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14년 9월 21일. 오늘은 내가 난지 11511日. 31년 6개월하고도 3일 살았다. 한글날까지는 D-18. 4시에 기침으로 날 깨우셔서, 생각하게 하시고, 생각 끝에 말씀 주셨다. 새벽에 주신 말숨을 적는다. 이것을 잘 갖추어 전달하는 것이 오늘 종된 나의 임무. 이것을 이루리라.
1. 탕자 이야기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들어간 이들에게는 하나의 직분 밖에 없다. 종이다. 너도 종이요, 나도 종이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가, "종이라도 시켜달라" 말한 것은 참으로 예언적인 말이다.
우리는 아들이라 불릴 자격없다. 나는 없다. 내 행실을 돌아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의 아들 소리를 들을 삶이 아니다. 이건 나를 괴롭게 하지만 정녕 사실이다. 나는 아버지께 한없이 부끄러운 사람인데, 그럼에도 내 속에는 아버지와 함께 하고픈 마음이 있다. 아버지와 함께가 아니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말한다.
눅 15:19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이 말은, 다시 재산을 달라는 말도 아니고, 그저 끼니만 해결하면 된다는 말도 아니다. 이렇게까지라도 말함은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이다. 종이라도 시켜달라는 말은, 그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아들은 아버지 품에 들어간다. 역설이다. 아들로서 권리를 누리고 싶으면 그 나라를 못 누린다. 그러나 종이 되고 싶으면, 아버지 품 안에 들어간다.
나는 자격없다. 삶을 돌아보았을 때,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을 이고 가는 삶이 아니다. 그런데 아들 아니고, 종이라도 좋다. 맨날 혼나는 종, 일 제대로 못해서 핀잔을 듣는 종이라도 좋다. 아버지와 함께 이고 싶다. 받아주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좋다.그런데 성서는 이 마음이 시작이라 말한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시작은 바로 이 마음이다. 자격을 갖춤이 아니다. 자신의 자격없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함께 하고픈 마음이다. 내가 아버지의 종이라도 되고픈 마음. 이 마음부터 시작한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2. 무익한 종이요
그렇다면 종은 어떠한 사람인가? '내가 무엇 했다'고 으스댈 수 없는 사람이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이 구절에서의 핵심은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다. 종이 되겠다는 마음은, 어쩃거나 주인이 명하신 일들에 순종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각오다. 이 마음이 왜 생기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마음이 내 안에 생긴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옳고, 그 옳은 뜻대로 행하고 싶은 마음이 내 속에 있다. 사실 옳게, 올바르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만 그 방법을 모르고, 그 방법을 알아도 할 수 있는 끈기가 부족할 뿐이다. 방법은 말이요, 끈기는 숨이다. 모두에게 말숨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 명하신 일을 내가 실천했다고 치자. 그 방법을 알아서, 어떻게 하다보니까 무언가 일을 이루었다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일로 인해 종은 칭찬받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평가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종은 그저 맡겨주신 일을 실천할 뿐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칭찬과 평가는 종의 기쁨이어선 안된다. 이건 독이다. 종을 종되게 하지 못하는 독이다. 종은 그저 명령 받은대로 할 뿐이다. 이 말이 '예수 믿음'이다. 예수 믿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기어이 이루는 것을 보고, 나도 그를 따라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믿음은 종 됨이다. 그것도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지 않는, 그저 자신을 쓸모 없는 종이라 말하는, 그러한 종이 되는 것이다. 이 종의 이름이 그리스도다. 온갖 궂은 일을 감당하도록, 기름부음으로 임명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종이 한 일에 대한 칭찬은 종 자신이 아니라, 온통 주인에게 돌아가야 한다. 칭찬받음은 종의 몫이 아니다. 종은 맡은 바 일을 하며, 하나님을 드러내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이 시켜서 했다고 하지, 자신이 똑똑하다고 하지 않는다. 주인이 먹여주셔서 하지, 자신이 원래 좀 능력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이 말속에서 우리는 바울의 자아상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이 돌아온 탕자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께 그는 자신이 속한 종교의 수호자가 아니라 종으로서 돌아갔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귀한 일을 온 몸으로 감당하면서도, 이것을 자신의 자랑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종이고, 이 일의 칭찬과 영광은 온통 주인되신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이다. 주인의 명을 거절하는 종에게는 화가 있다. 또한 주인에게 돌아갈 칭찬을 가로채는 종에게도 화가 있다.
