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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40, 개인번역

 

[1]

   그런데 신실함은 소망된 것들의 토대이며, 쟁점들의 보이지 않았던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 신실함 안에서 어른들이 증언되었기 때문이다.

신실함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님의 이야기(ῥῆμα)로 이 시간들이 기워졌다(κατηρτίσθαι)는 것을,

그래서 보이는 것은 드러난 것들로부터 되지 않았다.

 

[2]

   신실함으로 아벨은 가인 곁에서 더 넘치는 희생을 님께 봉헌했고,

그 희생을 통해서 의인으로 증언되었다, 그의 선물들 곁에서 그 님은 증언하셨다,

그리고 그 희생을 통해 그는 죽었지만 여전히 말한다.

 

   신실함으로 에녹은 사망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μετάθεσις),

그리고 그는 님께서 그를 옮겨놓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발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옮겨놓으시기 전에 '하나님께 잘 들어맞았다(εαρεστέω)'고 증언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실함 없이는 좋게 들어맞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님 앞으로 드려지는 사람은
다음의 사실에 신실해야하기 때문이다,

 

   '님은 계시며

   그 님은 님을 찾음으로부터 있는 이들에게

   보상해주심이 되셨다는 것'

 

   신실함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하여 다루게 되었고,
신중하게 행동하여 그의 집의 온전함을 위해 방주를 갖추었다,

그 방주를 통하여 그는 이 코스모스를 정죄했고(κατακρίνω), 그리고 신실함을 따른 그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신실함으로 아브라함은 부름받았고 금세 상속지를 위해 취할 곳 속으로 나가라는데 잘 들었다,

그리고 그는 어디로 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나갔다.

신실함으로 그가 다른 곳에 속한 것처럼 그 알림의 땅 속으로 곁에서 거주했다,

그 땅의 그 알림의 공동 상속자들에 속하는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 안에서 따라 살았다.

왜냐하면 그가 그 기초들(θεμελιος)을 가진 도시를 바랐기(εξεδεχετο) 때문이다,

(님은 그 도시의 기예자이며 창조자이다.)

 

   신실함으로 사라 그녀도 씨의 설립 속으로 잠재력을 일생의 카이로스 곁에서도 취했고,

이때 그녀는 '알려진 이가 신실하시다'고 해석했다.

그러므로 시체상태됨에 속했던 것들이 실로 하나에서부터 태어났다,

마치 많음에 있어서 그 하늘의 그 별들과 같이,

또 그 바다의 입 곁에 있는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신실함을 따라 그들 모두는 죽었다, 그 알림들을 (몫으로) 받지 못하고,
오히려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서 인사하며, 고백했다, 그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들과 외국인들임을.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말하는 이들은

그들이 아버지의 땅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한 편으로 그들이 걸어 나온 그 땅으로부터 아버지의 땅을 상기했다면,
돌아갈 때를 가졌을 것이다. 이제 다른 한 편으로 그들이 더 좋은 것에 손 뻗고 있는데,

이것은 곁하늘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님은 그들이 그들의 님이라 부르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도시를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신실함으로 아브라함은 시험받았을 때 그 이삭을 봉헌했다,

그리고 그 알림들을 받고 열망했던 이는 그 외아들을 봉헌했다,

그를 향해서 말되었다, '이삭 안에서 그는 너에게 씨라 불릴 것이다.'

그는 시체 상태인 이들로부터 일으키실 수 있는 님이라고 산정했다.

바로 거기서부터 그를 비유 안에서 (몫으로) 받은 것이다.

 

   신실함으로 임박한 것들에 관하여 이삭은 그 야곱과 그 에서를 잘 말했다.

 

   신실함으로 야곱은 죽을 때 요셉 아들들 각각을 잘 말했다,

그리고 그의 지팡이 끄트머리 위에서 경배했다.


  신실함으로 요셉이 죽을 때 이스라엘 아들들의 그 출애굽에 관하여 상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뼈들에 관하여 분부했다.

 

   신실함으로 모세는 태어났을 때 삼 개월 동안 그의 아비들에 의해 감추어졌고,

그래서 그들이 그 아이의 세련됨을 보았다, 그리고 왕의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실함으로 모세는 크게 되어 파라오 땅의 아들이라 이야기되기를 거절하고,

더욱 님의 씨알과 함께 열악한 취급 당하기를 선택했다, 비뚤어짐의 누림을 일시적으로 갖는 것보다,

그가 그 이집트의 쌓인 것들보다 그 메시아의 비난을 큰 부유함이라 해석하며,

왜냐하면 그 보상받음 속으로 시선을 고정했기 때문이었다.

신실함으로 그는 이집트를 뒤로남겼다, 그 왕의 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일관적으로 대했다(καρτερέω).

신실함으로 그 유월절과 그 피의 뿌림을 행했다,

이는 멸하는 이가 그들의 그 처음 난 것들을 건드리지 않기 위함이다.

신실함으로 그는 홍해를 마른 땅을 관통하듯, 관통하여 걸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 마른 땅의 시험을 취했고 삼켜졌다.


  신실함으로 여리고의 그 성벽들이 무너졌다, 그것들이 일곱째 날에 포위되었을 때.

 

   신실함으로 음녀 라합은 설득되지 않았던 이들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았다,

그녀가 평화와 함께 정탐꾼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3]

   그리고 무엇을 내가 더 말하겠는가?

왜냐하면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과 사무엘과

그 예언자들에 관한 크로노스가 풀어내려는 나를 실패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실함을 통하여 그들은 왕권들과 맞서 투쟁하며, 의를 만들었고,

알림들을 마주쳤으며, 사자들의 입을 막았다, 불의 잠재력을 꺼버렸고, 대검의 입을 피했다,

연약함에서부터 강하게 되었고, 전쟁 안에서 강한 이들이 되었다,

그들은 다른 곳에 속한 진영들을 고개 숙이게 했다.

여자들은 그녀들에게 속한 시체상태인 이들을 다시 일어남으로부터 취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도구로 두드려졌는데, 그들은 그 풀려남을 열망했다,

이는 그들이 더 좋은 다시 일어남을 만나기 위함이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비난들과 채찍질들의 시험을 취했다,

또 다른 이들은 묶임들과 갇힘들의 시험을 취했다.

그들은 돌팔매를 당하고, 시험을 당하며, 톱으로 썰렸으며,

대검의 살육 안에서 죽었고, 양들, 염소 가죽들 안에서 주변을 다녔고,

궁핍했고, 억눌렸으며, 열악한 취급 당했는데,

코스모스가 이들에게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야들과 산들과 동굴들과 땅의 구멍들에서 헤맸다.

 

그리고 이들 모두 그 신실함을 통해 증언된 이들인데 그 알림을 (몫으로) 받지 않았다,

님께서 우리에 관한 더 좋은 무언가를 보시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 없이는 그들이 완수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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