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히브리서 13:1~25
형제우애(φιλαδελπια)가 머물게 할지라.
너희들은 낯선 사람 환대를 잊지말라.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낯선 전달자들을 취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묶인 이들을 함께 묶여있는 이들로서 기억하라,
몸 안에 있는 것 같이 고문받는 이들을 기억하라.
결혼은 모두 안에서 값지며, 침대는 더럽지 않다,
왜냐하면 님은 음행자들과 간통자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방식은 돈을 사랑하지 않음이고, 곁에 있는 것들로 만족함이다.
형제우애는 희랍어로 필라델피아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미국의 도시는 1682년 퀘이커교도였던 윌리엄 펜이 이름 붙였다. 아마도 그는 신약성경 어딘가에서 필라델피아를 읽었고, 그 단어를 무척 사랑했던 것 같다. 자신이 시작할 도시의 이름으로 쓸 만큼. 형제사랑으로 익숙한 단어를 내가 "형제우애" 라고 번역한 이유는, 저 '필리아(φιλια)'라는 단어가 좁게는 친구간의 우정, 넓게는 국가 간의 우호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우애'라는 단어는 칼슈미트의 친구/적 이론이 보여주듯, 적이 아니라면 친구이고, 친구가 아니라면 적을 삼는 주권국가의 기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의 '필리아'는 이러한 일반적인 구분선을 꼬아버린다.
"너희들은 낯선 사람 환대를 잊지 말라"
익숙한 이를 친구로, 낯선 이를 적으로 구분하는 필리아의 일반적인 구분선은 낯선 이와의 우정을 통해 새로운 구분선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구분선은 '낯선 이를 환대함'과 '낯선 이를 적대시함' 사이를 가르게 된다. 낯선 이를 환대하는 윤리적 행동은, 낯선 이를 환대하지 않는 집단에서는 그 집단에 대한 위협이 되는데, 이는 국가와 인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낯선 이는 국가가 정체성을 부여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가 말했듯 예전에는 유럽 사회를 이어주던 "덕"이라는 모호한 연대가 환대를 가능하게 했으나, 이제는 그 "덕"의 연대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기에, 낯선 이들에 대한 환대는 그 정당성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우리의 일자리를 저들이 빼앗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미래상은 배제와 차별의 현재가 되어 출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작연대는 유대 성전의 멸망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과 디모데의 생존을 염두한 A.D 68, 69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즉 예루살렘 멸망 직전의 사람들인 것이다. 낯선 이들을 환대하라고 요청받은 이 사람들은, 이제 곧 자신들이 타국 땅에서 낯선 이들이 된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저 구절의 필요성을 환대를 베푸는 쪽이 아닌 그 반대편에서 체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환대를 받아야 마땅한 처지의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환대하며 에클레시아의 구분선을 지켜가지 않았을까. 정말 콩 한 쪽도 나눠먹으며.
"인민이 존재하는 방식은 국가가 아니라 계급투쟁"이라 지젝이 말했듯이, 에클레시아는 낯선 이를 환대하는 것을 통해 그어지는 구분선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서 존재한다. 환대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환대함으로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에클레시아의 구분선을 지키고자 구성원의 일부가 투옥되었고, 고문받고 있다. 이 투옥과 고문은 저 구분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일환이요, 남아있는 자들 역시 투쟁을 이어나가며 구분선을 사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선의 사수는 이 구분선을 지키지 않는 다수로부터 스스로를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마치 할례 때 떨어져나간 살점처럼.
기자는 이 구분선을 좀 더 구체화한다. 에클레시아는 낯선 이들의 환대와 더불어 '결혼'과 '경제 생활'의 구분선을 유지해나갔다. (토마스 슈라이너는 '몸의 고문'을 언급하다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몸'이 나오니까 '성관계'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기자가 전달하려는 전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1차원적인 독해가 아닌가?) 극심한 남성 우월주의 아래서 음행과 간통이 일반적이었던 사회 안에서, 결혼 제도 안에서의 성관계를 고수하는 에클레시아는 인간성의 '최후의 보루'로서 끝 시간에 서 있다. 또한 돈과 또한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원문을 직역하면, '돈과의 비우호적 관계', ἀφιλάργυρος) 역시 '필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에클레시아의 외교정책을 보여준다. 낯선 이와는 우호관계를, 성관계는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없는' 돈과는 비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 있는 돈을 만족으로 대하며.
그리고 오늘날 에클레시아도, 우리의 구분선이 무엇일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 구분선을 명확히 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에클레시아는 비에클레시아와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집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에클레시아에게는 윤리적 구분선과 그것을 사수하려는 윤리적 투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에클레시아는 '이름'에 있어서 세속보다 우위를 점한다(그래서 그 이름은 승리의 이름인가보다). 세속은 윤리적 투쟁을 위해서 함께 규합할 수 있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에클레시아 역시 세속과 비교했을 때 쉽게 인정할만한 차이만 있다면, 그것은 동일성에 근거한, "차이의 윤리"에 이미 점령당한 것이리라.
