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7일 직장인 예배 설교


  오늘은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믿는다 말하는 사람들인데, 도대체 믿음은 무엇입니까? 이 '믿음'이란 말에 대해서 충격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을 감정적인 동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내가 심정적으로 '아 그게 맞지'하는 것을 믿음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아, 그 분이 옳지' 하는 사람은 이 나라에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가 변하지 않으면 믿음이라 할 수 없지요. 믿음은 삶을 바꾸는 힘이 있어야 참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따름입니다. 예수 가시는 길 따르면 믿음입니다.


  믿음에 관해서 생각하면, 단연 이 구절입니다.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믿음은 더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요즘은 자기를 사랑하라 말하는 시대입니다. 서점에 가봐도 너 자신을 사랑해야한다라고 말하는 자기개발서, 심리학책들이 즐비합니다. 니가 잘못되는 것은 니가 마음에 상처가 있어서 그러니까, 너는 더욱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무리 사랑해봤자, 자기애적 탐욕은 만족을 모릅니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면,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 생기는 것입니까? 이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입니다. 밑빠진 독에 물을 아무리 부어봐야 남는 것은 텅텅 빈 공허함입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다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싸움이 납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들어보면 다른 것 없습니다. "니가 이렇게 말했어야지!", "아니지, 니가 그 때 이렇게 말했어야지" 이런 말로 서로 의가 갈립니다. 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다 무엇입니까? 나 대접해주라는 말입니다. 이렇듯 자기애적 탐욕에 빠진 사람은 관계 속에서 시원하게 통할 수가 없습니다. 자꾸 걸리는 것이 생깁니다. 


  세상은 온통 이렇습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개인이 자신만을 사랑하니 개인과 개인 사이가 꽉 막혀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온통 이것 때문에 힘들어 하지만, 이것을 해결할 엄두조차 못냅니다. 자식은 방 구석에 틀어박혀, 자신의 눈과 귀를 만족시키주는 작은 화면에 매몰되어 있고, 부모는 드라마를 보며, 그 안의 등장인물들을 욕하며 스트레스를 풀어갑니다. 그러나 마루와 방 사이는 턱턱 막혀 있습니다. 


  그럼 어찌해야겠습니까? 바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다른 게 아닙니다. 더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통할 수 있습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어찌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한 가지를 정말 믿으면 됩니다. 내가 다른 이를 위해 내 인생을 던져도, 내 인생 하나를 하나님이 책임져주시고 보장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믿고, 자기애적 탐욕에서 벗어나, 타인을 위한 삶에 나를 던질 때, 그 때가 바로 정말 믿을 때입니다. 믿고 따를 때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먹이시니, 나는 다른 사람들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즉 밑빠진 독이 흐르는 강물 안으로 깊이 잠기는 것입니다. 그러고나면 더이상 자신을 어찌 채울까 고민하지 않습니다. 자기애적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건 우리가 아버지께 깊이 잠겨 있을 때입니다. 그 때 뿐입니다. 세상이 소통이 문제다, 개인주의가 문제다 라고 하는데,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 모르고 산다는 말 밖에 안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해야 하는데 말로 백 날 전해봐야 힘이 없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전합니까? 하나님 진짜 계시다는 사실을 어찌 확증합니까? 나의 삶을 보장해주시는 한 분 믿고서, 다른 이에게 전심전력으로 전진하는 사람의 삶. 그 삶만이 아버지를 뚜렷이 드러냅니다. 그러한 삶이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영광은 너무 추상적인 단어라 생각합니다. 영광의 본래 뜻은 '뚜렷이 드러남'입니다. 자기애적 에로스에서 벗어나 타자적인 삶을 살면, 한 분 아버지를 뚜렷이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 우리에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북한에서는 아버지를 '아바지'라고 합니다. 이것이 고어에 더 가까운 표현입니다. 아.받.이 라서 '아바지'는 '아들을 받아주시는 이'입니다. 하나님을 아바지라 부르는 건, 그 분이 나를 받아주시어, 나의 허한 속을 채우시고, 나는 다른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일로 보내시는 바로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의 사도들이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는 '보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바지라 부르고 죄다 보내심을 받지 않습니까? 그 보내심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이타적 삶으로의 보내심입니다. 곧 남을 위한 삶입니다. 사랑하는 삶입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그렇게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줄곧 이러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집을 나섭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손을 별과 같이 많게 하며, 땅을 줄 것이며, 너를 통해 온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그 약속은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는 이 집을 떠나가도, 하나님이 나의 생존을 보장하신다는 그 단 하나의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그 자리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중간에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뻥치면서 몇 번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믿음을 지켜나갔고, 자기애적 탐욕에서 벗어나,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자기애적 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심적으로만 동의하는 건 믿음 아닙니다. 믿음은 따름입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자기애적 탐욕에서 벗어나 이타적 삶을 살아도, 내 통장잔고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고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다른게 믿음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을 말해놓고도, 참으로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사도행전 3장에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생각을 바꾸고, 돌이켜, 여러분의 삐뚤어짐으로부터 벗어나 기름칠을 받으십시오.

