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5장에서 에클레시아를 병들게 만든 심각한 질병, 포르네이아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 에클레시아 식구끼리 법정을 찾아가는 문제를 연결지으며, 메시아의 사람들과 판단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포르네이아의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면, 이는 자신들이 현시대를 판단해야 할 사람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요, 이것이 불거지는 부분은 법정 소송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결국 메시아의 사람들이 현시대를 판단하게 될 것이므로, 지금 그 관계망 안에서 현시대를 질식시켜 나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7장으로 넘어가 이 일은 '결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삶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고린도전서 7:17~40
우리는 누구나 주님이 경계 지어주신대로, 하나님이 부르신 자신의 삶을 꾸려가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모든 에클레시아에게 단호히 말한 바 입니다. 이미 할례받은 이가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그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 마세요. 할례받지 않은 이가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할례 받지 마세요. 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할례를 받지 않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경계 지어주신 대로", "부르신 자신의 삶",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모두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경계지어주신 것은 '거룩'의 개념과 연결되고, 이는 에클레시아안에서 에클레시아답게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금 부르심을 통해서 에클레시아의 정체성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는, 에클레시아는 현시대가 규정한 정체성을 뛰어 넘는 일입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실함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만 중요합니다. 즉 현시대를 초월하는 정체성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해 첨언하고자 합니다. '오직 믿음'이라 할 때, 이 믿음은 계명을 지키는 것과 무관한 은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은 신실함이라 고칠 수 있고, 신실함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 대항했던 종교개혁에 대한 오해가, 어떠한 행위나 공로를 배격함과 동시에 계명을 지키는 것 또한 배격하는 이단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날 구원파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앎과 삶이 하나의 사건에 대한 두 가지 양태임을 생각하면 문제의 해결은 분명합니다. 좋은 줄 알았으나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게 좋은줄 정말로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시금 부르심을 통해서 에클레시아의 정체성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는, 에클레시아는 현시대가 규정한 정체성을 뛰어 넘는 일입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실함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만 중요합니다. 즉 현시대를 초월하는 정체성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해 첨언하고자 합니다. '오직 믿음'이라 할 때, 이 믿음은 계명을 지키는 것과 무관한 은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은 신실함이라 고칠 수 있고, 신실함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 대항했던 종교개혁에 대한 오해가, 어떠한 행위나 공로를 배격함과 동시에 계명을 지키는 것 또한 배격하는 이단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날 구원파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앎과 삶이 하나의 사건에 대한 두 가지 양태임을 생각하면 문제의 해결은 분명합니다. 좋은 줄 알았으나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게 좋은줄 정말로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각각은 자신이 부르심받았던 그 부르심 안에 머무르십시오. 당신이 노예일적에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유인이 될 수 있으면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주 안에서 노예로 부르심받은 사람은 주께 속한 자유인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인일적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메시아의 것입니다. (당신들을 위해) 비싼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부르심 받은 각각은 그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머무르십시오.
"부르심을 받은 각각은 그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머무르십시오"
아닌 것 '처럼' 살으라는 요청은, 부르심을 받은 기표의 자리에 머물면서도 하나님과 함께 넘쳐있는 삶을 가리킨다.
그러나 만일 '초월'만 말한다면, 비물질적 지혜를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 초월은 절대 이 땅을 떠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속한 삶의 영역을 벗어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각각은 자신이 부르심받았던 그 부르심 안에 머무르십시오." 노예라면 노예 그대로, 자유인이라면 자유인 그대로,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내재'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에클레시아의 정체성은 초월이자 내재입니다. 현시대가 이 사람을 규정할 수는 없으나, 이 사람은 현시대 안에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이 노예제도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이 역시 역사적 상황을 무시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노예가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되었다고 해서, 주인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된 노예는, 주인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층구조를 무너뜨리기 위한 혁명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섬김을 통해 주인을 깨닫게 하는 것이 에클레시아가 된 그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하관계를 형성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이지 노예제를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노예들에게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붙잡으라 말합니다. 만일 바울이 노예제를 긍정했다면, 18세기 노예무역을 종결시킨 윌리엄 윌버포스가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물론 무수한 기독교인들이 노아 이야기를 곡해하여 흑인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했지만 말입니다)
초월과 내재입니다. 나는 현시대를 초월했으나, 현시대 안에 있습니다. 그 자리가 내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이 초월은 남 위에 군림하는 초월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초월하여 더욱 지혜롭게 섬기기 위한 초월입니다. 더욱더 이 땅에서 온전하기 위한 초월입니다. 이 초월과 내재의 삶이 바울이 말하는 신실함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속한 자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땅 끝"이요, 이 자리가 내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초월과 내재가 이루어지는(따라서 성전입니다.), 우리의 신발을 벗어야 할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속한 상황과 환경을 벗어나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거짓입니다. 이 거짓말이 점점 커지다보면, '이 땅을 벗어나면 뭔가 달라지겠지'라는 그릇된 내세론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자기가 속한 '관계망'을 신중히 들여다 봅시다.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관계를 떠나는 것으로는 결코 초월과 내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 관계망은 결코 '더 좋은 나'가 되기 위한 통과점일리 없습니다. 내가 선 모든 땅 끝은, 모든 관계망은 성전이 세워져야 하는 하늘과 땅의 중심입니다.
