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그림자에 바쳐진 고기에 대해서' 내용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앞에서 포르네이아(음행) 문제들 사이에 소송 문제를 끼어넣었던 것처럼, 새로운 내용을 끼워넣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들은 또 새로운 의미로 합쳐지며, 바울의 뜻을 분명하게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27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했습니까? 여러분이 주 앞에서 내 '일'이 아닙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도가 아닐지라도, 분명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주 안에서 내 사도직을 인증하는 직인입니다.


  1장에서 본 것처럼, 고린도 에클레시아(교회)는 분열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아볼로파, 누군가는 게바파, 누군가는 바울파, 누군가는 메시아파로 나뉘어 서로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포르네이아의 문제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만큼 정체성이 흐려졌고, 서로 깨달았다며 양심이 약한 사람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우상 앞에 강한 척 했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안에 있는 반(反)바울파 사람들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란 메시아 예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 공생애 기간에는 뵌 적이 없고, 부활하신 이후 예수를 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의 일생 내내 논란거리였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로부터 후원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다음의 삼단논법을 가지고 바울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1) 사도는 후원금을 받는다.
2) 바울은 후원금을 받지 않는다.
3)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9장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바울의 응답이자, 자신이 후원금을 받지 않는 진짜 이유를 밝히는 장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사도임을 증명하는 제 1 증거로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언급합니다. "여러분이 주 앞에서 내 일이 아닙니까?" 여기서 '일'은 현대인이 흔히 말하듯 '성가신 업무'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일은 창조적 과업입니다. 마치 농부가 땅에 노동력을 부어 소출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땅에 없던 가치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일'입니다. 즉 바울은 창조적 과업으로서, 고린도 지역에 없었던 에클레시아를 출범시켰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바울의 '일'이며,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존재 자체가 바울이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하여 일하고 있음을 반증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비난하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변호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엑수시아를 갖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도들처럼, 주의 형제들처럼, 게바처럼 그리스도인 아내를 데리고 함께 여행할 엑수시아가 우리에게 없습니까? 혹은 노동에서 벗어날 엑수시아가 바나바와 나에게만 없습니까? 누가 자기 비용을 쓰면서 군대에서 복무하겠습니까? 누가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습니까? 누가 가축을 보살피고 젖을 먹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어제 8장 본문에 등장했던 '엑수시아(εξουσια)'라는 단어를 다시 가져옵니다('권리', '권위'로 번역됩니다). 이 말은 '엑스'와 '우시아'로 이루어져 있는데, '엑스'는 'out of', '우시아'는 '있음(being)'입니다. 거칠게 고쳐보면, '있는 것으로부터' 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우시아'는 어떤 일의 이유가 되고, '엑스(εξ)'는 그 이유에 근거한 행위가 됩니다. 즉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을 '우시아(ουσια)'라 생각하면, 바울이 사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권리행사를 '엑스(εξ)'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이기 때문에, '아내를 데리고 여행'을 다닐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사도이기 때문에 동행자를 데리고 여행을 다닐 수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경비를 에클레시아로부터 조달받으며,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에서 벗어날 권리는 사도됨이라는 우시아를 가진 이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우시아는 물론 바울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 '엑수시아'라는 단어의 구조를 가지고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먼저는 일반적인 사실 속에서 자신이 주장하려는 근거를 찾습니다. "누가 자기 비용을 쓰면서 군 복무하겠습니까?"라는 말은, 여행을 떠나면서 복음을 전하도록 보냄받은 사도직을 수행하는 사람(군 복무자)이라면, 마땅히 자기 비용이 아닌, 에클레시아로부터 후원금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포도원을 만드는 사람은 에클레시아를 만드는 사도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당연히 그 포도원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아야 합니다. 가축을 보살피듯 에클레시아를 보살피는 사도는 마땅히 그 에클레시아로부터 젖을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즉 에클레시아를 위해 싸우고, 경작하고, 돌보는 사도는 후원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람의 예만 들어서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도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까? 모세의 율법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타작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하나님이 소를 염려하셨겠습니까? 이것은 순전히 우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밭을 가는 사람은 결실의 소망을 안고 밭을 갈고, 타작하는 사람은 곡물을 얻을 소망을 안고 타작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 숨에 속한 것을 뿌렸다면, 우리가 살몸에 속한 것을 거둔다고 한들 그것이 대수로운 일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런 엑수시아를 가졌다면, 우리는 더욱 그러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인 차원에서 근거를 찾았던 바울은 이제 율법으로부터 근거를 가져옵니다.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는 것은, 타작이라는 일을 수행하고 있는 소는, 마땅히 자기 먹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사도직에 적용시킵니다. 소처럼 일을 하고 있는 사도에게 후원금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에클레시아를 위해 '숨에 속한 것'을 뿌렸습니다. 즉 복음을 전하고, 말씀대로 사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살몸에 속한 것'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기서 '살몸에 속한 것'이란 후원금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 역시 사도이기 때문에 이런 '엑수시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엑수시아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메시아의 복음에 어떤 걸림돌도 두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사도로 있지만(우시아), 후원금을 받는 권리행사(엑스)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습니다. 그 이유를 복음에 어떠한 걸림돌도 두지 않기 위함이라 밝힙니다. 이 '복음에 어떤 걸림돌도 두지 않으려고'의 의미가 이제 상술됩니다. 

  여러분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성전 음식을 먹고, 또 제단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제단 음식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모릅니까? 마찬가지로 주께서는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계를 이어가도록 규정하셨습니다.

