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19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동안 아볼로라는 인물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에베소에 남겨놓은채 '그 교회'로 올라갔습니다. 그 동안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성령'에 대해서 배웠고, 그 성령의 교제에 참여하기 위해, 이제 회당을 떠나 고린도에 있는 공동체에 들어가,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누가는 카메라를 돌려 다시금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에 주목합니다.


사도행전 19:1~10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바울은 내륙 지방을 거쳐 에베소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제자들 몇 사람을 만나서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물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들이 대답했다.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요한의 세례 운동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었던 요단강가와 에베소는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곳 에베소에도 요한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요한의 세례는 받았으나, 성령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마치 메시아 예수에 대해서 논증했으나, 성령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아볼로처럼 말입니다.

  성경에 '제자'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만, 이 '제자'를 '온전한 사람'이라 읽어선 곤란합니다. 성경은 누군가를 스승으로 둔 사람을 가리켜 다 '제자'라 부릅니다. 심지어 성령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제자는 제자입니다. 그러니 이 단어에 너무 무게감을 실어선 안되겠습니다. 당신은 제자입니까? 사람은 태어나서 무언가를 배우며 살아가니 모두가 제자입니다. 제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은 '제자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누구의 제자입니까?' 입니다.  메시아 예수의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뒤에 오실 분에 대해 말했고, 그 사람이 백성들이 믿어야 하는 분, 바로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를 믿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과 밀접한 상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14장을 인용합니다.


요한복음 14:16~21


내(예수님)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곁에서 돕는 이'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숨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승천 이후,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임을 '알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 일의 중심에 성령이 계십니다.


  요한은 새로운 출애굽을 예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고한대로 모든 사람을 죄로부터 출애굽하시는 '인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예전에 모세와 같이 거짓왕을 파멸시키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유의 여정을 떠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의 여정은 광야의 여정이었고, 구름 기둥을 따르는 여행길이었습니다. 예수가 출애굽의 시작이라면, 성령은 '예수를 통해 시작된 사람들'을 인도하는 구름기둥입니다.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사람들은 생각없이 앞에 보이는 구름기둥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지만, 이 새로운 구름기둥은 사람의 마음 한 가운데로 들어와,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며 하나님의 길을 따라 나아갑니다. 하나님 임재의 구름을 가슴에 담은 성전들이, 그렇게 현시대의 광야길을 헤쳐나갑니다.


  예수는 출애굽의 시작이요, 성령은 광야의 인도자라 하겠습니다.예수를 믿었는데 성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언약백성 신분에 걸맞지 않은 일입니다. 속에 계신 성령을 슬프게 하는 가슴 아픈 경우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고나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했다. 그들은 모두 열두 명쯤 되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40일 뒤,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열 두 명의 요한의 제자들은, 이제 성령을 받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129명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방언을 하고 예언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렇게 성령을 받는 경우를 여러 차례 묘사했습니다. 먼저는 앞에서 언급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졌고, 8장에 가면 베드로와 요한에게 안수를 받은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성령 안에서 일하고 있는 바울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10,11장에서는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이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는 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소용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기준, 믿음 뿐입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바울은 회당으로 들어가서, 석 달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논증하고 설득하며 담대히 말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마음이 완고해져서 믿지 않으며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도'에 대해 근거 없는 못된 주장을 하자 바울은 그들을 떠났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두란노 학당에서 날마다 논증했다. 그는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아시아의 모든 거주민이 주의 말씀을 듣도록 이 일을 2년 동안 했다.


  이 믿음 하나만으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이야기가 유대인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통해 메시아와 성령을 새롭게 이해한 바울의 말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해야 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서 말해야 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자신의 목숨조차도 하나님의 드러남과, 유대인들에 대한 긍휼을 더 귀히 여길 때 할 수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논증하고 설득합니다. 누가는 "몇몇 사람이 완고해져서"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단순히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로마서 9-11장의 안경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보여주는 '완고함'이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이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서잉 출애굽하기 위해서 파라오가 '완고해진 것 같이', 하나님은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완고함을 통해서도 그 분의 뜻을 이뤄가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에베소 회당의 완고한 자들 때문에, 에베소에서 생겨난 제자들이 두란노에서 2년에 걸쳐 집중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완고함 자체가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완고함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자신이 파라오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요, 그 끝은 멸망일 뿐입니다. 완고함으로 사용되는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 긍휼함을 전하는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체류한 이 2년동안 고린도전서를 썼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타이밍을 재다가 고린도전서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아, 그 전에 에베소에서 있었던 큰 사건을 빼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에베소에서 있었던 큰 사건'을 살펴본 뒤, 이제 고린도전서를 본격적으로 탐독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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