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서는 것은 맘이 아니라 몸이지. 맘은 언제나 중심에."


1. 캄캄한 낮, 버림 당하신 왕


마가복음 15:33~41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정오에서 오후 세시까지. 가장 해가 뜨거운 한 낮에 그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밝지 않았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캄캄한 낮. 사람들은 백주대낮에 그를 죽였지만,하나님은 그 낮마저도 어두움으로 덮어버리셨습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 어두운 오후 세시경, 예수는 소리께서 소리지르셨습니다. 아람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내가 버림당했습니까?"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께 마저 버림 당하셔야 했을까요? 왜 그가 이렇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셔야 했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이 예수의 마지막 외침 속에서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2. 굴욕의 포도주, 하나님 나라의 새 포도주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이 외침을 들었던 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의 외침을 듣고서, 예수께서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은 걸 듣는 법입니다. 이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 봅시다. 엘리야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옛날 엘리야라는 선지자는 우상을 섬기는 850명의 이교도들을 묵사발을 냈던 이스라엘의 영웅 입니다. 이 A라는 사람은 만약 예수가 진짜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을 모두작살내는 진풍경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A옆에는 B가 있었습니다. 이 B도 A와 생각이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달려가서 신포도주를 헝겁에 묻혀다가 장대에 달아서 예수의 입술을 적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이 장면을 혹시나 볼까하여 그 죽음을 지연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소름끼리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를 마치 실험용 쥐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확인하고자 예수의 목숨을 쥐고 흔듭니다.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 사람을 말 그대로 짜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의 생각대로 예수가 정말 엘리야를 불러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작살낸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래도 이 A와 B는 이 심판 속에서 자신들은 열외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심판과 무관한,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이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가 설령 엘리야와 같은 사람라 할지라도, 자신들에게는 해가 전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엘리야를 아는 것으로 보아, 이 A와 B는 유대 사람일 것입니다. 나는 유대인이니까 심판과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을 짜먹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잘못 되었음을 전혀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누구의 모습입니까? 나는 구원받을 사람이라 굳게 믿으면서도, 정작 다른 사람 귀한 줄 몰르고선, 이용하고 짜먹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이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마음에 어려움 없이, 내가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지 않고 있다는 자각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 사람들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사람보다 기적을 더 바라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짜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예수는 그들에게 철저히 능욕당하시고 짜먹히셨습니다.


  그런데 이 능욕의 순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4:23~25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최초의 만찬 때,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고. 예수께서 해골 언덕에 끌려왔을 때, 그 갈증나는 목을 포도주로 축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초의 만찬 때 말씀하셨던 것을 생각하셨는지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마가복음 15:23). 그런데 그 절박한 순간에서도 거절했던 포도주를 바로 이 때 마시셨습니다. 언제 입니까? 굴욕의 순간!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희롱하는 이 비참한 순간 입니다. 어디입니까? 바로 십자가 위입니다. 이 포도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포도주가 하나님 나라의 포도주입니다.


  도대체 왜 이 굴욕의 포도주가 하나님 나라의 새 포도주란 말입니까? 여러분은 언제 가장 굴욕을 맛봤습니까? 저는 학교 다닐 때, 키가 작고 힘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래도 다른 덩치 큰 친구들에게 안지려고 욕도 많이 하고 센 척 잘 했습니다. 그래서 좀 덜 맞고 다닌 것 같습니다만, 그러다도 어쩌다가 한 번 싸움이 붙으면 저는 참 많이 맞았습니다. 나와 나이가 동갑인 친구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힘으로 제압 당하는 일은 얼마나 굴욕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잠도 안오고 복수하고 싶어서 이를 갑니다. 그러나 차마 복수하진 못하고 암묵적으로 그 아이에게 '지는 아이'가 됩니다. 이것 참 기분 더러운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죽 하셨겠습니까? 잘못도 없는 예수를 붙잡아다가 희롱하고 모욕하고, 그런데 예수는 바로 이 순간 포도주를 잡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 포도주입니다. 새 것이라는 말은 이전에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말 그래도 혁신을 가져오는 신제품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곧 참음과 용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새 포도주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음만 먹으시면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를 불러다가 이 자리에서 예수를 손가락질 하는 자들을 다 싹쓸이 해버릴 수 있습니다. 다 무릎을 꿇려놓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 것 아닙니다. 힘으로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일은 이전의 지도자들이 다 했던 것이고, 다 실패했던 옛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방식이 아닌 헌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은, 세상에 없었던 하나님의 다스림. 곧 하나님 아들의 굴욕, 우선은 당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마구잡이로 당해주는 것 아닙니다. 하나 믿는 것입니다. 나를 해하는 그 사람이 정신 차릴 수 있을 거라고. 저 사람 안에도 하나님의 마음 있을 거라고. 그러니 당해주는 나를 통해 저 사람의 양심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방식이 하나님 나라의 새 방식. 바로 예수의 방식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친구들에게 얻어 맞으면서도 그들이 폭력을 버리기를 기도하고, 그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미는 진정한 용기를 가졌으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어려운 것 압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전의 사람들이 할 수 없었던, 역사의 새 발걸음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렇게 그들에게 반격하지 않으시다가, 결국


