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께서 깨닫게 하신 바가 있어, 블로그에 남겨둡니다.
오늘은 2014년 9월 14일, 제가 태어난지 11504일이 되는 날입니다. '곧은 길 걸을 이가 태어났으니, 오 경사로다'라 생각했습니다. 3.1운동이 있고난 뒤 23393일만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이 또한 무슨 뜻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비염으로 한동안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기침으로 누울수도 없고, 눈은 충혈되어 빨갛게 되고, 코로는 연신 콧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왜 인지 알 수 없으나, 언젠가부터 저에게 이런 병이 생겨, 매년 3월과 9월이 되면 밤잠을 거의 못다자시피 했습니다. 오늘도 잠 자기는 글렀구나 싶어서 불꺼진 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습니다. 어떻게든 숨을 쉬어보자고 호흡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생각이 났습니다. 예전에 놋뱀에 대한 무슨 깨달음이 있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메모를 뒤져보았으나 써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놋뱀에 대한 이야기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이야기입니다.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출애굽했습니다. 광야 길을 걷던 중, 네겝 지방의 '아랏'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사람 몇몇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주님께 "주님께서 이 백성을 우리 손에 붙이시면, 우리가 그들의 성읍들을 전멸시키겠습니다" 라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맹세대로 대승을 거두게 되어, 그 장소를 '철저한 승리'라는 이름의 '호르마'라는 말을 붙여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승리가 있은지 얼마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서 이 고생을 시키냐는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이후 불뱀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탄원하자, 하나님은 불뱀을 만들어서 기둥에 달아놓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 누구든지 살게 된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었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그 구리로 만든 뱀을 보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불연듯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불뱀에 물려 일생을 반병신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치 물린 데가 아파서 제대로 걷지 못하고, 호흡도 거친 사람 마냥, 저는 올바르게 살지도 못하고, 지금은 병까지 얻어 숨조차도 제대로 쉴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불뱀은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곧 불뱀입니다. 나를 조바심 나게 하는 탐심이 불뱀이요, 음욕이 불일듯 하는 내 속의 치정이 불뱀이요,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하는 어리석음이 불뱀이었습니다. 곧 불가에서 말하는 '탐진치'였습니다. '불뱀에 물려 절뚝거리는 사람처럼 이 탐진치의 문제 앞에 한없이 약한 이가, 사람들을 가르치겠다고 앞에 섰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생각은 불뱀에서 놋뱀으로 넘어왔습니다. 불뱀이 탐진치라면, 놋뱀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놋뱀은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굳어버린 불뱀이었습니다. 곧 굳어버린 탐진치입니다. 더이상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게 된 악입니다. 내 삶에 아무 힘도 끼칠 수 없는 사탄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라"하셨습니다. 보는 것은 소망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했던 그 악이, 그 근원부터가 말라버린다는 말입니다. 콧물 마저도 마르지 않으면 삶이 무척이나 괴로운데, 이 악의 구정물은 쉴새없이 인류를 더럽혔습니다. 인류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저를 괴롭게 합니다. 남들이 보지 않는 어두운 곳에 죄짓는 내가 있습니다. 그 죄는 죄책감으로 마음에 남아,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려는 나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 악순환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어느새 하나님 앞에 떳떳하지 못한 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지 못하니, 사람 앞에서도 속이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놋뱀을 보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낫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늪에서 삶 같지도 않은 사람이 끊어내고 새 삶을 얻는 것입니다. 곧 부활입니다. 놋뱀 믿으면 부활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집에서 놋뱀을 만들어서 걸어놓으면 악귀를 물리치는 주술적인 효과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놋뱀은 상징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왕기하 18:4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놋뱀을 통해서 기적같은 일을 경험했던 이스라엘은 이 놋뱀을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그 결과 놋뱀은 아세라 목상과 같은 이방 신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놋뱀을 보라는 것은 상징을 통해 진상을 마주하라는 말이지, 그 상징에 매여서 비인간적인 삶의 형태를 고수하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상징을 부수었습니다. 그런데 놋뱀이라는 상징이 다시금 등장하는 날이 옵니다.
요한복음 3:14~21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놋뱀은 인자입니다. 인자는 곧 예수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이 땅에서 악이 굳어버려 아무 소용없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놋뱀입니다. 예수께서 범죄한 자들의 손으로 십자가로 달려, 그 몸이 들려 올려졌습니다. 오늘날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불뱀에 물렸던 사람들이 모세의 소리치는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 없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놋뱀을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예수를 신성시하면 된다는 말입니까? 우상 제단에 모시듯 예수를 모셔놓고 분향하면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놋뱀을 보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제가 이쯤 생각했을 때, 불꺼진 방에서 홀로 생각하고 있던 저에게 주께서 물으셨습니다. "예수를 믿겠느냐?"
