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두 번째 논문의 전체 얼개를 그려보면(p. 293),

2.1. 음행과 교회(4:17~5a6a)
2.2. (세 가지 장애물 : 누룩, 음행, 법정) (5:6b~6:8)
2.3.     성 관습의 신학 : 천국 윤리(6:9~12)
2.4.    성 관습의 신학 : 몸의 결합(6:13~20)
2.5. 복음과 조화되는 성 관습(7:1~40)

2.5


고린도전서 7:1~16

  그러면 여러분이 적어 보낸 문제들을 살펴봅시다.

1. '사람은 여자와 관계하지 않는 것이 온전합니다.'

  그런데(δε) 포르노이아의 행실들 때문에 각각 남자는 자기 아내를 갖고, 또 각각 여자는 자기 남편을 갖길 바랍니다. 아내에게 남편은 부부의 권리를 줘야 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동일하게 해야 합니다. 여자는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권한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자는 자기 몸을 마음대로 못하고, 아내에게 권한이 있습니다. 서로 거부하지 마십시오. 만일 더 많이 기도할 기간을 갖기 위해 합의한 기간 동안에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나약한 의지 때문에 사탄이 여러분을 시험하지 않도록, 그 뒤에 다시 합치십시오.


  "적어 보낸 문제들"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보아 편지는 고린도전서, 후서 외에 더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이 극심한 문제를 겪으면서, 그 공동체 개척자인 바울에게 문제에 대한 편지를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보낸 문제들을 재구성해보면

  1.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온전한가?

  2. 독신자와 과부는 어떤가?

  3. 이혼은 어떤가?

  4. 비신자와 결혼한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5. 독신은 어떤가?

  6. 배우자가 죽은 후에 재혼할 수 있는가?

  7. 우상에게 바쳐진 재물을 먹을 수 있는가?

  이 질문 목록들은 고린도 교회가 5,6장에서 다뤘던 근친상간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만든 고상한 질문들일 수 있다. 게다가 바울의 편지들이 회람서신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편지 교환을 통해 자신들의 수치가 드러나길 바라지 않았을 것.

  7:1의 "사람은 여자와 관계하지 않는 것이 온전합니다"를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의견으로 번역해야 한다.

사사기 16: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성관계를 매개로 한 들릴라의 유혹에 대한 남자의 반응. 성관계가 박탈되었을 때의 괴로움.
 

  "포르네이아의 행실들 때문에 결혼 하라"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더더욱 성경을 역사의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확신이 듭니다. 당시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문제는 다음 두 가지 양자택일의 선택지라 생각합니다. 먼저는,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춘부를 찾아가는 일, 다른 하나는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물질적 지혜를 추구하기 위해 성관계를 하지 않던 일입니다. 이 둘 사이에서 바울은 '결혼'을 제자리에 두어야 했습니다. 즉 결혼 이후에는 결혼 밖에서의 성적 관계가 불허하며, 성적 관계 자체가 배격되는 것이 아닌 부부 안에서 성관계가 이루어져야 함을 천명한 것입니다. 역사적 맥락 없이 저 구절을 오늘 우리의 시대와 일대일로 매칭시키려 했을 때는, 그저 결혼을 '개인의 음행을 피하기 위한 도구'삼는 측면으로만 읽히니 마음이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창세기의 에덴 이야기를 가져와서 결혼을 설명하는 그는, 결혼이 신비하고 우주적인 측면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맥락을 따라 읽었을 때 또한 드러나는 이 서신의 탁월한 면은 바로 성평등입니다.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한 권리를 요구한다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지중해 지역의 윤리의식으로 보았을 때 충격적인 수준입니다.(오늘 우리가 보았을 때는 당연한 것이지만.) 전쟁에서 여자가 전리품 취급받고, 심지어 아버지의 재산처럼 여겨지는 고대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똑같은 권리를 준다는 것은, 창세기의 남녀합일의 위대한 원칙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과 끊어진 현시대에서는, 남녀의 관계를 왜곡시키고 파괴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이 사탄의 의지에 굴복합니다. 나약한 의지는 다름이 아니라, 패배자의 의지이며, 이 패배는 사탄에게 패배한 의지입니다. "세상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사탄에게 질 것을 이미 결정한 사람의 변명입니다. 사탄이 시험하지 않도록, 의지를 굳건히 하고, 상황을 개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조언하는 것이지,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고유한 카리스마가 있어서, 이 사람은 한편으로 이러하고, 저 사람은 다른 한편으로 저러합니다. 