이러한 삶은 뮈스테리온을 지난 삶입니다. 광야같은 현실 속에서 열매를 맺어보겠다는 삶이니,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창조하는 부활의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알고 살기 위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뮈스테리온의 입구에서 아주 비싼 값이 치뤄졌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으심. 그래서 우리가 주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이 한 쪽 사람만 신실한 경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각자 경계 지어주신 대로 살라는 말은 다시 이해하면, 부부 중 한 쪽이 신실하지 않다고 해서, 이것을 이혼으로 해결하지 말라는 것으로 풀 수 있습니다. 그 자리가 부르심의 자리이니, 그 자리에서부터 자신을 초월하고, 더욱 상황을 해결하는 지혜와 섬김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상대방을 거룩하게 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 본문에서 바울이 노예제도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이 역시 역사적 상황을 무시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노예가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되었다고 해서, 주인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된 노예는, 주인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층구조를 무너뜨리기 위한 혁명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섬김을 통해 주인을 깨닫게 하는 것이 에클레시아가 된 그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하관계를 형성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이지 노예제를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노예들에게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붙잡으라 말합니다. 만일 바울이 노예제를 긍정했다면, 18세기 노예무역을 종결시킨 윌리엄 윌버포스가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물론 무수한 기독교인들이 노아 이야기를 곡해하여 흑인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했지만 말입니다)
초월과 내재입니다. 나는 현시대를 초월했으나, 현시대 안에 있습니다. 그 자리가 내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이 초월은 남 위에 군림하는 초월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초월하여 더욱 지혜롭게 섬기기 위한 초월입니다. 더욱더 이 땅에서 온전하기 위한 초월입니다. 이 초월과 내재의 삶이 바울이 말하는 신실함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속한 자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땅 끝"이요, 이 자리가 내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초월과 내재가 이루어지는(따라서 성전입니다.), 우리의 신발을 벗어야 할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속한 상황과 환경을 벗어나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거짓입니다. 이 거짓말이 점점 커지다보면, '이 땅을 벗어나면 뭔가 달라지겠지'라는 그릇된 내세론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자기가 속한 '관계망'을 신중히 들여다 봅시다.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관계를 떠나는 것으로는 결코 초월과 내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 관계망은 결코 '더 좋은 나'가 되기 위한 통과점일리 없습니다. 내가 선 모든 땅 끝은, 모든 관계망은 성전이 세워져야 하는 하늘과 땅의 중심입니다.
이러한 삶은 뮈스테리온을 지난 삶입니다. 광야같은 현실 속에서 열매를 맺어보겠다는 삶이니,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창조하는 부활의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알고 살기 위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뮈스테리온의 입구에서 아주 비싼 값이 치뤄졌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으심. 그래서 우리가 주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이 한 쪽 사람만 신실한 경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각자 경계 지어주신 대로 살라는 말은 다시 이해하면, 부부 중 한 쪽이 신실하지 않다고 해서, 이것을 이혼으로 해결하지 말라는 것으로 풀 수 있습니다. 그 자리가 부르심의 자리이니, 그 자리에서부터 자신을 초월하고, 더욱 상황을 해결하는 지혜와 섬김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상대방을 거룩하게 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제 처녀 총각들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주의 명령은 없지만, 깨달은 바를 전달하겠습니다, 주에 의해 자비를 입어 신실해진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나는 지금 놓인 아낭케의 기간 동안 이 아래서 버티는 것이 온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있는 것이 사람에게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아내에게 묶여 있습니까? '풂'을 찾지 마세요. 아내로부터 풀렸습니까? 다른 아내를 찾지 마세요.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결혼을 한다면 언제든지 그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일 처녀가 결혼을 한다면 언제든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은 살몸에 죄임이 있을 것이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길 바랍니다.
