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 : '판단'이라는 말은 '심판'이라 번역할수도 있다. 즉, '남을 판단한다'는 말은 '남을 심판한다'과 같은 뜻. '정죄'라는 단어도 나오는데, 정죄는 '죄가 있다고 정하는 것'이다. 즉, 이 단어들은 재판의 그림이다. 그리고 판단, 심판, 정죄하는 자는 다름 아닌 재판장이다.
판단의 역사는 유구하다. 아마도 최초의 판단은 에덴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고, 누가 계명을 어겼느냐고 묻는 하나님 앞에서,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죄를 떠넘기는 장면이 최초의 판단이요, 정죄일 것이다. 즉, 인간이 스스로 재판장 된 것이다.
그 아담을 따라, 오늘날은 만인이 재판장이다. 서로 판단하고 심판한다. 싸움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허나, 심판자 행세하는 자는 자신이 죄라고 지목했던 그 일을 스스로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세네카가 좋은 예다. 그는 도덕적 철학적 문제를 깊이 사색한 후, 자신이 사회 일반의 부도덕으로 여긴 것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세네카 스스로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정해 놓은 규칙들을 깨뜨리는 것을 간파했다. 세나카와 고전 세계의 다른 철학자들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이 문제를 성찰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다니 어찌된 일인가?"(톰라이트, <로마서> p.53)
*회개 : 회개는 희랍어로 meta.noia다. meta는 change고, noia는 mind다. 즉, 회개는 change my mind다. '마음바꿈'이다. 본문에서는 '깨닫고 돌아서기'. 이것을 불교 용어로 '각(覺)'이라, '깨달음'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바꿈의 내용,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심판자였던 이가,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더이상 자신이 심판자가 아니라, 심판받는 사람임을 아는 것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사람의 판단에 얽매이라는 뜻이 아니다. 심판의 주체는 한 분이시다. 그 한 분에 의해 판단받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
*인자하심 : 판단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은 언제나 판단해야 한다. 문제는 '그 판단의 기준이 무엇인가'이다. 끊임없이 사고하고 느끼는 마음의 소용돌이에서는 반드시 붙잡을 것이 필요하다. 결정을 내리기 위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신의 판단만을 붙들면, 회개가 필요없다. 그러나 자신의 판단이 불완전한하고, 고장났음을 확인한다면 회개는 절실하다. 무엇도 붙잡아둘 수 없는 그 분을, 붙들기 위해 손을 내민다. 그 때 그 분은 우리 손에 붙들려주신다. 그 분은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인자하심은 나이많은 할아버지가 손자의 재롱을 무엇이든지 봐주며 껄껄껄이 아니다. 가장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 인내심있게 기다리는 것. 이것이 인자하심이다. 다시 말해, 온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판단자를 만나고자 하는 것이 회개요, 만날 때까지 우리를 참아주시는 것이 인자하심이다.
*진노의 날 : 최후의 심판을 말하는 몇몇 종교들이 있다. 어떤이들은 이 최후의 심판을 조롱하고, 그러한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허나, '심판'과 '판단'을 치환한다면, 그 날은 '최후의 판단'이다. 최후의 판단이 없을까? 판단과 판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모든 사람의 판단에 대한 최종 결론의 날이 정말 없을려고?
나는 마지막 판단의 날이 온다는 것을 믿는다. 그렇다고 어떤 이들이 우려하듯, 최후의 심판때에 다 결정될테니 현실 속에서는 넋놓고 있는 무기력이 나에게는 없다. 오히려 더욱 정신을 차리고자 한다. 더욱 옳게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 일에 결말이 있다는 사실이, 오늘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 날이 '진노'의 날이 된다는 것이 불쾌한가? 이 말은, 그만큼 지금까지의 인간의 판단들이 옳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옳지 못함을 다 드러내버리고 제대로 바로 잡는 날이 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올바른 것이 마침내 드러나는 결말'이다.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사실 이러한 결말을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오는 시대의 생명 : 성서에서 '영생'이라 번역되어 있는 말을 '오는 시대의 생명'이라 푼다. 영생이라 하면 영원한 생명이라, 마치 고무줄을 양쪽에서 잡아 늘이듯, 굴곡없는 시간의 연장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성서가 말하는 영생은 그러한 것과 거리가 멀다. 영원은 영원인데, 가운데 턱이 있다. 시대와 시대의 분기점이 있다.
유대인들은 두 가지 시간에 관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현시대'요, 다른 하나가 '오는 시대'이다. 현시대에서 오는 시대로 넘어가는 것은 스무쓰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악으로 창궐한 현시대가 그대로 이어진 것이 오는 시대라면, 이것이 어찌 희망이 될 수 있겠는가? 현시대와 오는 시대 사이에는 판단이 있다. 심판이 있다. 그것은 인류에 대해 선과 악을 판결할 수 있는 존재의 심판이다. 그 심판으로 모든 악이 드러나고, 해결되며, 사람은 새시대, 오는 시대를 맞는다. 그 오는 시대에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곧 영생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 시대인가? 지금은 현시대와 오는 시대가 중첩된 시대이다. 악한 현시대 위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고, 스스로 시대 사이의 아픈 요철이 되셨다. 그 아들이 인류의 심판을 대신 짊어졌다. 그래서 아들의 목숨이 꺽임으로 새시대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현시대는 지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새시대는 완전한 도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인격 :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현시대에 살 것인지, 오는 시대에 살 것인지, 불완전한 판단자로서 살 것인지, 완전한 이에게 판단받는 자로서 살 것인지. 이 중요한 '판단'이 인간에게 맡겨졌고, 인간은 이 판단에 솔직해야 할 것이다. 판단이 잘 되었는지 안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경에 보니,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는 '열매를 보고 안다'고 써있더라. 옳은 판단은 인격을 자라나게 할 것이다. 분명하다. 이것으로 안다. 그리고 그릇된 판단은 인격을 굽게(惡)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