자라난 극도로 악한 뿌리가 되어 소요를 일으키고,
많은 이들이 그 뿌리를 통해 물들지 않도록,
누군가가 남창이나 에서처럼 금기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그는 하나의 음식 대신에 그 자신의 첫낳음들을 팔아넘겼다).
즉 너희들은 알고 있다,
그런 뒤에 그가 좋은말을 상속받길 욕망하지만 거절되었다,
즉 생각바꿈의 자리를 그가 발견하지 못했다,
좋은말을 눈물들과 함께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즉 너희들은 만져짐과 불 붙음과 먹구름과 어둠과
천둥과 나팔의 울림과 이야기들의 소리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듣는 이들은 자신들 앞에 말씀을 두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양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그들을 관통하여 주어진 것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짐승이 이 산들을 건드린다면, 투석형에 처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포가 드러난 것으로 있었고, 모세는 말했다.
"나도 공포스럽고 떨린다."
그러나 너희들은 시온 산에 나아갔다,
그 사시는 하나님의 도시, 곁 하늘 예루살렘과
셀 수 없는 천사들의 광장에,
그리고 하늘들에 새겨진 장자들의 에클레시아에,
그리고 모든 것들의 심판자이신 님께,
그리고 이미 완수된 의인들의 숨결들에,
그리고 새 계약의 매개자 예수께,
그리고 그 아벨 곁에서 이야기 된 더 좋게 뿌려진 피에.
너희들은 경계하라, 이야기된 분 곁에서 사양하지 않도록.
즉 만일 땅에서 곁에서 언표된 것을 사양했던 당사자들이 달아나지 못했는데,
하늘들에서부터 온 분을 돌아선 우리들은 얼마나 더 하겠는가?
그이의 소리가 그때 그 땅을 흔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이가 알려졌다, 다음과 같이 말하며,
"지금 단번에 내가 이 땅 뿐만 아니라 그 하늘도 흔들 것이다."
그런데 이것, "단번에"는 그 흔들림들의 옮겨놓음을 명백히 한다,
이미 행해진 것들로서, 이는 흔들리지 않은 것들이 남아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왕권을 곁에서 취한 우리가 카리스를 갖자,
이 카리스를 통해 우리 예배하자,
님께 딱 맞아 기쁘게, 경외와 두려움과 함께.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이 태워버리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13
형제우애(φιλαδελπια)가 머물게 할지라.
너희들은 낯선 사람 환대를 잊지말라.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낯선 전달자들을 취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묶인 이들을 함께 묶여있는 이들로서 기억하라,
몸 안에 있는 것 같이 고문받는 이들을 기억하라.
결혼은 모두 안에서 값지며, 침대는 더럽지 않다,
왜냐하면 님은 음행자들과 간통자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방식은 돈을 사랑하지 않음이고, 곁에 있는 것들로 만족함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이가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결코 남겨두지 않는다,"
그래서 용기내는 우리가 말한다,
"주님은 나에게 돕는 이시다,
내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하겠는가?"
너희들은 너희들을 이끌었던 이들을 기억하라,
그들은 너희들에게 그 님의 로고스를 말했다,
그들의 떠남(ἔκβασις)을 들여다보며
그 생활방식의 신실함을 너희들은 모방하라.
메시아 예수이시다, 어제와 오늘, 바로 그분이, 그 시대들 속으로도.
다양하고 낯선 가르침들 곁에 이끌리지 말라.
왜냐하면 '거저'로 그 가온이 확고히 됨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행한 이들을 돕지 못하는 먹는 것들로가 아니라.
우리는 번제단을 가지고 있다,
장막에 고용되어 일하는 이들은 거기로부터 먹는 엑수시아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산 것들의 그 비뚤어짐에 관한 그 피는
거룩한 것들 속으로 그 대제사장을 통해 날라지고,
그 산 것들의 그 몸들은 진 밖에서 태워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도,
그 씨알을 그 자신의 피를 통해 거룩케 하기 위하여, 그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셨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그를 향해 그 진영의 밖으로 가자, 그이의 비난을 나르며.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 머문 도시를 갖지 않고,
오히려 도래할 도시를 곁에서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이를 통해서 우리가 찬양의 희생을 만물을 통해 그 님께 위로 나르자,
이것이 그이의 이름으로 고백하는 입술들의 열매다.
그런데 너희들은, 선행과 교제를 잊지말라,
왜냐하면 이러한 희생들을 통해 그 님께서 딱 맞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너희를 이끄는 이들에게 설득되어라, 그리고 그 아래 협조하라,
왜냐하면 그들이 너희들의 프쉬케를 위해서 자지 않고 지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을 드릴 때가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이 기쁨과 함께 그들이 행하기 위함이다,
한탄하지 않고, (왜냐하면 이것이 너희에게 무익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우리에 관하여 기도하라,
왜냐하면 우리들이 우리가 온전한 양심 가졌다는 사실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 안에서 온전하게 생활되기를 욕망하며.
그런데 나는 더욱 이것(기도) 하기를 권면한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더 속히 돌아가게 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 평화의 님이,
시체들로부터 그 양들의 그 위대한 목자를 오는시대의 계약의 피 안에서 위로 이끄셨고,
(그 우리 주님 예수를), 우리를 기우시리라,
모든 좋음 안에서 그이의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그 들어맞아 기쁨을 님의 면전에서 메시아 예수를 통해 행하시며,
그이에게 시대들의 그 시대들 속으로 뚜렷이. 아멘.
그런데 나는 너희들에게 권한다, 형제들이여,
너희들은 이 권면의 말을 붙잡아라,
그리고 이는 짧은 것들을 통해 너희들에게 편지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우리의 이 형제, 디모데가 이미 풀려났음을 깨달으라,
그와 함께 (만일 속히 그가 온다면), 나도 너희들을 볼 것이다.
너희들은 모든 너희들의 이끄는 이들과 모든 거룩한 이들을 문안하라.
이탈이아에서부터 온 이들도 너희들을 문안한다.
너희들 모두들과 함께 그 거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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