이같이 하면, 주의 얼굴로부터 다시 시원하게 숨쉬는 순간들이 올 것이며, 

또한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실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 아닙니다. 일단 생각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겠다는 허망한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어찌 합니까? 돌이킵니다. 삶에서, 일상적인 차원에서 돌이킵니다. 여기에 삐뚤어짐이라고 말한 것은 '죄'를 제가 이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죄는 희랍말로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너 애가 참 삐뚤어졌구나"할 때 그 삐뚤어짐입니다. 즉 우리의 삶 속에 삐뚤어진 행동과 습관들을 고치란 말입니다. 그러면 기름칠을 받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름은 다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다른 말로 성령입니다. 즉, 생각을 바꾸고, 몸을 돌이켜, 죄에서 벗어나면 성령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다시 시원하게 숨쉬는 순간들이 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시원하게 숨쉰다는 말은 성령으로 호흡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컨데 이러한 것입니다. 저는 극심한 비염환자입니다. 3월과 9월이 되면, 몸져 눕습니다. 한달간 거의 아무 일도 못합니다. 콧물이 하도 나와서, 나중에는 이게 목으로 내려와서 밤마다 기침을 하다가 잠도 못자고, 낮에는 멍하니 보냅니다. 이것을 보다 못한 제 지인이 이렇게 저렇게 찾아보다가, 저에게 이러한 방도를 말해주었습니다. 비염이 생기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콧속 점막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물질이 외부로부터 들어왔을 때, 점막이 약하니까 과민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찌해야 하느냐, 근본적인 치료는 점막을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점막을 어찌 강하게 만들겠습니까? 코로 숨을 쉬랍니다. 의식적으로라도 코로 숨을 쉬고자 자꾸 노력해서, 코의 점막을 강하게 만드는 일이 비염 치료의 근본적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이 하나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자기애적 탐욕에서 벗어사 타자적 삶을 사는 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생각을 바꾸고, 몸을 돌이켜, 자꾸 의식적으로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호흡하는 일에 우리가 잘 되지 않더라도 자꾸 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자꾸 하다보면, 나중에 우리가 강해집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령으로 호흡하며, 이타적 삶이 몸에 벤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자연스레 시원하게 숨쉬는 사람, 즉 하나님을 꼭 믿어서, 타인을 위해 기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정녕 이러한 사람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예수께서 이것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신게 끝이 아닙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부활하신게 끝이 아닙니다.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승천하신게 최종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하늘로 가신 이유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성령 받는 일에, 즉 자기애적 탐욕에서 출애굽 하여, 이타적 삶을 사는 그 광야길에, 최선을 다해 걸어야겠습니다.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할 한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성령으로 시원하게 숨쉴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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