  바울은 이 장 내내 독신을 권장합니다. 그러나 독신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독신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카리스마 중 하나이지, 모든 사람이 이러한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오늘 우리가 흔히 쓰는 카리스마라는 말의 의미와 사뭇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본래 '카리스'는 '거저'요,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카리스마는 거저 받은 것으로 개역성경에선 '은사'라고 번역했습니다. 허나 오늘날에는 이것을 '개인이 갖는 다수에 대한 지배력'정도로 쓰는 것 같습니다. 단편적입니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만듭니다.


  카리스마는 내 인격이 갖는 좋은 면들을 가리킵니다. 그 좋은 면이란, 창조주가 바라보시는 좋음이요, 이 세상 모든 좋음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성욕을 참고 독신으로 살 수 있는 절제력은 카리스마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정말 좋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인격을 가진 것은 아님에 분명합니다. 그는 또다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결혼'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있고, 독신에 대해서 결혼보다 못한 삶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인생 늙그막에 적적할까봐 결혼을 생각한다면, 그 결혼은 나의 외로움 때문에 타인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진정한 가족'을 만난 사람이라면, 그러한 결혼은 불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신약성경은 오히려 독신을 권장합니다. 가정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을 더 온전한 삶이라 말합니다.


2. 독신자들과 과부들에게 전합니다. 나처럼 머무를 수만 있다면, 여러분에게 온전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자제력이 없다면, 결혼하십시오. 불같이 타오르는 것보다 결혼하는게 더 낫습니다.


  바울의 균형감각을 보시기 바랍니다. 독신자들과 과부들에게 독신을 권장하지만, 그렇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제력의 카리스마를 얻지 못했다면, 결혼하라 말합니다. 포르네이아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 제도 안에서 성욕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그 성욕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때 '독신자'는 미혼인가 기혼 경험이 있는 자인가? αγαμος를 '과부'와 짝단어로서, "결혼에서 벗어난 자"라 이해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7:32,34는 결혼 경험이 없는 "처녀"와 짝단어로 등장한다.


3. 결혼한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내가 아니라 주께서 말입니다. 여자는 자기 남편으로부터 헤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헤어지면 독신(αγαμος)으로 머물거나, 그와 다시 화해 해야하고, 남자도 아내를 떠나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의 일관적인 원칙이 기혼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오늘날과 가장 상충하는 부분입니다. 이혼률이 급증하는 한국 사회 안에서, 전부인이 살아 있는데 다시 재혼하는 일은 더이상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창조 이야기에 기술된 남녀 합일의 원칙에 의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역사적 맥락 없이 성경과 현실을 일 대 일로 매칭시키는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남녀의 몸은 일 대 일입니다. 이혼했다면, 전에 하나였던 사람의 몸이 죽어서 분해가 시작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의 몸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재혼은 본래 그 사람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독신으로 머무는 것을 더욱 권장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혼이 더욱 신중해 질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몸과 하나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과 사느냐 독신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4. 남은 이들에게는 내가 말합니다(주께서가 아니라). 만일 어떤 가족에게 (주께) 신실함 없는 아내가 있는데, 아내가 그와 함께 사는 것을 좋게 여기면, 그는 아내와 헤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여자에게 신실함 없는 남편이 있는데, 남편이 그녀와 사는 것을 좋게 여기면, 그녀는 남편과 헤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신실함 없는 남편이 자기 아내로 거룩해지고, 신실함 없는 아내가 자기 남편으로 거룩해집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은 깨끗하지 못했을 터인데 지금 그들은 거룩합니다. 그런데 만일 신실함 없는 배우자가 헤어지려 한다면, 헤어지십시오. 형제든 자매든 이런 경우에는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평화로 부르셨습니다. 아내여! 어찌 알겠습니까, 남편을 건져낼지 아닐지. 남편이여! 어찌 알겠습니까, 아내를 건져낼지 아닐지.


  바울은 이 '성'에 관련된 문제가 에클레시아에 구체적으로 적용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결혼에 대한 일반 원칙을 말한 뒤, 독신자들과 과부들을 가장 먼저 말했고(결혼보다 독신을 강조하고 있는 바울에겐 당연한 순서입니다.), 그 다음 기혼자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아 있는 범주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바로 부부 중 어느 한 쪽만 신실한 경우입니다.


  바울은 한 쪽이 신실하지 않다는 사실이 이혼의 빌미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견뎌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 쪽에 의해 다른 한쪽이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가능합니다. 즉 부부 중 어느 한 쪽이 신실했을 때, 다른 한 쪽도 신실해질 수 있고, 그 결과 그 자녀들이 에클레시아의 일원 답게 구별되어 살 수 있습니다. '깨끗'입니다.


  그런데 만일 신실하지 않은 사람이 헤어지려 한다면 헤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고서는 버텨야 합니다. 평화를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의 이유입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가운데, 우리가 갖는 삶의 일관된 태도는 신실함이고, 이 신실한 태도는 관계의 단절을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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