이 말에 제가 망설였습니다. 전도사인데, 이제껏 교회에서 무수한 말들을 했는데, 속으로는 끄덕끄덕하고 있었지만,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망설이는 와중에, 저 말의 의미를 저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너의 탐진치가 굳어버릴 것을 믿고서, 악과 맞서 싸우는 예수의 싸움에 동참하라는 전쟁 동원령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러한 말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도 사람이었기에, 무수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죄 없는 자신이 십자가 처형 당한다는 이 부당한 현실 앞에 예수는 괴로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영광을 탐내지도 않으셨고, 당시 사람 취급 받지 못했던 여성들을 제자로 삼으시면서도 치정에 휘말리지 않으셨으며, 폭력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 길로 곧장 가,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원수의 폭력 앞에서도 먹힘으로 응수하는 사랑의 완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제 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예수를 믿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믿겠느냐?"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한 번 믿는다고 되는 것 아니라, 앞으로의 모든 순간 속에서 이 싸움을 싸우겠느냐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소리를 냈습니다. '아멘'이라 할까, '네'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네 주님" 이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제 몸에 한기와 전율이 돋았습니다. 숨 쉬지 못해서 하루종일 쌕쌕 거리고 있는 저를 찬 숨이 정수리부터 덮는 듯 했습니다. 눈물이 뚝 떨어졌는데, 어느덧 콧물은 멈추었고, 눈에 가렵고 갑갑했던 것이 없이 시원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제 병을 가져가셨습니다. 몸으로는 공기를 마시고, 영으로는 거룩한 숨 마셨습니다. 몸과 마음이 시원했습니다. 마음에 의심은 사라지고, 다시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생겼습니다. 거룩한 숨으로부터 힘을 얻었습니다. 이 날이 너무 기뻐 기억하고자, 날 수를 세고 지금 앉아 타자를 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는 누구나 예수를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고 편 가르고 누군가를 망치고자 예수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를 통해 누구나 악과 싸우고, 곧은 삶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거룩한 숨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은 정녕 진실이었습니다. 거룩한 숨이 나를 씻어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숨으로 씻어나니, 오늘의 내가 새롭습니다. 이전의 나와 다릅니다.
나를 괴롭히던 그 불뱀이, 딱딱하게 굳어 하늘에 걸려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여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는, 오늘 뱀과 맞서는 자들에게 거룩한 숨을 보내주십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이 받았던 그 거룩한 숨을 오늘 저도 받았습니다. 그 한 사람을 따라, 이 땅에서 뱀이 아무 힘도 쓰지 못하게끔, 이기고 또 이기며 살겠습니다. 그럼 믿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은 오는 시대를 사는 삶입니다. 오는 시대는 악이 패배한 시대, 진실과 정의의 시대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에게 오는 시대가 돌입합니다. 눈을 들어 현실을 보면, 악이 패배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 뱀을 아무 힘도 쓰지 못하게 굳혀버린 사실이 제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역사의 의미로 믿고 하루를 삽니다. 그 하루는 뱀이 나에게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 뱀을 이기셨음을 믿고, 나도 이기며 삽니다. 이기고 또 이깁니다. 내 주님을 믿고 따름입니다.
최영 장군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말한 것과 같이, 악 보기를 굳은 놋뱀 보듯하여, 내 삶에서 탐진치가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죽은 것으로 굳혀버립니다. 하나님의 숨결은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시금 말씀이 한 구절 더 떠올랐습니다.
요한계시록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성서에서 바다는 줄곧 악을 상징했습니다. 인류를 모두 수장시켰던 물. 이스라엘 백성의 앞 길을 가로 막던 홍해, 계시록에서 세상을 짓밟는 짐승들은 바다 위에서 올라옵니다. 그런데 바다가 굳었습니다. 넘실대던 파도가 잠잠해지고, 이긴 사람들이 유리 바다 위를 걷습니다. 바다 얘기를 하니 이 구절도 떠오릅니다.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바다가 유리바다가 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상징 언어입니다. 뱀이 놋뱀 되는 것입니다. 악이 패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기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온다는 말입니다. 이 일에 기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모두가 바라지 않습니까? 바라지 않는다면, 악인일 뿐입니다. 저는 오늘 탯줄이 끊어진 기분입니다. 탯줄이 끊어지니 숨을 맛보았습니다. 그 숨은 정신을 시원하게 하고, 몸에는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이 힘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요, 하나님의 힘이니, 악을 이겼던 예수의 힘입니다. 그러니 나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이것을 믿겠습니다. 내일도 믿겠습니다. 이 글을 기억하겠습니다. 11504日. 곧게 걷도록 다시 태어난, 참으로 경사로운 날의 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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