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전서 6:1~20

  여러분 가운데 타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서,  불의한 이들 앞에서 재판을 받는 일이 있다는데, 어찌 감히 그럴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이들이 현시대를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또 만일 현시대가 여러분 안에서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여러분이 그 사소한 것들을 판단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별 일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그런데 하물며 일상생활과 관련된 문제라니요! 이런데도 여러분은 일상생활과 관련된 문제와 관련된 소송이 있을 때면 늘, 에클레시아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앉혀놓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가족들 사이에서 판결을 내릴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정녕 그러합니까? 그래서 한 형제가 다른 형제와 함께 판단받습니까? 그것도 믿지 않는 이들 앞에서?


  어제 본문에서 '포르네이아와 우쭐함'의 문제를 다룬 바울은, 이제 소송 이야기를 꺼냅니다. 다른 주제이지만 사실 같은 얘기입니다. 어제 본문과 오늘 본문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판단'입니다.

  '판단', '재판',' '심판' 모두 같은 단어입니다. 바울은 에클레시아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포르네이아를 저지른 사람을 포용하면서 지혜롭다 자랑하지 말고, 그를 사탄에게 내어주어라. 그것이 빛나는 판단 아래서 출애굽을 기억한 에클레시아의 바른 처사다.' 이 내용을 통해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의 형편을 역으로 추적해본다면, 1) 그들은 악을 악이라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지혜라 자랑하고 있고, 2) 이러한 일상의 악을 해결할 수 없는 사변적 지혜가 공동체의 분열을 낳고 있는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서 3) 그 분열을 해결하고자, 에클레시아 식구 둘이 멱살을 잡고 서로 법정에서 보자며 이를 가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바울은 에클레시아가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특히 '판단'에 대해서 말입니다. 먼저 에클레시아에 속한 이들은 천사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에클레시아는 현시대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에는 단서조항이 붙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이 말을 저는 '관계망'이라 풀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닌 너희들 가운데 있다'고 그이가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나에게 있지 않고, 너에게도 있지 않으며, 너와 나 사이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을 모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몰아냈던 참 왕을, 다시 너와 내가 호흡합니다. 같은 숨, 연대. 말그대로 그 '관계망'은 현시대를 포박하는 그물입니다. 에클레시아 안에 있는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현시대의 누룩을 질식시켜 없애버립니다. 에클레시아에 속한 이들은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를 판단할 수 없어서, 서로 판단해줄 사람들을 찾으러 사탄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앞 4장에서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던 바울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내부 비판을 상실한 에클레시아는.


  서로 판단할 일을 갖고 있는 것부터가 여러분에게 전적인 실책이 있습니다. 왜 차라리 여러분이 부당한 취급을 받으려 하지는 않습니까? 왜 차라리 여러분이 손해를 감수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여러분 자신이 부당함을 만들고 손해를 끼치며, 그것도 가족들에게 그 짓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판단할 일을 가지고 있는 것자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느 집단이나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그들이 따르는 왕으로부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을 전수받은 사람들입니다. 왼뺨을 대고, 10리를 걸어주는 것은, 무력하게 당해주기만 하면 된다 패배자의 윤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받아주자는 관용의 지혜는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부끄러운 짓입니다. 왕의 길은 제 3의 길입니다. 당해주되, 지혜롭게 당해주어, 가해자를 깨닫게 하는 역전의 방법이 곧 십자가의 메시아 예수의 방법입니다.

  그 방법의 시작이 당해줌입니다. 패배자의 윤리가 아닌 것은, 그것이 승리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맞불을 놓지 않으면서도 지혜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결국은 그 '사람'을 얻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시작조차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얻은 이들이, 그 정체성을 망각의 강에 내어준채, 부끄러운 지혜의 옷을 걸치고서 사탄의 영역인 무지와 어둠으로 자신들을 내어주었습니다.


2.3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의 구조를 이전 원고에 기입해둔다. 케네스. E. 베일리는 6:9~12를 두 번째 논문의 세 번째 단락으로 보고 있다. "아니면(
)"으로 시작되는 구절부터.


  아니면 여러분은 부당함을 만드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속지 마십시오! 포르네이아한 자들, 그림자를 따르는 자들, 간음하는 이성애자들, 동성애 관계에서의 탑(top)과 바텀(bottom)들, 훔치는 자들, 탐욕스러운 자들, 뭐에 빠진 자들, 악담하는 자들, 강요하고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전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깨끗이 씻겼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해졌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되었습니다, 주 메시아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 숨결로.


