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and bone>, Lust and born.

from 창고 2013. 12. 26. 11:06

러스트 앤 본 (2013)

Rust and Bone 
8.6
감독
자크 오디아르
출연
마리옹 꼬띠아르, 마티아스 쇼에나에츠, 아만드 베르뒤어, 셀린느 살레뜨, 코린 마시에로
정보
드라마, 로맨스/멜로 | 벨기에, 프랑스 | 120 분 | 2013-05-02

 

0.

  처음 이 영화를 추천받았을 때, 나는 Lust and born 인줄 알았다. 성적으로 방종한 삶을 사는 이가,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라고 대강 짐작했지. (역시 사람은 평소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로 세상을 본다.) 영화가 끝나서야 알았다. Lust and born이 아니라, Rust and bone이라는 거. 제목을 틀리게 알고 있었다는 민망함이 밀려오고, 이 민망함을 감출 수 있는 것은 그보다 강력한 호기심이지. 얼른 사전 검색. (게다가 왜 영화 제목에 '녹'이 나오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Rust에는 '재능이 무뎌짐, 무위(無爲), 정신적 부패' 라는 뜻이 있었다.

 

  그럼 bone은 왜?

 

1.

  영화는 인간이 입고 있는 피상성과 목적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피상성은 자신의 진짜 목적을 숨기는 것이고, 목적없음은 피상성으로 가릴 목적조차 없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은 이 사람, 저 사람 아무렇지도 않게 성관계를 맺지만, 정작 진실한 사랑은 모른다. 자기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자기 성질 건드리면, 국물도 없다. 게다가 대형마트 직원들을 감시하는 카메라를 설치하는 일을 돕고,(이것 때문에 누나는 회사 짤림) 도박판에 들어가서 싸움꾼이 되어도 즐겁다. 목적이 없으니 죄책감도 없다.

 

  여자 주인공은 늦은 밤 클럽을 전전한다. 그녀는 깊은 공허함에 빠져있다. 삶은 무료하고 피상적이다. 남자가 가지고 있는 관계에 대한 왜곡된 열정. 여자가 가지고 있는 관계에 대한 의욕없음. 피상성. 목적없음. 언제부터 이들은 이렇게 된 것일까? 공기중에 내버려둔 못처럼, 언제인지 모르게, 소리소문 없이, 그렇게 그들의 삶을 녹(rust)으로 덮어버렸다.

 

2.

  그들이 이 녹을 씻어낸 것은 어떤 사건때문이었다. 뼈와 관련된 사건. 여자는 다리가 잘렸고, 남자는 손가락 뼈가 부러졌다. 이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물과 피. 여자는 물속에서 돌고래에게 다리가 씹히는 사고를 당했고, 남자는 물속에 자기 아들이 갇혀, 주먹으로 얼음을 깨뜨렸다. 둘다 피가 흥건했다. 이 뼈, 물, 피의 사건이 이 사람들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물은 죽음이었다. 자신의 약함을 처절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죽음. 이 약함이 여자를 오랫동안 괴롭혔고, 남자에게는 마지막 짧은 시간이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결국 이들을 바꾼 것은, 자신들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자기 밖에 모르던 여자는, 누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고,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한 남자는, 아들의 죽음 언저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두려움을 알게 되었으니까. 바로 이 사건이다. 뼈를 잃고 상처를 얻은, '바로 이 사건'이 이들을 바꿔놓았다.

 

3.

  영화의 말미에 남자는 여자에게 말한다.

"쥬땜무"

 

  사랑이다. 피상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  그들이 물과 피를 거쳐 얻을 수 있었던 그 사랑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삶의 목적이 없어, 섹스와 도박과 범죄에 젖어살던 남자가 잘했던 일이 딱 하나 있다. 여자에게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는 것. 정말 감추지 않는다. '출장'이라니.아마도 여자는 남자가 밑바닥으로 전락한 자신과 동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직장동료에게 연락할 수는 없어도, 나이트 기도에다가, 어떻게 한 번 자고 싶어하는 맘을 숨기지 않는 이 막장 같은 남자게는 연락할 수 있다니! 이것은 피상적인 친절로 점철된 이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역설 아닌가.

 

  그러나 사랑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피상성을 뚫고, '서로에 대한 이용'에서 벗어나 (칵테일바의 남자의 '미안하다'라는 말은, '내가 너를 이용할 수 없는 상태구나?'일 뿐이다.), 상대에게 자신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너 수영할래? 난 수영 좋아해, 난 할거야') 남자의 경우, 자신의 인생 최대의 위기 속에서, 여자의 전화를 받는다. 두려움을 쫓는 것은 사랑이라고. 아들을 잃을뻔한 두려움을, 여자의 끈기있는 사랑이 몰아낸다. 여자에게는 목적있다. 그 목적은 이 남자. 자신에게 연락도 없이 떠난 이 남자에 대한 지치지 않는 추구.

 

  그래. 사랑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속내를 감추지 않는 법을 배웠고,

남자는 여자에게 타인을 진실하게 추구하는 법을 배웠다.

사랑하기에 자신의 속내를 감출 필요 없고,

사랑하기에 내 삶의 목적이 너라고 말할 수 있다.

4.

  그러나 이것은 유행가의 흔하디 흔한 사랑이 아니다.(그것은 사랑이 아닐지도), 상대를 볼 때마다 자신의 상처를 되뇌일 수 밖에 없는 사랑. 여자는 다리를, 남자는 주먹을. 그 상처 이후에야 여자는 남자에게 키스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뽀뽀한다. 입맞춤은, 진실한 관계를 추구하는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정리해보자. 

  목적없음, 피상성에 녹이 슬어가는 사람들이, 물과 피의 끔찍한 사건을 겪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자신의 약함을 발견하게 했고, 타인을 추구하는 대전환을 가져왔다. 그 전환은 사랑. 뼈의 온전함을 잃었으나, 너를 얻었다. 피를 흘렸으나, 삶의 녹을 씻어냈다. 죄에 잠겨있던 사람들이,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니까 Lust and born도 뭐, 허허허

 

P.S. 

아, 아들 얘기를 빼먹었는데, 물에 갇혀 죽었던 아들은, 물과 피를 거쳐, '3'시간 만에 다시 살아났다. '바로 그 사건'처럼 말이다.

 

요한일서 5:6, 새번역

그는 물과 피를 거쳐서 오신 분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다만 물로써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셨습니다. 

성령은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누가복음 15:32, 탕자 아버지 曰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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