3. 길을 걷다가 길이 되는 것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목요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고 한 밤중에 제자의 밀고로 잡히셨습니다. 잡히자 마자 그 날 밤 내내 유대 지도자들에게 심문을 당하시고 로마로 넘겨지셨습니다.  그리고 금요일입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전쟁 포로 취급을 당하시며,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날 오후 세 시경입니다.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마지막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예수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죽음의 의미를 성전 휘장이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전이 지성소와 성소로 구분되어 있다고 했지요. 대제사장들만 1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지성소입니다. 이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법궤 위에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새롭게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이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 두꺼운 커튼입니다. 휘장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으심과 함께 이 지성소를 가로 막고 있던 성전 휘장이 좌우로 쫙 찢어졌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제가 이것을 어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어제 문득 가사가 떠올랐습니다. 


"길을 걷다가, 길이 되는 것

길을 걷다가, 길이 되는 것,

그 분은 어디에? 우리의 발 밑에,

나는 어떻게? 그 분을 밟고서."


  우리가 그간 살펴왔던 모든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그 처음이 기억이 납니까? 광야에서 엘리야처럼 출애굽을 소리치던 세례요한 이야기로 우리는 시작했습니다. 그는 "왕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분은 오셔서, "내가 길이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럼 도대체 그 왕의 길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무와도 편 먹지 않고, 어떤 사람과도 함께 밥 먹을 수 있는 사람되는 길이었습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추구하는 길이었습니다. 얻어맞고 욕을 먹는 굴욕적인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어 참고 용서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도 이 길을 걷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왕이야!" 우리가 왕이면, 우리도 왕의 길을 걸어야죠. 그 왕의 길을 그려놓은 것이 마가복음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시작부터 끝은 예수의 길이자, 곧 우리의 길입니다. 그 분은 먼저 그 길을 걸으셨고, 곧 그 길이 되셨습니다. 그 왕은 그럼 어디 계십니까? 그는 우리의 발 아래 계십니다. 왜 만왕의 왕이 우리의 발 아래 깔린 길이 되셨습니까? 우리도 그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나를 밟고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 밟고 가는 이 길 말고는 생명의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밟고서 그 같은 길을 걷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길, 그 길은 수치스럽고, 굴욕스럽고, 비참하다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말합니다. 이 길만이 이전에는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하나님 나라의 새 것을 내는 길이야! 


  그 길을 따라 걸으세요. 그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그 왕의 길을 우리가 걸읍시다. 그리고 그 길을 걷고 걷고 자꾸 걸어서 우리도 그 길이 되어 버립시다. 그럼 누군가가 우리를 밟고 또 그 길을 걷지 않겠습니까? 자꾸 자꾸 사람들이 그 길을 밟고, 또 밟다 보면, 그 길이 평탄해지고 편한 길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누구나 쉽게 다닐 수 있는 편한 길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어떤 사람과도 밥 먹을 수 있고, 자신이 세상의 제물되어, 굴욕을 용서로 바꾸는 길이, 모든 이의 길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이 요원하다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나부터 길을 더듬어 그 분이 닦아놓으신 길을 걸으면 됩니다. 안될리 없습니다. 