포르네이아와 판단, 성과 결혼의 문제가 계속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처녀 총각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주께 받은 명령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사람'으로서 그가 깨달은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쩌면 바울이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정당성을 분명히 하고자, 앞에서 신실함(계명 지킴, 초월과 내재가 조화된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의 깨달음은 결코 현실도피적이지 않습니다. "지금 놓인 아낭케"라는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극심한 기근과 식량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낭케'는 운명의 여신으로서, 시지프스에게 돌을 산꼭대기에 올려놓는 비참한 운명을 선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아낭케'가 고린도 지역에 비참한 상황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낭케'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하나님 한 분을 섬기는 바울이, 다른 신들을 인정했을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당시 쓰던 표현들을 쓰는데 거침이 없습니다. 분명한 의미 전달을 위해서 바울은 깊은 연구를 통해 말을 가지고 놉니다. 어찌 되었든, 구체적인 정황 아래서 바울은 자신의 신실한 삶의 걸음을 통해 깨달은 바를 에클레시아 안에 있는 처녀 총각들에게 전합니다. 버티라고. 무엇을? 이 극심한 식량 문제 속에서 결혼을 말입니다.
바울의 깨달음은 결코 현실도피적이지 않습니다. "지금 놓인 아낭케"라는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극심한 기근과 식량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낭케'는 운명의 여신으로서, 시지프스에게 돌을 산꼭대기에 올려놓는 비참한 운명을 선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아낭케'가 고린도 지역에 비참한 상황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낭케'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하나님 한 분을 섬기는 바울이, 다른 신들을 인정했을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당시 쓰던 표현들을 쓰는데 거침이 없습니다. 분명한 의미 전달을 위해서 바울은 깊은 연구를 통해 말을 가지고 놉니다. 어찌 되었든, 구체적인 정황 아래서 바울은 자신의 신실한 삶의 걸음을 통해 깨달은 바를 에클레시아 안에 있는 처녀 총각들에게 전합니다. 버티라고. 무엇을? 이 극심한 식량 문제 속에서 결혼을 말입니다.
기혼자는 이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이혼한 사람은 다른 아내를 찾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할 수 있는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분명 이 아낭케 아래서 사서 고생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미 이혼한 사람은 다른 아내를 찾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할 수 있는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분명 이 아낭케 아래서 사서 고생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먹을 것 없는 시기 속에서, 결혼 제도가 악용되었을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부양가족을 버리려고 하고, 누군가는 결혼으로 엮인 관계망을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하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잘못되었습니다. 배고파서 결혼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바울의 답변은 독신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면하길 바랍니다." 다들 먹는 문제로 힘겨워하고 있을 때, 결혼을 통해 더 큰 어려움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에클레시아를 섬기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요구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렸겠습니까?
