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나를 본받는 자들이 되세요, 내가 메시아를 본받듯이.
이 구절을 10장을 정리하는 문장으로 붙일 것인지, 아니면 11장을 시작하는 문장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저 "본받음"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10장에서 바울은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를 온 몸으로 겪어나가는 에클레시아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우상숭배의 현장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1장에서는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미간을 찌뿌릴만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11장을 앞에서 차별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한 바울의 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 '본받음의 11:1'을 10장 뒷 쪽에 붙이려는 시도도 마찬가지의 의도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있고, 양 쪽 다 개연성이 있습니다. 저는 앞쪽에 붙여도 좋고, 뒷쪽에 붙여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10장도 바울이 썼다고 생각하고, 11장도 바울이 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0장과 11장이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바울의 인격은 10장이나 11장이나 동일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린도전서 11장을 여성 차별의 본문으로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4.1
케네스. E. 베일리는 11:1을 셋째 논문에 붙이고 있다. 그리고 11:2에서부터 '에클레시아의 남녀관계'를 다루는 넷째 논문이 시작된다. 넷째 논문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4.1 예배를 인도하는 남녀 : 예언하는 자와 그들의 단정한 복장(11:2~16)
4.2 예배의 질서 : 성례 - 주의 만찬(11:17~34)
4.3 은사와 몸의 본질(12:1~30)
4.4 사랑의 찬가(12:31~14:1)
4.5 신령한 은사와 메시아의 몸을 높이 세움(14:1~25)
4.6 예배의 질서 : 말씀-예언하는 자와 방언하는 자(14:26~33a)
4.7 예배를 드리는 남녀 : 교회에서 잠잠함(14:33b~40)
여러분이 내가 메시아를 기억하듯, 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들을 여러분이 기억하고 있고, 심지어 '이어져 내려온 것들'을 확실히 지키고 있으니, 나는 여러분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것을 모르길 원치 않는데, 모든 남자의 머리는 메시아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메시아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남자는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여자는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여자가 머리를 민 것이나 같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으려면, 머리를 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면, 머리를 가리십시오.
바울은 '이어져 내려온 것들'을 말합니다. 시간을 따라서 옛부터 전해져 오던 삶의 방식들이 있습니다. 쉽지 않은 상황에 직면한 이들이 옳게 살기 위해 고민했었고, 그 고민의 흔적이 '전통'이 되어 시간을 따라 전수되어 내려옵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에클레시아에게 어떠한 삶의 원칙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이었던 그는 예수로 인해 새롭게 된 세계관의 전모를 밝혔을 것이고,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신만의 희귀한 생각이 아니라, 옛부터 유대인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삶의 방식이었음을 가르쳤을 것입니다.(즉 기독교인의 삶은 '새롭게 된 유대인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11장에서 두 가지 '이어져 내려온 것들'을 말합니다. 그 둘 중에 처음 것이 논란의 대상입니다.
후대에 넘겨줄만한 새로운 전통의 조직이 에클레시아의 당면 과제였을 것이다.
"모든 남자의 머리는 메시아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메시아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 구절입니다. 마치 남자가 여자 위에서 지배하는듯한 그림이 그려집니다. 한 술 더떠서 바울은 '하나님 - 메시아 - 남자 - 여자'의 순서로 기술합니다. 여자는 가장 마지막에 위치합니다. 지배관계로 본다면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이 구절은 성경을 남성 우월주의로 점철된 책으로 보는 이들이 근거로 흔히 가져오는 구절입니다.
이때 '머리(κεφαλή)'를 구성적 예외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특이점으로 읽을 것인가의 문제는 히브리서와 마찬가지다. '머리'는 상위 권력을 표상하는가? 아니면 내 안에 있는 나에게 속하지 않은 무엇이라, 머리와 몸은 서로 내속적 관련을 갖는가? 들뢰즈는 specific/general(종적 특수성/유적 일반성)의 구분을 넘어서 singularity/universal(독특성/보편성)을 읽자고 말한다.
