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에 대한 내용을 다루기 시작하자마자, 이제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1년 6개월에 걸쳐 고린도에 있었다는 언급이 있었을 뿐, 사도행전에서는 고린도에서 있었던 자세한 일들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린도전서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다른 두 책을 번갈아보며, 당시 사건을 재구성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18:12~18입니다. 각자의 성경을 가지고 먼저 본문을 읽어보는게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갈리오라는 사람과 아가야라는 지명으로 시작합니다. 모르는 지역에서 있었던,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시작부터 지루할테니, 일단 갈리오가 누구이며, 아가야가 어디인지부터 알아봅시다. 사실 갈리오보다는 그 형이 더 유명합니다. 갈리오는 스토아 철학자로 유명한 세네카의 동생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같이 자신의 죽음을 떳떳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유명하지요. 세네카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그 동생인 갈리오는 아가야 지방의 총독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갈리오가 언급되는 이 본문은 성경과 역사책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갈리오가 총독을 지낸 것이, A.D.51~52였으니, 우리는 바울의 일대기도 역사의 어느 시점인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아가야는 오늘날 그리스 지역입니다. 아래 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지도에서 아굴라의 고향인 '본도'를 확인해봅시다. 그리고 '고린도'도 찍어보시고요. '아가야'도 찾아봅시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역 안에 속한 도시 이름입니다. 즉 아가야의 총독은 고린도의 일도 관할합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으로 있을 때, 즉 A.D.51~52 어느 날에,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던 바울을 유대인들이 붙잡아 갈리오에게 끌고 왔습니다. 그를 끌고 온 이유가 13절입니다.


사도행전 18:13

"이 사람은 사람들에게 불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칩니다" 라고 그들이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저 '불법적인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가르쳤기에, 유대인들은 바울의 방법을 '불법'이라 생각했던 것일까요? 아마도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법적인 방법'이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만으로 예배의 자격을 제한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토라(그들은 '법'이라 불렀습니다)에 합당한 방식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토라는 자신들의 지위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법이었고, 이 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공동체는 토라를 이루는 방식이 할례에 있지 않고 신실함에 있으며, 따라서 할례를 받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 신실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예수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 이 점을 가리켜 유대인들은 '불법적인 방법'이라 말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이들은, 이 '예수를 통한 하나됨'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갈리오가 보기에는, 유대인들의 이 기소내용은 별로 문제가 되거나 위험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사도행전 18:14,15

바울이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개입했다.

"유대인들이여, 보시오. 이것이 심각한 범법 행위나 위험한 학행의 문제라면 내가 여러분의 탄원을 제대로 받아들이겠소. 그러나 이것이 여러분의 관습에 속한 말과 이름과 율법에 대한 논쟁이라면 여러분끼리 해결하시오. 이런 문제에 내가 재판관 노릇을 할 생각은 없소."


  갈리오는 유대인들과 예수 공동체의 일이 그저 특정 지방의 종교에 국한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율법에 호소할 일이라면 율법에 따라 해결할 일이지, 로마의 총독인 자신의 일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마의 총독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폭동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팍스 로마나를 유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즉 황제 중심으로 전세계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 로마의 목적이었습니다. 점령지역에서 벌어지는 소요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에 눈감아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 공동체를 불법으로 규정한 유대인의 생각은 토라를 통해 비춰보아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그의 편지들에게 밝히 드러낼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 공동체는 사회의 암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은 '사랑'이었고, 말리기는 커녕 칭찬해줘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리오의 이러한 판단은, 이 아가야 지역에서 예수 공동체가 불법이 아니라는 판례로 남게 되었고, 앞으로의 선교에 더욱 힘을 실어줄 것입니다.


  바울을 기소한 유대인들은 이렇게 갈리오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무리들이 새로운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마구 팼습니다.(소스데네 전에는 그리스보가 회당장이었으나, 그는 어제 본문에서 주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새로이 회당장이 된 소스데네가 사람들을 선동했을 것이고, 갈리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유대인들이 분에 못이겨, 자신들의 지도자에게 책임지라며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갈리오는 유대인들이 서로 분열하며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지켜만 봤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까지 읽고서, 소스데네가 무척이나 불쌍해졌습니다. 회당 식구들에게 얻어맞은 회당장이라니요. 그런데 이 얻어맞음이 그에게 복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소스데네는 회당장의 직위를 버리고,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과 함께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첫머리에 언급되는 영광을 누리며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1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왕이신 예수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과 우리 형제 소스데네가...


  갈리오의 재판이 끝난뒤, 바울은 며칠있다가 고린도를 떠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떠납니다. 이 때 소스데네가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보아, 소스데네가 이 때 합류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이제 이 천막쟁이들은 배를 타고 시리아로 떠납니다. 위의 지도를 다시 봅시다. 바울은 고린도 동쪽 끝에 있는 겐그레아 항구에서 머리를 깎습니다.(겐그레아는 '뵈뵈'라는 여자가 살고 있는데, 나중에 바울은 이 여자에게 <로마서>를 그녀의 손에 맡깁니다.) 18:18에 보면 "그가 서원한 것이 있어" 머리를 깎았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언가 중요한 임무에 임할 때, 머리를 깎지 않고 내버려둡니다. 나실인 규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규정 중에 머리를 깎지 않는 것이 있었거든요.(삼손도 나실인이었습니다. )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보낸 1년 6개월간 고린도에서 사역하면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 있었고, 그 약속을 잘 지켰기에 그간 머리를 자르지 않다가, 이제 고린도를 떠나면서 머리를 자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새로운 지역 '에베소'로 떠납니다. 우리도 일단 바울을 따라서 좀 더 다녀봅니다. 고린도는 떠났지만, 아직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등장인물 소개가 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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