  하나님 나라 상속은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사람을 새로이 창조하시고, 그를 통해 자신의 다스림을 이 땅에 실현시키시며, 그들에게 새롭게 될 창조 세계 전체를 맡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당함을 처리하기는 커녕, 그것을 생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저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속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당대 인간성을 비뚤게 만드는 목록을 가져왔습니다. 이 목록은 바울이 만들어낸 목록이 아닙니다. 이미 사탄의 영역에서도 잘 알려진 목록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목록의 소유 여부에 있지 않습니다.(토라를 소유했다고 만족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에클레시아를 에클레시아답게 하는 것은 '실천력'입니다. (바울은 이미 이 실천력에 대해서 4장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얘기는 판단과 실천력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에클레시아는 말입니다. 현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판단의 빛'이요, 그 판단대로 사는데 자신을 녹여내는 '소금들'입니다. 에클레시아는 말입니다.

-2017.12.28
"간음", "탐색", "남색"이라 번역된 단어는 각각,  μοιχοὶ, μαλακοὶ, ἀρσενοκοῖται
인데, 모이코이는 결혼한 이성애자들의 성적 범죄, 말라코이는 동성애 관계에서 수동적 파트너들을, 아르세노코이타이는 동성애 관계에서 능동적 파트너를 가리킨다.
 
  "그러나"의 세 번 반복. 그리고 "주 메시아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숨결로"


  "모든 것이 내게는 적법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내게는 적법하다(ἔξεστιν)."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도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ἐξουσιασθήσομαι) 못하게 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적법하다"를 말하는 다른 타입의 사람들을 비교해보고 싶어진다. "~아닌 것처럼" 은 기표를 벗어던지자는 방종이 아니라, 기표 갱신으로 돌아온다.

  ἔξεστιν과 ἐξουσιασθήσομαι로 언어유희. ἐξουσια를 적법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는 분명한 증거.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는 그럴 수 있다." 이 외침이 현대인의 외침으로 들리지 않으십니까? 흔히 "그럴 수도 있지" 이런 말로 말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요. 그러나 이 말은 사실입니다만, 이 말만 가지고는 못 삽니다. 그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에게 '유익'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져봐야 할 것 아닙니까? 새엄마와 사는 일이 그럴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럴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찮은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그럴 수 있으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서 '나'를 지키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자기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나'는 곧 '대아'입니다.(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도 '이스라엘 공동체'를 '나'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에클레시아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로부터, 바울은 에클레시아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2.4.

  "음식은 위장을 위해 있고, 위장은 음식을 위해 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도 저것도 멸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몸은 포르네이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위해 있고, 주는 몸을 위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를 일으키셨고, 우리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의 힘으로.


"사람은 소마를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곧 소마다." - 불트만 <신약신학>, p.194
'몸'의 이중성 : '나'이면서도, '에클레시아'


  "음식은 위장을 위해 있고, 위장은 음식을 위해 있습니다." 이 말 또한 맞는 말입니다. 그럼 "성기는 성관계를 위해 있으며, 그러니 성기는 성관계를 위해서는 어떤 상황이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것도 저것도 멸하실 것입니다. 즉 음식도, 위장도, 우리의 몸도, 지구도, 우주 전체도, 즉 현시대 안에 있는 모든 물질들은 멸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끝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을 주의 날이라 하는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 새롭게 창조된 뮈스테리온. 그 새로움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은, 마치 방주를 눈 앞에 보면서도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물질만으로 유익을,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습니까? 지난 세기에 그러한 사람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두 패로 가르고 싸우도록 만들지 않았습니까? 무신론은 무어며, 유물론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요, 물질이 전부라 말하는 사람들은 물질과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주. 위장이 있으니 음식을 때려넣고, 성기가 있으니 성관계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있으니 그저 향유하면 그만인 게 아닙니다. 주. 이 모든 물질계의 주인이 계십니다. 우리의 몸은 신체의 마찰을 통해 얻는 쾌감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만 중요하고, 물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물질계의 주인께서, 물질을 위해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멸망으로 가는 물질계의 한복판에 나타나, 그는 이 창조세계 전체를 위해 죽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를 따라, 우리 또한 죽었다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창조세계 전체와 함께.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요? 그래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감동이 없어도, 의심이 생겨도, 어찌되었든 받아 먹어서 우리의 몸이 이 진실 앞에 복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창조된 인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럼 참으로 인간다워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이 메시아의 팔,다리인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메시아의 팔, 다리를 데려다가 매춘부(포르네스)의 팔,다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매춘부에게 붙은 이는 그와 한 몸 되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께 붙은 이는 그이와 한 숨이 됩니다.


  지체라는 말은 본래 '팔,다리'라는 말입니다. 영어 단어 member도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에클레시아의 구성원(member)이라면(이 말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앞에서 생명력은 구성력이라 했는데, 우리가 무언가를 중심으로 모인 구성원입니다), 우리의 중심은 메시아 예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시아 예수에게 붙은 팔,다리. 그의 보이지 않는 생각이,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 눈에 보이게끔 뚜렷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예수행전,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늘로 승천하셨으나, 이 땅에 사람들이 남아 예수를 뚜렷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없다는 소리가 들릴 수 없도록 살아갑니다. 바로 그러한 member입니다.