그러나 일단 성경은 남녀의 탄생부터 남녀를 동등한 존재로 그립니다. 오히려 남성을 '돕는' 이로 표현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위에 있으면 위에 있지 결코 남자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남녀는 서로 보완적 존재로 드러나지, 결코 어느 한 쪽의 군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첫 증인은 여자고, 여자들은 새롭게 출범한 에클레시아 공동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고린도전서는 여러 은사에 있어서, 특정 사람을 배제한 일이 없습니다. 기도도 예언도, 남녀는 동등한 자격을 자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말 또한, 우리는 일관성 있게 읽어야 합니다. 갑작스럽게 이 구절에서만 바울이 남성의 손을 들어준다면, 우리는 바울을 다중인격자로 보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남자는 머리를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이콘, 뚜렷함입니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의 뚜렷함입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로부터 있지 않고, 오히려 여자가 남자로부터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자가 여자를 통해(때문에) 있지 않고, 여자가 남자를 통해(때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통해 머리 위에 엑수시아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남자와 별개로 여자가 있지 않고, 여자와 별개로 남자가 있지 않습니다. 즉 여자가 남자로부터 있듯이, 이제 남자가 여자를 통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몬문을 읽을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머리'의 의미입니다. 앞에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했을 때, 우리가 속한 문화에서 "머리"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용례를 성경에 그대로 대입해선 곤란합니다. 우리는 꼬리보단 머리고, 일단 맨 위에 있는 머리를 더 좋은 것으로, 우월한 것으로, 지배자로 읽기 쉽겠지만, 이 본문에서는 아닙니다. '머리'라는 어휘를 통해 연결되는 '하나님 - 메시아 - 남자 - 여자'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의 우월이나 지배를 인정하려는 의도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직접 말합니다. 이 '머리'라는 표현 '뚜렷함'과 상관이 있습니다. 즉 "남자의 머리는 하나님"이란 표현은, 남자가 하나님을 뚜렷하게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뚜렷하게 드러내겠습니까? 하나님은 남자의 머리가 되고, 남자는 하나님의 몸이 됩니다. 남자는 성실하게 몸을 놀려, 자신의 머리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즉 여기서의 '머리'는 몸과의 상호관계를 보여주려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뚜렷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여자가 남자의 뚜렷함을 위해 희생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림이 아닌 글자가 보여주는 한계입니다. 남자나 여자 둘 중에 하나를 먼저 쓸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혹시나 '남자>여자' 로 오해할까봐 그런 의도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의 뚜렷함입니다." 앞에서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말했던 바울은, 이번에는 아내가 남편의 뚜렷함이라는 말로 그 관계를 역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를 창세기에서 가져옵니다. 최초의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로부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남자는 출산의 과정을 통해서 여자로부터 납니다. 그러니 남녀는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합니다.
바울이 설마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시대착오적으로 읽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쟁점이 오늘날처럼 남녀평등일 것이라 착각하는데서 오해가 벌어집니다. 당시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문제는 오히려, 남녀의 구분을 철폐하려는 특정 여성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는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남자는 쓰지 말아야 한다'는 전통을, 지배와 피지배 구조로 읽는 것은 바울을 잘못 본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여자가 머리에 무언가 써야 한다면, 남자에게도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같은 무게의 의무가 주어진다고 봐야 합니다. 즉 여자는 써야 하고, 남자는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을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은 여성으로서, 남성은 남성으로서 구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관통하는 문제는, '영적인 것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이것을 단단히 오해했습니다. 자신들이 구원을 받아 새로운 실존에 들어갔다고 이해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실존이란, 방언 하나에 집중하면서 마치 천사처럼 되어 남녀 구분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움껏 우상 숭배가 벌어지는 신전을 들락날락거렸고, 영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별이 생겼으며, 방언에만 몰두하는 비정상적인 영성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2000년전 고린도 에클레시아에 소속된 특정 여성들은 머리에 쓴 것을 벗어던지고, 더욱 천사처럼 되기 위해 방언에 몰두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남녀의 구별을 없애선 안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지금 '여자'라고 말하지만, 이 편지를 받아든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그 여자들의 이름을 줄줄이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 편지의 내용을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에게 적용된다고 봐서도 안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자가 머리에 무언가를 쓰는 규정'은 남녀의 차별이 아니라 구별을 위함입니다. 바울은 남녀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남자를 남자로, 여자를 여자로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은 상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해서, 여자의 머리를 대체한다는 생각은 우습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머리와 몸으로 구성된 온전한 인간성을 이뤄가야할 동반자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이 구별을 철폐하고선,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구별과 무관한 인간성을 구현하려는 노력입니다. 세포분열은 더 온전한 하나를 이루기 위합니다. 그러나 지금 고린도 에클레시아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상호 보완의 남녀 구별을 철폐하려는 특정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세포분열을 거부한채 단세포에 머물러 있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여성들에게 옛부터 내려오던, 남녀 구별의 전통을 바울이 가르칩니다. 남녀를 차별하기 위함이겠습니까? 바울을 여성 인권을 짓밟는 '마초'로 읽고자 하는 시도는 그 근거가 불충분합니다. 오히려 근거로 들 수 있는 이 본문 하나 뿐인데, 오히려 바울의 다른 서신들을 기초로 이 본문을 남녀의 구분되면서도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고자 했다고 읽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심판하십시오.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은 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정말 적절한 일입니까? 자연 자체가 여러분에게, 남자가 머리가 길면 그에게 수치이지만, 여자가 머리가 길면 그에게 뚜렷함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머리는 여자에게 가리는 것 대신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논쟁하려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그런 풍습은 우리에게도 없고,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도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심판하십시오" 이 말은 포르네이아 문제에 관련해서 앞에서도 등장했던 권고입니다. 