  앞에서 일반적인 사실로부터 근거들을 찾고, 유대 율법에서 근거들을 찾았다면, 이제 메시아 예수의 가르침에서 근거들을 찾습니다. 마태복음 10:10, 누가복음 10:7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들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듣는 사람을 통해 생계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성전 모티브를 가져옵니다. 9장에서 잠깐 나온 성전 제사에서 음식 나누는 이야기가 10장에 가면 주된 내용이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10장에 가서 살펴봅시다.

  그러나 나는 이 가운데 아무것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내게 이렇게 해 달라고 이런 말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누구도 나의 자랑거리를 뺴앗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낭케가 나에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내가 기꺼이 이 일을 한다면, 내게 보상이 따를 것입니다. 내가 마지못해 이 일을 한다면, 이것은 내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내 보상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주었다는 것, 복음을 전하는 데 따르는 내 엑수시아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시아'가 있으면서도, 그 우시아를 '엑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후원금을 내놓으라는 땡깡도 아니라고 말합니다.(그럴바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일단 후원금과 무관한 자신의 '아낭케'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단어는 앞에서 고린도 지역에 있었던 기근과 식량 문제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운명 지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운명론자였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하는 사명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이 아낭케라는 운명의 여신을 가져왔습니다. 자신이 이것을 하지 않으면 자신을 망치게 될 것이라 말할 만큼, 바울에게 이 일은 중요합니다.

  그 일이 바로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기꺼이' 하면 '기쁘게' 할 수 있겠지만, 기꺼이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아낭케를 통해 얻는 보상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을 오해해선 안됩니다. 바울의 보상은 후원금이 아닙니다! 이 문단에서 이제 역설이 꽃 피웁니다. 바울의 보상은 오히려 '후원금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받지 않고 복음을 주는 것이 바울의 보상입니다. 즉 엑수시아에서 엑스를 빼버리는 것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얻는 보상입니다.

  이 모든 것의 이유는 이렇습니다. 나는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나는 유대인을 얻으려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었습니다. 나 자신은 율법 아래 있지 않은데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없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하나님 앞에서 율법 없는 사람이 아니라 메시아의 율법아래 있는데도) 율법 없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 때문에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함께 코이노니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엑수시아를 우시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자신의 보상이라 밝힌 바울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이는 곧 바울의 아낭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여지껏 이렇게 해왔습니다. 즉 엑수시아에서 엑스를 뺴버리고 우시아를 남기는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에서 바울은 자신이 자유민이라 밝혔습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A.D.1. 당시 엄격한 노예제도 아래서, 자유민이 아니고서는 자유로운 여행이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자유민에게는 각종 제도들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자유민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유민으로서 어떠한 권리행사를 주장하지도 않은 채.

  그 결과 만들어진 삶의 방식은 '타인의 처지가 되어주는 삶'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그들의 회당 제도 아래서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율법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앞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데 있어서 아직 옳고 그름의 기준이 불분명한 약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약한 사람들처럼 되어 주었습니다.(그래서 이들을 위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렇듯 '모든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었던 이유는 하나 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통해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를 그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는 목적은 더 큰 목적 아래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목적이란 바로 '복음에 함께 코이노니아' 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은 새 왕이 등극했다고, 그 왕이 다스리는 지역 곳곳에 선포하는 새 왕위 등극에 대한 소식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승천 소식입니다.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부활하여, 온 우주의 왕으로 천명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과 함께 주고 받기 위해 저 위의 삶의 방식을 기꺼이 기쁘게 선택했고, 그 보상으로 얻은 것은 후원금을 받는 어려움 속에서도 이 길을 헤쳐나가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꼭 첨언하고 싶은 것은 '메시아의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율법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메시아를 통해 새로워졌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로마서 연구 2.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짧게 말하자면, 율법은 하나의 이야기였고, 율법을 이룸은 율법에서 추출한 행위 목록을 다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새로운 존재는 성령없이는 불가능했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걸어다니는 율법, 율법의 완성이 됩니다.

  사람들이 육상 경기장에서 경주할 때 모든 사람이 달려도 한 사람만 상을 받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상을 받도록 달리십시오. 운동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면에서 절제합니다. 그들은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하지만, 우리는 없어지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목표 없이 달리지 않습니다! 나는 허공을 치는 사람처럼 권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한 뒤에 나 자신이 실격당하지 않도록, 나는 내 몸을 거칠게 다루고 노예 삼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그림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이 바울이 가져오는 그림을, 우리는 실제로 종이를 접어서 그려본 적이 있습니다. 뮈스테리온의 출발점을 지난 사람은 뒤 돌아보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는 마라토너입니다. 이 달리기를 위해 모든 것을 절제하며 오직 하나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고자 합니다. 그의 결승지점은 최후의 심판대요, 그 심판대에서 그가 얻는 것은 하나님의 질책이 아니라, 썩지 않는 월계관, 부활입니다. 이것이 그의 목표입니다. 바울은 이 마라토너의 목표에 대해서 15장에서 자세히 써나갈 것입니다.

  이 결승지점에서의 썩지 않을 원계관을 위해 그는 군 복무 하듯 살고 있습니다. 그의 주적은 어둠의 권세입니다. 현시대의 사람들은(그리고 고린도의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그가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허공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주먹을 제대로 휘두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종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메시아께서 사탄을 박살내신 펀치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 바울은 날마다 최선을 다합니다.(다른 편지에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말을 한 뒤, 말을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 몸을 낀 자리로 밀어 넣습니다. 후원금을 받지 않으니 사도가 아니라고요? 그는 상대방의 처지에 맞게 움직일 줄 아는 유능한 왕의 사절단입니다. 에클레시아를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다루는 목동입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지기가 포도원으로부터 열매 얻기를 거절했다면, 그것은 그의 사도됨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에클레시아가 분명 에클레시아답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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