바울의 답변은 독신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면하길 바랍니다." 다들 먹는 문제로 힘겨워하고 있을 때, 결혼을 통해 더 큰 어려움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에클레시아를 섬기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요구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렸겠습니까?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내 말은 이것입니다. 현재 상황은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내가 있는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살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것처럼 살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것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살고, 현시대에 쓸 것이 있는 사람은 현시대에 쓸 것이 없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왜냐하면 현시대의 스케마가 (과거의 유물로)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아낭케의 상황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 견디기 위해서 바울은 평상시처럼 살아서는 안된다고 권면합니다. 아내가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 가정을 넘어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슬픈 사람도 슬픔을 딛고 서로의 어려움을 돌봐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기쁜 사람은 그 기쁨을 잠시 숨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시장을 이용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도, 지금은 더욱 아껴서 다른 곳에 써야 합니다. 현시대 속에서 무언가 하고자 했던 사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이 아낭케의 상황은 극심한 식량문제의 기간을 가리킴과 동시에, '현시대' 자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오는 시대의 사람들은, 보통 사람(퓨시코스)처럼 살아선 안됩니다. 왜냐하면 현시대의 껍데기가 과거의 유물이 되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현시대의 껍데기가 끝나는 날이, 주의 날입니다. 그 알맹이 없는 시절이 이제 끝장날 것입니다. 그 날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알맹이 없는 시간에 자신을 맡겨선 아니됩니다. 시간이 그저 흘러가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이 우주에는 두 개의 시간이 함께 흐르고 있고, 이 시간들은 서로 겹쳐 있습니다. 현시대와 오는시대. 이 시간 속에서 진리가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엿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멈춤과 움직임', '형상과 질료', '은총과 자연', '자유와 억압', 이렇게 둘로 나누어 세상을 이해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도식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을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관점이 아님이 드러났고, 지금도 그 관점들의 흥망성쇠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나뉜 것도 아니고, 개념이 나뉜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나뉘었으나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그리고 우리는 이 옛 가능성과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 끼어 선택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참 사람이라면, 우리는 제대로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라는 말은 껍데기(스케마)를 고르지 말자는 말입니다. 껍데기인줄 알아도 껍데기를 고르기만 한다면, 그는 오는시대를 모릅니다. 껍데기인줄도 모르고, 껍데기를 고집하는 사람을 성경은 '육체'라 부릅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이 아낭케의 상황은 극심한 식량문제의 기간을 가리킴과 동시에, '현시대' 자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오는 시대의 사람들은, 보통 사람(퓨시코스)처럼 살아선 안됩니다. 왜냐하면 현시대의 껍데기가 과거의 유물이 되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현시대의 껍데기가 끝나는 날이, 주의 날입니다. 그 알맹이 없는 시절이 이제 끝장날 것입니다. 그 날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알맹이 없는 시간에 자신을 맡겨선 아니됩니다. 시간이 그저 흘러가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이 우주에는 두 개의 시간이 함께 흐르고 있고, 이 시간들은 서로 겹쳐 있습니다. 현시대와 오는시대. 이 시간 속에서 진리가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엿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멈춤과 움직임', '형상과 질료', '은총과 자연', '자유와 억압', 이렇게 둘로 나누어 세상을 이해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도식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을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관점이 아님이 드러났고, 지금도 그 관점들의 흥망성쇠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나뉜 것도 아니고, 개념이 나뉜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나뉘었으나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그리고 우리는 이 옛 가능성과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 끼어 선택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참 사람이라면, 우리는 제대로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라는 말은 껍데기(스케마)를 고르지 말자는 말입니다. 껍데기인줄 알아도 껍데기를 고르기만 한다면, 그는 오는시대를 모릅니다. 껍데기인줄도 모르고, 껍데기를 고집하는 사람을 성경은 '육체'라 부릅니다.
나는 여러분이 염려에서 놓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게 해드릴지, 주의 일을 염려합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지, 즉 현시대의 일을 염려합니다. 그는 두 방향으로 끌립니다. 마찬가지로 결혼하지 않은 여자나 처녀도 어떻게 하면 몸과 숨을 모두 거룩하게 할지, 주님의 일을 염려합니다. 그러나 결혼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지, 즉 현시대의 일을 염려합니다.
이런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독신은 현시대의 껍데기를 거절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식량문제로 힘든 상황 속에서는 그릇된 선택, 속이 빈 선택을 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신입니다. 결혼만 안하면 독신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독신은, 아내를 기쁘게 할 상황을 만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입니다.
끼인 시간 속 올바른 선택을 하며 사는 삶은 곧, '누구를 기쁘게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곧 삶의 텔로스입니다. 당신은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갑니까?
끼인 시간 속 올바른 선택을 하며 사는 삶은 곧, '누구를 기쁘게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곧 삶의 텔로스입니다. 당신은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갑니까?
이는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제약을 두려는 게 아닙니다. 내 목적은, 여러분이 합당하게 행동하고 한결같이 주께 몸 드리는 것을 그 무엇도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단어들이 두 가지 의미로 갈라진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으십니까? '잘'이라는 부사를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초월한 '잘'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위에 '유익'도 마찬가지입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그 저녁식사 자리에 모인 이들은 저 유익이라는 말을 어찌 이해할지에 대해서 논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유익하다'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유익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유익은 어떤 의미입니까?