  만일 당신이 메시아 예수의 팔, 다리가 아니라면, 무엇에 연결된 팔, 다리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중심없이 사는 사람은 없고, 메시아 예수가 그의 중심이 아니라면, 그는 분명 다른 중심에 연결되어 팔, 다리 노릇을 하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새엄마와 살림을 차려도 괜찮다고 말하는 고린도의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매춘부에게는 못가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일에는 초월했으니, 이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거리낌도 안된다며 '주께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 그 몸'으로 타인과의 성관계를 가볍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남녀의 성관계는 '한 몸이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혼제도의 시작입니다. '결혼은 한 몸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관계를 전제하며, 그 성관계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 밖의 모든 '행위'들을 성경은 포르네이아로 규정합니다. 그렇다고 동성애 '성향'마저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윌라드 스와틀리의 의견을 따라 성향과 행위를 구분하고자 합니다. 성향이 자연스럽게 행위로 이어져야 하는 정당성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부패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은 동성애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성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성애자라 해도 한 사람 외에 결혼제도 바깥의 성관계를 갖는다면, 그것은 포르네이아 입니다.
  동성애 성향'만'을 비판하지 전에, 자신의 탐욕스럽고 거짓되며 자기 자신을 높이는 성향을 되돌아봐야 합니다.(내부 비판을 시작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성향과 행위 사이에 있는 간극을 봅니다. 성향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실천의 가능성을 노래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메시아 예수의 구속'이라 말하지 않습니까? 마치 바다 한 가운데 좌초된 유조선이 검은 기름을 내뿜듯, 우리 속에서도 끊임없이 더러운 것들이 밀려나옵니다. 예레미야의 말대로 만물 중에 가장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신실(信實)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니다. 일단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붙일 수 있기까지, 한 사람의 일생이 온통 필요했고, 그 한 사람의 일생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성실한 노동이 있었음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걸 아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옆에 서는 것입니다(信). 말씀 옆에 서는 것으로 실천의 열매를 맺는 것(實)입니다. 욕심, 미움, 시기, 질투의 성향에는 이 일이 가능한데, 동성애 성향에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 아닙니까? 신실함은 새창조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합니다. 이어지는 두 문장을 비교해봅시다.

  매춘부에게 붙은 이는 그와 한 몸이 된다.
  주께 붙은 이는 그이와 한 숨이 된다.

  몸이 되는 것과 숨이 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뒷 문장은, 우리가 흔히 '영'이라는 단어를 '성령'으로 볼지 '사람의 영'으로 볼지 고민하게 되는데, 사실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영임을 보여줍니다.) 저는 저 두 문장의 비교 속에 새창조의 신학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춘부에게 붙은 이는 그와 한 몸이나, 그 물질로 이루어진 한 몸은 베드로의 말처럼 모두가 풀어져 버릴 것입니다. 옛창조의 끝날이 가까워오고 있고, 모든 물질들은 사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 붙은 이는 그와 '한 숨'이 되는데, 그 숨이란 "메시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이의 숨"입니다. 그래서 앞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주는 몸을 위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를 일으키셨고, 우리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의 힘으로."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위해 계시고,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를 일으키셨듯, 창조세계 전체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의 숨결로. 하나님께서 창조를 '그의 숨결을 통해서'하시는 일은, 창세기를 보아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방법입니다. 메시아 예수와 한 몸이 된(저는 이 말이 세례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예수와 한 성령을 호흡하므로, 새 창조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 성령은 부활의 보증, 즉 새 창조의 확인도장이십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매춘부와 한 몸이 되는 것과, 메시아와 새창조의 숨결을 나누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포르네이아를 피하십시오.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비뚤어짐은 몸 밖에 있습니다. 하지만 포르네이아는 자기 몸을 비뚤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여러분은 여러분 몸이 성전이며, 그 성전은 여러분 안에 계신 거룩한 숨결의 성전이고, 그 거룩한 숨결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유하게 된 것이지, 여러분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즉 여러분은 아주 비싼 값을 치르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뚜렷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여러분의 몸 안에서(으로).


  상징계는 포르네이아하도록, 비뚤어지도록 만든다. 결여를 따라 남근기표로 미끌어 "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우리를 그 일부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상징계의 내 자리가 "아닌 것처럼" 살아야 하는 이유는, 몸으로서 살기 위함이다.

  이 문단에 대해서는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관계망이, 에클레시아가 새 성전입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이 땅의 중심입니다. 그 안에서 현시대가 심판받고, 밖에 있는 이들은 그 에클레시아 안에서 벌어지는 판단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참 인간다움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역사'라 불리는 하나님의 아주 비싼 값을 치르심으로, '없던 일이 있게 된 것임'을 우리도 알아야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포르네이아를 피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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