  그 '길'이라는 것은 다른 것 아니에요.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의 삶의 방식. 예수께서는 바로 이 길을 제자들과 함께 가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세리, 병자, 이방인들과 밥 먹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셨으니, 우리도 그런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어야죠. 바다 건너 산에 올라 사람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찢어주시고, 이것이 인자의 몸뚱이라 하셨으니, 우리도 우리 몸을 찢어 다른 사람들 먹일 각오를 해야지요. 거지 바디메오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후에는 성전을 뒤집어 놓으셨으니, 세상의 거짓된 체계들 앞에 당당할 맘 품어야 지요. 기어코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뜻한바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니, 우리도 잘 살 생각만 말고, 하나님의 뜻한 바대로 잘 죽을 생각을 해야지요.


  이 길이 놓여서 휘장이 찢긴 것입니다. 예수의 길을 따라 가면, 그 휘장 속 지성서로 누구나 마음껏 들어갈 수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 가던 그 곳이, 우리의 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휘장 안 쪽에는 법궤가 놓여 있습니다. 법궤뚜껑은 시은좌라 부르는데,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거기 임재하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1년에 한 번 대제사장은 그 시은좌에 피를 뿌리고,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 휘장 안 피뿌린 법궤 뚜껑이 이제 어디겠습니까? 하나님 아들이 모든 피를 뿌려, 죄를 사하신 바로 그 자리가 시은과입니다. 하나님 계신 곳입니다. 아버지가 탕자들 돌아오기를 학수고대 하시는 곳입니다. 십자가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 길을 따라서 함꼐 십자가로 같이 갑시다.


  그 길을 간다함은, 우리도 제물이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듯, 우리도 십자가로 가려면 제물되어야 합니다. 제물은 자기 생각 없습니다. 제물은 자기 소유 없습니다. 온통 하나님께 다 맡겨드리고 죽고자 하나님 앞에 나서는 것이 제물입니다. 그리고 제물은 그 십자가, 시은좌에 가서 무엇합니까? 다른 이들의 죄를 위해 피뿌립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 창조하신 인간의 인간다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사람 되도록 하나님께 초대를 입었습니다. 





  예전 드래곤볼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본 생각이 납니다. 야무치가 천하제일 무술대회에서 투명인간과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투명인간이니 보이지 않아서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크리링이 수를 쓴 것이, 야한 것만 보여주면 코피를 쏟는 무천도사를 이용해서, 투명인간에게 피를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피뿌림에 의해 투명인간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이야기가 다 잘 들어맞는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그래도 들어보세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눈에 안보이십니다. 마치 투명인간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분명히 계시다는 사실을 어찌 드러낼 수 있습니까? 그를 위해서 피흘리는 사람을 통해, 그는 확실히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그를 위해 목숨걸어 피흘릴 때, 그 피를 본 이들은 하나님을 감히 부정할 수 없습니다. 즉 제물은 하나님을 뚜렷이 나타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제물되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제물됨. 그 길 걸음, 아버지 만남. 그리고 우리는 다음 주에, 이 제물의 끝이 그 비참한 도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역사적 사실을 마침내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뚜렷이 나타내려는 제물들의 삶을, 온통 희망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4. 그 길을 떠난 이방인과 여자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그리고 왕께서 친히 길이 되시니 이제 탕자들의 유턴이 시작됩니다. 예수의 죽으심을 보고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깨닫은 사람은 율법에 능한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를 죽인 로마의 군대 지도자인 백부장이었습니다. 폭력을 섬기던 이방인이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가장 먼저 그의 진가를 깨닫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이방인이 말입니다. 

  또한 여자들입니다. 지금 그 잘난 유대 남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베드로? 요한? 바울은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제 죽이러 다니게 될 것이고요. 길이 놓였는데, 그 길 앞에 아무도 서 있지 않습니다. 여자들만이 십자가 아래 모여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사람으로 계수 하지도 않는 그들이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어디서부터 어떻게 길을 떠나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교회는 전통속에서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그 길을 떠날 것을 가르쳐왔습니다. 바로 기도와 이야기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이제 그 길을 떠나겠다고 말씀 드리세요. 그 분은 들으십니다. 그리고 이야기입니다. 복음서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직접 예수의 삶의 방식을 살피는 것이 언제나 왕의 길을 걸음에 있어서 바른 시작이었습니다. 떠나세요. 생명을 따라.



2014年 6月 넷째주 성도교회 청소년부 설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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