오늘날 '잘', '행복', '유익'의 척도는 개인이 자신의 몸을 어찌 만족시키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잘 먹어야 하고, 잘 입어야 하며, 잘 느껴야 합니다. 코카콜라 광고처럼 taste the feeling입니다. 느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참 유익은, 그러니까 속이 비지 않은 꽉찬 유익은, 반드시 이뤄질 영원한 유익은 느낌을 넘어섭니다. 합당한 행동은 느낌이 어떻든지 행해야 합니다. 주께 몸드림이 느낌이 좋으면 좋겠지만, 사실 포르네이아는 '느낌 좋음'이 나의 하나님이 된 경우입니다. 주께 몸드림은 나의 느낌보다 더 중요합니다. 내가 어떻게 느끼든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느끼든 나의 행동은 한결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한결같은 속에서 느끼는 모든 것은 제 의미가 있습니다.
'한결같은 몸드림'이 곧 헌신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이것을 아무 것도 방해하지 못하게 하도록 바울은 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독신을 주장하는 바울의 이면에 이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 중에 하나라고 말하는 결혼 조차도, 주께 한결같이 몸 드리는 일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잘', '행복', '유익'의 척도는 개인이 자신의 몸을 어찌 만족시키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잘 먹어야 하고, 잘 입어야 하며, 잘 느껴야 합니다. 코카콜라 광고처럼 taste the feeling입니다. 느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참 유익은, 그러니까 속이 비지 않은 꽉찬 유익은, 반드시 이뤄질 영원한 유익은 느낌을 넘어섭니다. 합당한 행동은 느낌이 어떻든지 행해야 합니다. 주께 몸드림이 느낌이 좋으면 좋겠지만, 사실 포르네이아는 '느낌 좋음'이 나의 하나님이 된 경우입니다. 주께 몸드림은 나의 느낌보다 더 중요합니다. 내가 어떻게 느끼든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느끼든 나의 행동은 한결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한결같은 속에서 느끼는 모든 것은 제 의미가 있습니다.
'한결같은 몸드림'이 곧 헌신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이것을 아무 것도 방해하지 못하게 하도록 바울은 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독신을 주장하는 바울의 이면에 이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 중에 하나라고 말하는 결혼 조차도, 주께 한결같이 몸 드리는 일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약혼녀에게 부적절하게 처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즉 그 상황이 너무 힘들고,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면 그렇게 하도록 두십시오.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결혼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남자가 마음을 굳게 먹고, 부득이한 형편도 아니고, 자기 의지를 통제하고 있어서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마음을 정했다면, 온전합니다. 그러므로 약혼녀와 결혼한 사람은 온전한 것이고,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바울은 주께 한결같이 몸드림의 예를 듭니다. 자기 약혼녀가 있습니다. 약혼은 했으나 결혼은 하지 않았으므로 성관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자의 성욕이 이것을 견딜 수 없어 힘들어 합니다. 그럼 결혼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 죄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온전한 것은, 마음을 굳게 먹고, 자기 의지를 통제하고서, 약혼녀와 성관계를 갖지 않는 일입니다. 앞에서 말한 사탄에게 협조하는 나약한 의지와는 달리 말입니다. 이것을 추구하자는 말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살몸을 이겨내자는 말입니다.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혼 생활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는데,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대로 지내는 것이 더 복됩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받은 사람이라 여기는 내 깨달음에 말입니다.
그러한 원칙을 적용하면, 이혼과 재혼도 다음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이 살아 있다면 몸과 몸의 관계는 그 한 사람과의 관계 뿐입니다. 새로운 사람과 성관계를 맺을 수 있으려면, 그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재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혼은 에클레시아 안에서만 일어나야 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 가능성 때문에 신실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인간적 차원에서의 고달픔을 가져오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께 한결같이 몸 드리는 독신'만한 것이 없습니다.
앞에서 "주께 받은 명령은 없지만, 신실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달은 바를 들어달라"고 말한 바울의 깨달음이 여기서 마무리 됩니다.
앞에서 "주께 받은 명령은 없지만, 신실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달은 바를 들어달라"고 말한 바울의 깨달음이 여기서 마무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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