이어지는 두 개의 구약 인용은, 투쟁의 정당성과 과격함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바로 그이가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결코 남겨두지 않는다,"
그래서 용기내는 우리가 말한다,
"주님은 나에게 돕는 이시다,
내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하겠는가?"
기자는 성경 구절 두 개를 연결시켜 대화를 구성한다. 먼저 인용된 구절은 창세기 28:15 혹은 신명기 31:6,8, 그리고 여호수아 1:5라고 이야기되는 구절이다. 비슷비슷한 구절이다. 대표로 여호수아를 가져왔다.
여호수아 1:5, 새번역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일으키시는 님은, 벧엘에서 야곱에게,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또 직접 여호수아에게 위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 말씀을 에클레시아가 듣고, 이렇게 용기내어 대답한다.
시편 118:6, 개역한글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편 118편은 메시아의 시편이다. 즉 대답하는 에클레시아는 자신들을 메시아와 동일시하고 있다. 즉그들은 메시아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메시아와 스스로 동일시하도록 부름받은 이들이다.
A.
너희들은 너희들을 이끌었던 이들을 기억하라,
그들은 너희들에게 그 님의 로고스를 말했다,
그들의 떠남(ἔκβασις)을 들여다보며
그 생활방식의 신실함을 너희들은 모방하라.
B.
메시아 예수이시다, 어제와 오늘, 바로 그분이, 그 시대들 속으로도.
다양하고 낯선 가르침들 곁에 이끌리지 말라.
왜냐하면 '거저'로 그 가온이 확고히 됨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행한 이들을 돕지 못하는 먹는 것들로가 아니라.
C
우리는 번제단을 가지고 있다,
장막에 고용되어 일하는 이들은 거기로부터 먹는 엑수시아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산 것들의 그 비뚤어짐에 관한 그 피는
거룩한 것들 속으로 그 대제사장을 통해 날라지고,
그 산 것들의 그 몸들은 진 밖에서 태워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B'
그러므로 예수도,
그 씨알을 그 자신의 피를 통해 거룩케 하기 위하여, 그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셨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그를 향해 그 진영의 밖으로 가자, 그이의 비난을 나르며.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 머문 도시를 갖지 않고,
오히려 도래할 도시를 곁에서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이를 통해서 우리가 찬양의 희생을 만물을 통해 그 님께 위로 나르자,
이것이 그이의 이름으로 고백하는 입술들의 열매다.
그런데 너희들은, 선행과 교제를 잊지말라,
왜냐하면 이러한 희생들을 통해 그 님께서 딱 맞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A'
너희들은 너희를 이끄는 이들에게 설득되어라, 그리고 그 아래 협조하라,
왜냐하면 그들이 너희들의 프쉬케를 위해서 자지 않고 지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을 드릴 때가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이 기쁨과 함께 그들이 행하기 위함이다,
한탄하지 않고, (왜냐하면 이것이 너희에게 무익하기 때문이다.)
본문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단락을 나누고 알파벳을 붙였다. 완벽하게 교차대구법이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주제들을 중심으로 대강 저렇게 나눌 수 있다.
A. 떠나간 지도자들의 신실함 모방하라.
B. 그 신실함은 메시아 예수이지, 음식 법이 아니다.
C. 번제단에선 피는 날라지고, 진 밖에서 몸은 태우므로 먹을 것이 없다.
B' 예수의 피가 날라지고, 진 밖에서 몸은 태워졌다.
고로 음식 법은 신실함이 아니다. 찬양과 선행과 교제다.
A' 지금 있는 지도자들에게 협조하라.
기자는 이미 죽은 지도자들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을 기억하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통해 신실함을 배우라고 촉구한다.
그런데 그 신실함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오는시대 속으로 계시는 메시아 예수에 대한 신실함이지 음식에 관한 규례의 준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 외에 무언가 보태려는 낯선 가르침들이 있으니 거기에 이끌려선 안된다. 낯선 사람은 환대해야 하나, 낯선 가르침들은 배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 배우기 위해 낯선 사람과 우호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오히려 무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구분선을 지키며 줄곧 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르치려는 것이 대타자의 이데올로기일 수는 없다. 그 가르치려는 무언가는 그저 '거저'이다. 은혜로 번역되는 카리스는 '이유없음'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이유없이 가온이 확고히 되어 온전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공동체를 열어놓는 것이다.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것만이 온전하다. 그러나 음식법은 온전한 삶을 돕지 못한다.
기자는 우리가 번제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때 우리는 유대인일 것이다. 유대인들이 잘 알다시피, 장막에 고용되어 일(예배, λατρεια)하는 이들은 번제단으로부터 아무 것도 먹을 권한이 없다. 권한도 없을 뿐더러 먹을 것도 없다. 제물의 피는 지성소로 대제사장에 의해 '날라지고', 제물의 고기는 진 밖에서 태워없애기 때문이다. 기자는 이 번제단 이야기를 왜 언급했을까? 장막에 고용되어 예배하는 이들이 먹어서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음식법을 여전히 고수하려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어떤 음식을 먹고 안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이다. 그 예수는 대제사장이자 제물로서, 성 밖에서 태워지면서도(십자가 처형), 지성소로 들어가셨다(승천). 무언가를 먹기 때문에 온전해지는가? 아니면 성 밖에서 태워지시고 지성소로 들어가신 그이를 따르기 때문인가? 예수께 쏟아졌던 비난은 그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러나 성 밖, 즉 스스로 배제된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은, 그 자리가 옛 성과 새 성을 연결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거기가 도래할 도시와 가장 가깝다. 따라서 구분선을 유지하기 위해 배제당하면서도 기뻐하며, 비난당하면서도 찬양한다. 선행과 교제는 이 옛것과 새것의 접점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향기다. 그 자리에서의 삶을 일으키시는 님께서 기뻐하신다.