이러한 종의 삶은 무척 재미없게 들린다. 그럼 무슨 재미로 사나? 세상은 온통 자랑하고자 산다. 자신을 드러내는 맛에 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맛은 사라진다. 맛따라 사는 사람은 감각이 마비되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른채, 자신의 취향만을 쫓게된다. 삶은 맛따라 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오감의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은 나를 비뚤어진 길로 인도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따라 사는가? 무엇이 아버지께 곧장 이르는 길인가? 뜻따라 사는 길이다. 뜻은 무색무취.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안고,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는다. 마치 어느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숲 속에 있는 할머니집으로 인도하는 보이지 않는 실이다. 손에 남겨진 작은 감촉 하나 가지고 길을 걷는다. 뜻이다. 이 무색무취의 뜻따라 사는 삶이 종의 삶이다. 칭찬하나 나에게 돌리지 않는 맛없는 삶이다. 그러나 아버지께 곧장 이르는 삶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의 삶에는 기쁨이 없는가? 그저 무미건조한 삶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종의 삶은 기쁨으로 가득하다.
3. 종의 기쁨은 오직 이룸과 이뤄짐
종은 맡은 일을 한다. 제 일 아니라, 맡겨진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슨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 종의 기쁨은 하나 뿐이다. 맡겨진 일의 이룸이다. 임무완수가 종의 기쁨이다. 또한 이뤄짐이다. 임무가 완수될 그 날이 종의 기쁨이다.
임무완수 후에 칭찬을 받기 때문인가? 아니다. 임무를 주신 주인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주인의 뜻이 옳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주인의 뜻이 누가 하나 배제하지 않는 전체를 살리는 지혜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은 주인을 생각하고 전체를 생각한다. 그리고 주인의 뜻을 따라 온 몸으로 전체를 살린다. 이 일의 이룸으로 기뻐하고, 이뤄질 것을 기뻐한다.
종에게는 쉴 새없이 일이 맡겨지고, 또 맡겨진다. 그래서 종의 삶은 매번 이뤄나가는 삶이다. 매번 주인의 미션이 떨어지고, 주인의 미션을 이루는 것이 종이 살아가는 이유다. 주인의 뜻 이룸을 위해 살고, 주인의 뜻 이뤄질 때마다, 주인의 혜안에 탄복한다. 자신에게 칭찬을 돌리지 않으며, 그저 그의 현재는 이룸이요, 그의 미래는 이뤄짐이다. 이름대로 산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도다. 현재와 미래의 접점에서 뜻을 이뤄나가는 신의 수레바퀴다.
그런데 오늘날로 하자면 바보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 자기 주관 하나 없는, 고집 피울줄 모르는, 자기 실속 챙길 줄 모른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오로지 주인 말이라면 철썩같이 믿고 따라가는 이 사람은 비판과 자기 주장을 미덕으로 사는 현대인의 자격이 없다. 그러나 현대인이 아니어도 좋다. 바보라도 좋다. 그는 이루도고 칭찬을 거절하고, 주인께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다시 이루고자할 뿐이다. 그의 기쁨은 오직 뜻을 이룸에만 있다. 그래서 날마다 이루고, 날마다 기쁘다.
반전은 여기서 벌어진다. 자신을 모르고, 전체만을 섬기는, 이러한 바보같은 종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사람은 자신을 종이라 하는데, 하나님은 아들이라 하신다. 종되고자 아버지를 찾아갔던 탕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종되겠다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아버지는 껴안아 일으키신다. 부활이다.
이 사람이 어찌 살겠는가? 자신에게 자격이 없는 줄 알아서, 그저 종이라도 같이만 있게 해달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자격없는 그를 받아주셨다. 그래서 이 종을 가리켜 양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아들 자격 없는데 아들 되었으니 양아들이다.
로마서 8:14,15
하나님의 숨결로 인도함 받은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러분은 다시 두려움에 빠지는 종의 숨결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아들의 숨결을 받아, 그 숨결 속에서 "아빠, 아버지"라 외칩니다.
이것은 거룩한 인격이 (우리 속에 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함께 숨으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 구절에서, "하나님의 숨결로 인도함을 받았다"는 말은 맛이 아니라 뜻따라 살았다는 말이다. 숨결은 무색무취. 내 오감을 만족시키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오감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뜻을 붙잡아 한걸음씩 걷기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한 분만을 드러내며 살아왔던 맛없는 삶이다. 그런데 그 삶에 아버지가 나타나신다. 그리고 아들 삼아 주신다. 하나님의 종된 이의 결말은 아들이다. 그 아들은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도 이루고, 또한 이뤄질 것에 기뻐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사니, 그 삶이 온전하다. 곧 구원이다. 이룰 수 없는 자가 이루게 되었으니, 다시 태어난 것이다. 거듭남이다. 다시 태어났으니 그는 부활한 것이나 진배없다. 혹여나 이 아들이 죽더라도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그를 다시 일으키실 것이다.
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 찾는 이여! 오늘도 더욱 그리스도로, 그리 스도록! 종이여! 아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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