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 좁게는 모세가 받은 십계명을 포함한 모세 오경. 넓게는 구약성서 전체를 가리킨다. 흔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 '율법주의'신앙이다" 라는 생각들이 기독교 진영에 만연했으나, 이것은 구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잘못된 생각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이스라엘에 속한 자만이 율법을 지킬 자격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헌법을 지켜야 한국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헌법의 영향 아래 있음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즉,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체성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생활 법규인 것.
*의롭다 선언 : 설명이 길어질 것 같은데, 우선 아웃라인을 잡아보면, 이 '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찾기 위해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는 아브라함 이야기고, 둘은 이스라엘 이야기고, 셋은 예수 이야기다.
1) 아브라함의 의
먼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의롭다 선언하시는 이야기가 창세기 15장에 등장한다. 이 때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선언이다. 이 선언은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졌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었느냐?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이 약속의 내용은 창세기 12장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냐?
(1) 아브라함 한 사람이 '여럿'되고,
(2) 그들이 삶의 터전을 얻어,
(3) 하나님의 말숨으로 사는 것으로, 타락이 뒤집어 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4) 이것을 믿으면,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다. 이 하나님 인정을 가리켜 '의'라 부른다.
즉, 의는 보이지 않는 학교 뺏지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 약속을 믿는 이는 누구나 하나님의 가족이다. 그리고 그 가족임을 나타내는 보이지 않는 뺏지, 곧 정체성이 주어지는데 그것을 가리켜 '의'라 말한다는 것이다.
이후, 이 '아브라함 약속'과 '의'가 어떻게 이해되는지가 중요하다. 여기에 이스라엘과 예수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2) 이스라엘의 의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1) 혈연으로 연결된 유대인만이 아브라함과 연결된 '여럿'이다.
(따라서 유대혈통이 아닌 자들은 아브라함과 무관하다.)
2) 가나안 땅 만이(지금의 팔레스타인), 약속 받은 백성의 유일한 삶의 터전이다.
3)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4) 이 말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으로 나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가족이다. 의롭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장하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타락이 뒤집어 졌는가? 인류는 문제를 해결했는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혈통과 율법으로 정체성 삼는 배타성은 오히려 분열의 문제를 가중시켰고, 최후에는 이방인 로마와 전쟁을 벌여 이스라엘은 천년이 넘도록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 두 가지가 문제다. 하나는 잘못된 기준. 둘은 그 잘못된 기준으로 만드는 배타성. 곧 자기생각.
기준이 뒤틀린 자기 생각을, 자신의 의 삼는 것처럼, 자신에게 위험한 것은 없다.
3) 예수의 의
이스라엘이 망하기 불과 얼마 전에, 예수가 등장하여, 이 '아브라함 약속'과 '의'의 의미를 새롭게 드러냈다. 유대인들의 생각과 비교해보면, 예수의 말과 삶이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음과 같다.
(1) '예수를 통해 아브라함의 약속이 이뤄질 것을 믿음'으로,
유대인, 이방인 할 것없이 아브라함과 연결된 '여럿'이 될 수 있다.
-혈통이 아니라 믿음이다. 혈연적인 모든 경계를 뛰어넘으면서도, 모두를 단절시키지 않고 잇는, 혈통 아닌 혈통이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족되는 것은, 최초 약속이 밝혀진 아브라함 때부터 그러한 것이었다.
(2) 하나님이 주신 삶의 터전은 가나안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다.
-혈통의 경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공간적인 경계도 무너진다.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 받은 전부라 생각했던 이스라엘과 달리, 예수는 가나안을 포함한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땅이고, 하나님 가족의 삶의 터전이라 생각했다.
(3) 모든 민족이, 모든 곳에서 하나님 말숨, 글자가 아니라 예수의 삶으로 산다.
-글자는 죽이는 것이고, 인격은 살리는 것이다. 글자는 나와 너를 판단하도록 하지만, 인격은 나와 너를 살게 한다. 따라서 예수의 인격은 글자에 함몰되지 않고, 글자를 살아내게 하는 힘이 된다.
(4) 이 모든 것이 '의'라는 단어에 압축되었다.
-예수가 밝힌 '의'는, 유대인들이 정의한 배타성을 넘어, 비로소 아브라함의 의와 통하는 제 뜻을 갖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를 통해 이뤄질 것을 믿음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 가족이라는 자격에 걸맞게 살기 위해 예수의 인격에 힘입어 산다.
위의 내용을 이해했다면, 다음의 물음을 던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를 통해 어떻게 이뤄졌는가?'이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답변으로 십자가와 부활이 논의된다. 타락을 뒤집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뒤에 바울이 이야기를 준비해놓고 있다.
*그 날 : '의'에 대해서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심판이다. 지금 바울은 심판의 맥락에서 계속 이야기를 전개해왔다. 지금은 현시대와 오는 시대가 중첩된 시대이며, 곧 심판의 시대, 판단받는 시대이다. '심판', '판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은 재판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옳다 인정받고, 이방인들이 그르다 판결날 최후의 재판을 기다렸던 것이다.
우선 '의'의 의미가 이스라엘이 바라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재판 장면이 달라진 것이다. 옳다 인정받는 쪽에 서는 사람은, 혈연 이스라엘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다. 무엇을 믿는 사람들이냐?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졌고, 이뤄지며, 이뤄질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받는 그 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점이다. 언제 그러한 판결이 벌어질 것인가? 앞에 동사 사용에도 밝혔듯, 이 재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재판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심판이 '이뤄졌고', 오늘 내가 예수를 통해 아브라함 약속 성취됨을 믿을 때,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이뤄지며', 현시대의 마지막 날 최종 재판으로 '이뤄질 것'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모든 시간을 덮는다.
바울이 말하는 그 날은, 미래시제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다가올 그 날이다. 현시대의 끝. 이 날에 율법 안에서든, 밖에서든 벌어졌던 모든 죄들이 낯낯이 드러나고 그에 합당한 판결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