그리고 다시 A의 주제로 돌아온다. 이러한 에클레시아의 삶을 이끄는 이들을 신뢰하고 협조해야 한다. 단순히 신뢰와 협조를 넘어서 존경해야 한다. 이런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을, 지배/피지배의 도식 아래서 굴종적인 것으로 읽어선 곤란하다. 국가와 인민 사이에서 개념들만 가지고는, 인민을 결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지젝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보이도록 윤곽 자체를 바꾸는 차원은 오직 고유명의 개입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존경할만한 지도자들의 존재와 그들에 대한 인정은, 투쟁하는 공동체의 힘이다.
너희들은 우리에 관하여 기도하라,
왜냐하면 우리들이 우리가 온전한 양심 가졌다는 사실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 안에서 온전하게 생활되기를 욕망하며.
그런데 나는 더욱 이것(기도) 하기를 권면한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더 속히 돌아가게 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 평화의 님이,
시체들로부터 그 양들의 그 위대한 목자를 오는시대의 계약의 피 안에서 위로 이끄셨고,
(그 우리 주님 예수를), 우리를 기우시리라, 모든 좋음 안에서 그이의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그 들어맞아 기쁨을 님의 면전에서 메시아 예수를 통해 행하시며,
그이에게 시대들의 그 시대들 속으로 뚜렷이. 아멘.
기자는 '우리'를 지칭한다. 이때 우리는 누구일까? 기자와 함께 하는 일행이 있었던 것일까? 자신이 온전한 '양심'을 가졌다는 사실에 확고해졌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언인가? 자신의 양심이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단 말인가? 이때 양심은 쉰에이도스(συνειδος)로 앞으로는 '의식'으로 번역하려는 단어다. 메시아의 형상을 통해 그 전모가 드러난 양심. 양심의 온전하지 못함은 그 은폐성에 있다. 공개된 양심은 죄가 발견될 때마다 그 죄를 키우지 않고 일소할 수 있는 양심이다. 따라서 이 양심은 개인의 양심이면서도 공동체의 양심일 것이다. 그 공동체의 양심이 욕망한다. 모든 것 안에서 온전하게 생활되기를.
기자의 두번째 기도 요청 내용은 속히 히브리서 독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편지를 마무리한다. 투쟁 속에 있는 공동체는, 사실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들을 돌보시는 평화의 님이, 시체들로부터 위대한 목자를 일으키셨고(부활을 말하고 있다), 그 부활의 목자가 양들을 이끄므로, 그 양들은 기워진다. 그 기워짐이란, 모든 좋음 안에서 그이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존재로의 전환이다. 곧 예수와 함께 일으켜짐이다. 일으키시는 님은, 자신 앞에서, 예수를 통해, 기쁨을 행하신다, 우리 안에서. 메시아 예수를 통해 행하신 일으키시는 님의 기쁨이 곧 우리의 기쁨이다. 그 기쁨이 과거의 시대들로부터 미래의 시대들에 이르기까지 뚜렷이 드러났다. 아멘.
그런데 나는 너희들에게 권한다, 형제들이여,
너희들은 이 권면의 말을 붙잡아라,
그리고 이는 짧은 것들을 통해 너희들에게 편지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우리의 이 형제, 디모데가 이미 풀려났음을 깨달으라,
그와 함께 (만일 속히 그가 온다면), 나도 너희들을 볼 것이다.
너희들은 모든 너희들의 이끄는 이들과 모든 거룩한 이들을 문안하라.
이탈이아에서부터 온 이들도 너희들을 문안한다.
너희들 모두들과 함께 그 거저가.
끝난 줄 알았더니, 기자는 한 마디 더 보탠다.
'말을 붙잡아라.' 이는 말된 것의 실천, 곧 재신체화의 요청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듯, '이론을 보는 것'이 아닌, '현상을 잡는 것'에 대한 요청이다. 편지가 짧다는 말은 나에게는 너무 가혹한 말이다. 이게 짧다고?
우리가 아는 사람이 나왔다. 기자는 디모데를 알고 있다! 디모데는 이미 풀려났고, 디모데와 동행하여, 기자는 히브리서 독자들을 만나러 올 것이다. 그리고 지금 기자는 이탈리아에서 온 예수의 사람들과 함께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가족으로서 서로 문안하는,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장면으로 히브리서는 마무리된다.
이 편지를 읽는 모두에게, 메시아 안에서의 문안으로 서로를 연결시키는 그 거저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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