에클레시아가 건강한 몸을 이루기 위해 바르게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시간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어지는 구절을 이렇게 읽고자 합니다. "여자가 남자와 아무 구분도 없다고 여기며, 방언으로만 기도하는 것이 정말 적절한 일입니까?"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여성들은 방언이라는 은사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 자신들이 성별의 구별이 없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겠다고 단단히 오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추구는 당연히 남녀의 구별을 자연스럽고, 지켜가야할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특정 헤어 스타일을 강요라는 권력에 대한 본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뚜렷하게 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남녀의 구별을 지켜야 한다는 권고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방언이라는 은사만 추구했던 것이 에클레시아 안에서 두 종류의 역기능을 가져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먼저는 자칭 영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차별을, 2) 그리고 남녀간의 구분철폐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두번째 전통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전할 말은 칭찬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 여러분은 더 좋게 되지는 못할망정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에클레시아로 함께 모일 때,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립니다. 나는 어느 정도 그 말을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 파당이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승인된 이들이 '드러날' 목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한자리에 함께 모일 때 먹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기 먹을 음식을 가져오는데, 한 사람은 배가 고프고, 다른 사람은 술에 취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를 가벼이 여기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하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성찬입니다. 헤어 스타일에 대해서 말하는가 싶더니, 이어서는 성찬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지는 맥락을 이제 납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남성의 우월성이 아니라, 에클레시아의 하나됨을 줄곧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하나됨'이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경계마저도 없애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분(分)이라도, '구분'과 '분열'은 다릅니다. 그런데 고린도 에클레시아에는 '잘못된 승인'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고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공동체 전체에 드러냅니다. 성(性)에 대한 구분 철폐,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분열.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벌이는 성찬은, 성찬이 아니게 됩니다. 분열하는 공동체의 성찬은, 그 성찬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주로부터 받아 여러분에게 전해준 것인데, 즉 주 예수께서 배신당하신 그 밤에, 그이는 빵을 드셨고, 잘 감사 드리신 뒤, 빵을 떼시며 말씀하시길, "이것은 나의 몸이요, 너희를 위한 것이다. 이것을 행하라, 다시 기억하기 위해." 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저녁식사 후에 잔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된 새 언약이다. 이것을 행하라, 이 잔을 마실 때면 언제나, 나를 다시 기억하기 위해." 라고 하셨습니다. 이 빵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여러분은 그이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이가 오실 때까지.
바울은 '이어져 내려온 것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성찬은 아주 오래된 전통입니다. 예수님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성찬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마지막 밤에, 이스라엘이 먹었던 유월절 식사는, 어린양 메시아 예수의 살점을 먹는 것으로 그 의미가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에클레시아에 속한 모든 사람은 예수를 먹고 출애굽했습니다. 기이하게도 바로 이것만이 예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먹음은 기억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를 먹은 이들은, 이 먹음을 통해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자신들이 이루게 된 메시아의 하나된 몸을 말입니다.
성찬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된 몸 이뤘음을 기억하는 그들은, 새언약의 수혜자들입니다. 새 언약이란, '새(롭게 이뤄진 아브라함) 언약'인데, 즉 에클레시아가 1) 현시대를 떠나 오는시대로 향하는, 2) 아브라함의 셀 수 없는 후손들이며, 3) 그들을 통해 '온전한 구별'과 '차별없음'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이가 오실 때까지 그이의 죽음, 곧 어린양 죽음으로 이뤄진 출애굽과, 그 출애굽을 통해 이뤄진 아브라함 언약을 선언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에클레시아가 에클레시아로서 존재하기 위함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이 땅에 없던 새로운 돌들입니다.
그러니 합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빵을 먹고 주의 잔을 마시는 누구든지, 주의 몸과 피에 대한 피고인이 될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면밀히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빵으로부터 먹고, 잔으로부터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몸을 판단하지 못하고서 먹고 마시면, 여러분은 자신에게 임할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약하고 병들고, 몇 사람은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심판한다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에 의해 심판받는 우리가 훈육도 받는 것은, 우리가 현시대와 함께 유죄판결을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 에클레시아에서는, '영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공동체가 온갖 분열에 빠졌습니다. 그럼에도 성찬은 꼬박꼬박 잘 지키고 있는데, 분열을 해결할 생각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 무섭게 질책합니다. 분열을 그대로 두고 행하는 성찬은 곧 메시아의 몸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서 자신들에 대해서 면밀히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들을 심판해야 합니다. 이것은 에클레시아에게 주어진 권한입니다. 그들은 최후의 심판에서 메시아 예수의 심판을 받기 전에, 스스로를 심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먼저 심판한 사람은, 최후의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은 현시대와 더불어 심판을 받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내 가족 여러분, 서로 먹기 위해 함께 모인 이들은, 서로를 대접하십시오. 만일 누군가 배가 고프다면, 집에서 먹으십시오. 심판 받으려고 여러분이 함께 모인 것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나머지 문제들은 내가 갔을 때, 제자리로 바로잡겠습니다.
그러니 이 분열을 해결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서로를 대접해야 합니다. 굶주림 때문에 성찬의 자리에서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메시아의 몸에 죄 짓기 위해 성찬을 한 꼴이 될 것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스스로를 심판하고, 모든 것을 제 안에서 '제자리'로 바로 잡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기 때문에, 에클레시아 밖의 옳고 그름의 양자택일과는 무관합니다. 스스로 죽고,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제 3의 길을 걷습니다. 그 길을 따라 가면, 하나님께서 나누신 다양성을 지켜가면서도, 하나됨을 이루는 기이한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제자리, 만물의 본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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